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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책] 홍준표, 정치가 왜 이래? 책 분석
functor 2025-03-04 12:41   조회 : 726

서론

홍준표 대구시장은 보수 진영의 중진 정치인으로서, 최근 몇 년간 특유의 직설적 화법과 소셜미디어 활용을 통해 눈에 띄는 정치적 행보를 보여왔다. 그는 2022년 지방선거를 통해 대구시장에 당선된 이후, 당내 갈등과 논란 속에서도 자신의 정치 노선을 견지해왔다. 예컨대, 2023년 여름 집중호우 속 골프 라운딩으로 물의를 빚어 국민의힘 윤리위원회로부터 당원권 정지 10개월의 중징계를 받으면서도, SNS를 통해 “과하지욕(跨下之辱)” 같은 표현으로 불만을 내비치며 당의 처분을 견디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한편 그는 2025년 1월 네번째 저서인 *『정치가 왜 이래?』*를 출간하여, 2020년 말부터 2022년 말까지의 자신의 페이스북 정치 일기를 묶어 정치권에 대한 쓴소리를 담았다. 이 책에서 홍준표는 “공직자는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살아야 합니다”, “정치에도 금도(襟度)라는 게 있습니다”, “선출직 지도자는 국민에게 거짓말해서는 안됩니다” 등 정치인의 도덕성과 책임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내놓고, 표지에는 “나라와 국민을 팔아 시정잡배 노릇이나 즐기는 한심한 정치인들에게 던지는 준엄한 메시지”라는 강경한 문구를 실었다. 이러한 홍준표의 행보와 주장은 과연 어떤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평가될 수 있을까? 본 고에서는 마키아벨리, 슘페터, 한나 아렌트 등의 관점을 원용하여 홍준표의 정치적 태도와 전략을 분석하고, 포퓰리즘과 권위주의, 민주주의 공고화 등의 정치학적 프레임워크 속에서 그의 정치행태를 비판적으로 조망해본다. 또한 *『정치가 왜 이래?』*에 나타난 홍준표 주장의 논지를 검토하여 그 논리적 일관성과 현실 정치와의 연관성을 평가해보고자 한다.

 

마키아벨리적 관점: 권력 전략과 도덕성의 이중성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에서 결과 중심의 현실주의를 강조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마키아벨리즘”은 **“윤리의 규범으로부터 현실정치의 해방”**을 지향하며,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권모술수를 가리지 않는 통치자의 행동방식을 정당화하는 현실 정치관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홍준표의 정치적 태도는 한편으로는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전통적 권모술수의 전략과 충돌하거나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면모가 엿보인다.

우선, 홍준표가 정치권에서 보여주는 권력 획득과 생존 전략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권력자의 “비르투(virtù)”, 즉 상황을 주도하고 운명을 개척하는 능력을 부분적으로 연상시킨다. 그는 여러 차례 선거 패배와 당내 갈등을 겪고도 정치적 재기를 이뤄낸 바 있다. 2017년 대선 패배 후에도 2021년 야권 경선에 도전하고, 비록 경선에서 패배했지만 곧바로 2022년 지방선거에 출마하여 대구시장에 당선됨으로써 정치 생명을 이어갔다. 이러한 끈기와 복원력은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군주의 적극적인 운명 개척과도 맥이 닿아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민심과 엘리트의 균형을 잘 맞추며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는데, 홍준표는 당내 엘리트나 기득권과 마찰을 빚더라도 대중적 지지를 직접 호소함으로써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대 2021년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당원 투표에서는 열세였으나 일반 국민 여론조사에서는 우위를 보였던 그는 “민심을 거역하는 당심은 없다”는 신념을 내세워 당 지도부와 기득권을 비판하며 대중의 지지를 호소했다. 이는 마키아벨리가 말한 통치자가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여 귀족(현대적 의미의 당 엘리트)들을 견제하는 전략과 유사한 면이 있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민중의 지지가 없으면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취지로 조언한 바 있는데, 홍준표도 당내 기반이 약화될 때마다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이처럼 민심을 동원하여 엘리트를 견제하는 행태는 권력투쟁의 관점에서 마키아벨리적 현실정치 전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홍준표의 정치행태는 마키아벨리가 권고한 신중함과 지략의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국민에게 미움이나 경멸을 사지 않도록 언행을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군주는 잔인하다는 평을 듣더라도 무질서보다 질서를 유지하는 편이 낫다”**거나 **“군주는 필요할 때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겉으로는 덕을 갖춘 듯이 보여야 한다”**는 식으로, 통치자는 평판 관리에 유능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홍준표는 자신의 솔직함과 강경함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지만, 이러한 거침없는 언행이 오히려 역풍을 맞은 사례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 폭우 중 골프 회동 사건에서 홍준표는 “주말에 골프 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느냐”는 식의 해명을 내놓아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태도를 보였고, 이는 당 윤리위 징계로 이어지며 그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마키아벨리적 관점에서 이는 통치자가 불필요한 비난을 자초하여 대중의 반감을 산 실책이라 평가될 수 있다. 군주는 가급적 민심의 분노를 사지 않아야 하건만, 홍준표는 개인적 취향과 거침없는 성격을 앞세우다가 오히려 정치적 입지를 스스로 좁힌 셈이다.

또한 홍준표는 자신의 저서 및 SNS에서 도덕성과 원칙을 중시하는 언설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는 마키아벨리가 말한 냉혹한 현실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는 *『정치가 왜 이래?』*에서 “선출직 지도자는 국민에게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윤석열 대통령의 이른바 ‘비속어 논란’ 당시에도 **“곤란한 순간을 모면하려 거짓말을 하면 거짓이 거짓을 낳고 일이 점점 커진다”**며 정직한 대응을 촉구한 바 있다. 이러한 도덕성 강조는 겉보기에는 마키아벨리가 경계한 이상주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에서 도덕적 이상을 실현하려 하기보다 필요하면 거짓말도 활용하라고 조언했지만, 홍준표는 오히려 정직과 투명성을 정치인의 미덕으로 내세운다. 이 점에서 홍준표는 ‘말’의 차원에서는 마키아벨리와 상반되게 도덕적 언어를 활용하는 셈이다. 다만 이를 두고 단순히 홍준표가 이상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마키아벨리식으로 해석하면, 홍준표의 도덕성 담론 또한 하나의 정치적 무기일 수 있다. 즉, 자신은 깨끗하고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 대변자로서 **“부패한 기성 정치인”**들과 대비되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전략적 포석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홍준표는 책에서 **“나라와 국민을 팔아 시정잡배 노릇이나 하는 정치인들”**을 통렬히 꾸짖고, 부정적 이미지를 타 정치권에 투사함으로써 자신만이 정의로운 지도자인 듯한 인상을 주려 한다. 이러한 도덕 담론의 정치화는 마키아벨리가 권모술수의 하나로 간주한 **“미덕의 가장(mask of virtue)”**을 떠올리게 한다. 군주는 필요하면 선한 척 연기하라는 마키아벨리의 조언처럼, 홍준표도 대중 앞에서 정의로운 개혁가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권력 기반을 넓히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그의 언행에는 마키아벨리적 양면성 – 명분상 도덕을 말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권력투쟁의 계산이 깔린 – 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슘페터적 관점: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경쟁 논리

홍준표의 정치 행보를 바라보는 또 다른 이론적 틀은 요제프 슘페터의 엘리트 민주주의 이론이다. 슘페터는 고전적 민주주의 관념을 비판하며, 민주주의를 “지도자들이 국민의 표를 얻기 위해 경쟁적 투쟁을 벌이고 그 결과로 통치권을 획득하는 제도”로 정의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민주정치는 일반 시민의 이성적 토론이나 공동선의 실현보다는, 선출직 정치 엘리트 간의 경쟁과 대중선동에 의해 돌아가는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 정치 과정에서 유권자들은 깊이 숙고하기보다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호소나 선전물에 영향을 받아 투표하며, 선거는 정치 지도자들을 선발하는 일종의 시장 경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슘페터의 현실주의 관점에서 보면, 홍준표의 정치적 언행과 전략은 현대 민주정치의 포퓰리즘적 경쟁 논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첫째, 홍준표는 대중의 정서와 욕구를 읽어 선전 전략을 구사하는 정치 기업가의 면모를 보인다. 그는 선거 국면마다 화제가 될만한 이슈와 공약을 내걸어 주목을 끌었다. 2017년 대선에서는 강경한 대북 안보노선과 함께 성범죄자 화학적 거세, 돼지흥분제 논란 해명 등 자극적 이슈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2021년 대선 경선 시기에는 사형 집행 의무화, 무상복지 포퓰리즘 반대, 주52시간제 폐지 등 보수층의 정서를 겨냥한 공약들을 쏟아냈다. 이러한 행보는 유권자들의 관심과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자보다 더욱 선명하고 극적인 메시지를 투척하는 행위로서, 슘페터가 묘사한 민주주의의 경쟁적 본질과 부합한다. 실제로 슘페터는 “정치인의 본질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유권자를 매수(bribery)하는 존재”라고까지 냉소적으로 평했는데, 홍준표가 각종 선거에서 보여준 공약들도 상당 부분 이러한 대중迎合적 성격을 띠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 2021년 그가 제시한 흉악범 6개월내 사형 집행 법안은 범죄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배경으로 한 극단적 공약이었고, 진중권 등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극우 포퓰리즘”이라며 비판했다. 이는 홍준표가 유권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인기를 얻고자 한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되며, 선거 승리를 위해 **“과장되고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포퓰리즘적 경향을 보여준다. 슘페터적 시각에서 이는 특별히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 정치인은 표를 얻기 위해 때로는 선동가(demagogue)의 모습을 띠게 마련이고, 홍준표 역시 자신의 직설화법과 강경공약으로 유권자의 원초적 정서를 자극하는 전략을 택해왔다.

둘째, 홍준표의 정치에 대한 냉소적 태도 역시 슘페터의 민주주의관을 연상시킨다. 슘페터는 일반 국민이 정치 문제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나 일관된 판단을 갖기 어렵다고 보았다. 따라서 실제 정치에서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대중의 막연한 불만과 욕구를 포착해 권력을 쥐고, 국민은 선거를 통해 마음에 들지 않는 지도자를 갈아치우는 소극적 역할을 할 뿐이라고 보았다. 홍준표는 잦은 SNS 발언을 통해 기존 정치권 전체를 “한심한 정치인들”로 싸잡아 비난하면서 자신만이 국민의 속을 뚫어보는 솔직한 대변자인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이는 정치 불신이 큰 유권자층의 심리를 파고들어, 기존 엘리트에 대한 냉소와 불만을 자신에 대한 지지로 전환하려는 계산으로 읽힌다. 슘페터의 이론에 따르면 이런 대중의 반정치적 정서 역시 정치 지도자가 활용하는 자원이다. 홍준표의 발언에는 “정치권은 다 썩었다”는 식의 환멸과 냉소가 깔려 있는데, 정작 본인 역시 수십 년 경력의 정치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아웃사이더’적 수사를 구사함으로써, 기성 엘리트 대 반(反)엘리트 구도를 만들고 자신을 후자의 위치에 세우려 한다. 이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의 수사학으로, **“순수한 국민 대 부패한 기득권”**이라는 도식을 통해 인민의 편에 선 지도자를 자처하는 것이다. 캐스 머드(Cas Mudde) 같은 학자는 이러한 포퓰리즘을 **“얇은 이념”**이라 부르며, 사회를 오직 도덕적 대결 구도로 파악한다고 지적했는데, 홍준표의 정치 담론이 정확히 그런 도덕 이분법을 활용하고 있다. 그가 책에서 언급한 “국민을 팔아먹는 정치인”과 “거짓말 하지 않는 지도자”라는 대비는 **‘선한 국민’ 대 ‘부도덕한 엘리트’**라는 구도를 부각시키며, 자신을 정의로운 편에 위치시키는 메시지다. 이러한 담론 전략은 현실 정책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도덕적 분노를 동력으로 삼는 것으로, 정치의 본질을 정책 경쟁이 아닌 이미지 경쟁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슘페터는 이미 20세기 중반에 민주주의가 이런 식의 지도자 경쟁 시장으로 작동함을 간파했으며, 홍준표의 사례는 이를 한국 정치에서 재확인시켜준다.

다만 슘페터라면 홍준표 현상의 다른 측면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슘페터는 민주 엘리트들이 너무 무책임하게 대중의 정서만 쫓을 경우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음을 경고하였고, 궁극적으로 시민들은 그런 정치인을 선거에서 심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홍준표는 대선에 두 차례 도전했으나 본선 승리에는 실패했고(2017년 대선 패배, 2022년 경선 탈락), 지나친 직설과 논쟁적 태도로 보수 유권자의 일부만 열광시키는 분극적 인물로 인식되어 확장성에 한계를 보였다. 이는 선거과정에서 **“유권자가 최종 심판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슘페터적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은 깊이 숙고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눈에 보이는 실패나 문제에 대해서는 지도자를 교체하는 역할을 맡는데, 홍준표의 경우 여러 차례 논란과 실책으로 인해 대중적 지지기반이 넓지 못했고 결국 최고 권좌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가 다시 지방권력(대구시장)을 잡는 등 정치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은, 민주 정치에서 대중선동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슘페터가 말한 민주주의의 역설적인 모습 – 열광적인 지지와 거부가 반복되는 지도자 경쟁 – 을 방증하며, 홍준표 개인의 부침은 한국 민주주의 내 포퓰리스트 리더십의 부상과 한계를 동시에 시사한다고 하겠다.

 

한나 아렌트의 관점: 진실, 권위,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홍준표의 정치적 행태를 평가하기 위해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참조하면, 정치에서의 진실과 거짓, 권위와 자유라는 주제가 두드러진다. 아렌트는 현대 정치에서 **사실의 진실(factual truth)**이 거짓선동에 의해 침식되는 위험을 경고하고, 권위(authority)의 기반은 강제가 아니라 시민들의 신뢰임을 강조한 바 있다. 그녀의 통찰을 빌리면, 홍준표의 언행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진실성을 중시하는 모습과,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의 위험을 함께 드러내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우선, 홍준표가 거듭해서 주장하는 **‘정치인의 정직’**은 아렌트가 역설한 진실과 정치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아렌트는 “진실 말하기(truth-telling)는 전통적으로 정치적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오히려 거짓은 흔히 용인되어 왔다”고 지적하면서도, 현대 대중사회에서 지속적인 거짓말은 시민의 현실 인식 자체를 붕괴시켜 전체주의의 토양을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홍준표는 적어도 담론의 수준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거짓말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윤석열 정부의 해명 거짓말을 비판하며 “거짓말이 거짓을 낳고 일이 커진다”는 원칙론을 제시했고, 자신의 책에서도 “국민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정치인들에게 보내고 있다. 이는 정치권 전반의 거짓과 위선에 대한 홍준표의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자, 본인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임을 내세우는 전략이다. 이런 행보는 아렌트적 시각에서 보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홍준표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정치의 진실성 회복을 주장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위한 담론을 펼친다는 긍정적 해석이다. 실제로 아렌트는 공적 진실이 무너질 때 시민들이 아무 것도 믿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어떠한 주장에도 냉소적으로 되어 정치적 판단력과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고 보았다. 홍준표가 반복해서 정치인의 거짓말을 질타하는 것은 이러한 위험을 막기 위한 외침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의 주장대로 지도자의 정직함과 책임 인정은 민주 지도자의 기본 요건이며, 이것이 결여될 때 민주정은 국민 신뢰를 잃고 위기에 빠진다. 실제 윤석열 정부의 비속어 논란 대응에서 보듯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얼버무릴 때 사태는 악화되었고, 홍준표는 이를 정확히 짚어내었다. 이런 면에서 홍준표의 목소리는 아렌트가 말한 **“진실 말하기”**의 정치적 중요성을 환기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홍준표 자신이 정치적 진실성의 체현자인가에 대해서는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아렌트는 말과 행동의 일치를 중시하며, 정치인의 진정한 권위는 시민과의 신뢰 계약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홍준표는 도덕성과 정직을 부르짖지만 정작 자신의 행동에서는 이에 부합하지 않는 모순적 면모를 보여왔다. 예를 들어 그는 과거 불투명한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바 있으나(성완종 리스트 사건) 다행히 무죄를 받았다. 법적 책임은 면했다지만, 정치적으로는 금권선거의 구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그림자를 남겼다. 또한 그는 “정치에도 금도가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는 종종 막말과 공격적 언사로 논란을 일으켰다. 2016년 총선 당시 경쟁자를 향해 “XXX”와 같은 비속어를 섞은 공격을 하거나, 과거 토론회에서 지역 비하로 해석될 발언을 한 일 등은 홍준표가 말하는 정치의 품격과 모순된다. 이런 언행 불일치는 아렌트적 기준에서 볼 때 정치적 신뢰를 훼손하는 요소다. 아렌트는 **권위(authority)**란 강제가 아니라 신뢰와 존중에 기반한다고 보았는데, 홍준표처럼 말은 정의를 내세우면서 행동은 선택적으로 윤리를 무시하는 경우, 오히려 그의 도덕 담론의 신뢰도는 떨어지고 시민의 냉소만 키울 위험이 있다. 실제로 홍준표가 거친 말로 정치 공격을 일삼을 때, 대중은 그의 메시지에 담긴 진정성보다는 정략적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면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다”**는 아렌트의 경고처럼, 정치 전체에 대한 환멸을 증폭시킬 수 있다. 홍준표가 의도했든 아니든, 정치 혐오의 불길 속에서 자신이 반사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렌트가 걱정한 전체주의적 움직임의 전조—진실에 대한 전면적 냉소—를 부추기는 행위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진실 담론의 실천적 일관성은 의문시되며,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홍준표도 결국 **“진실과 거짓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정치적 이익을 계산하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홍준표의 행태를 아렌트 관점에서 더 깊이 들여다볼 부분은 권위주의적 경향시민 자유에 대한 태도이다. 아렌트는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과 『인간의 조건』 등에서 공론장의 중요성, 다양성의 존중, 시민의 자발적 결사 등을 민주 정치의 핵심 요소로 보았다. 이러한 가치에 비추어볼 때, 홍준표의 일부 행동은 자유 민주주의의 공적 가치에 도전하는 권위주의적 요소를 띤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3년 그가 대구 퀴어문화축제를 행정력을 동원해 강제로 저지하려 한 일이다. 홍준표 시장은 성소수자 축제가 시내에서 열리는 것을 반대하여, 시 공무원 500여 명을 동원해 행사 장소를 막았고 결국 축제가 큰 혼란을 겪었다. 법원은 이에 대해 “대구시의 행정대집행은 위법”이라며 시 당국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었고, 시민단체는 “이런 위법한 공권력 행사는 법치주의의 부정이자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참극”이라고 규탄했다. 이 사건은 홍준표가 자신의 보수적 가치관을 앞세워 시민의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다원성을 억압한 것으로서, 권위주의적 통치행태의 단면을 보여준다. 다수 보수 시민의 정서에 영합하여 소수자의 권리를 무시한 이러한 조치는, 자유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소수권리의 보장과 관용을 훼손한 것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체제가 등장할 때 먼저 공론장의 파괴와 소수자 탄압이 이뤄짐을 역사적으로 분석했는데, 홍준표의 행태에서도 작은 규모지만 그와 유사한 권위주의적 발상이 엿보인다. 즉, 자신이 싫어하는 목소리나 집단은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침묵시키려는 태도다. 이러한 태도는 민주적 정치문화의 미성숙을 나타내는데, 홍준표는 비슷한 맥락에서 과거 진보 진영 집회나 노조 파업 등에 대해서도 강경 진압을 주장해온 바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그의 정치철학 밑바탕에는 질서와 권력을 위한 강압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신념이 깔려 있는 듯하다. 아렌트는 폭력이 최후의 수단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권위의 기반을 대체하면 안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홍준표는 대중의 인기 또는 본인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법적 절차와 권리마저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는 **권위(authority)를 웃도는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적 행태로 비판받는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한국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토대가 아직도 도전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아렌트적 관점에서는 공동체의 다원성과 자유를 훼손하는 위험 요소로 지적될 수 있다.

요약하면, 한나 아렌트의 관점을 통해 본 홍준표는 진실성과 권위 측면에서 양가적이다. 한쪽 얼굴은 기만적인 정치행태를 비판하며 정치의 도덕적 회복을 주장하지만, 다른 얼굴은 본인 스스로 민주주의 규범을 위반하고 전체주의적 요소를 용인하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 이는 그의 정치적 메시지와 행태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며, 결국 그의 말에 담긴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아렌트는 정치에서 말과 행동의 신뢰 회복이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홍준표의 경우 말의 급진성행동의 자의성이 함께 나타나 신뢰보다는 분열과 논쟁을 야기하는 경향이 크다. 이는 민주사회에 필요한 **공통 현실(common reality)**을 형성하기보다, 진영 간의 불신과 조각난 사실 인식을 심화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아렌트의 눈으로 볼 때 홍준표의 정치적 태도는, 표면적으로는 반(反)거짓의 기치를 들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치 공동체의 신뢰를 훼손하고 권위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자기모순적 행보라 평가될 수 있다.

 

포퓰리즘과 권위주의: 홍준표 정치의 특성과 민주주의에의 함의

앞서 이론적 논의를 통해 드러난 홍준표 정치행태의 특질을 한마디로 묘사하면 **“우파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전형을 보여주면서도, 권위주의적 통치관을 내비쳐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도전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성격 규정은 실제 정치평론가들과 학자들의 평가와도 상당 부분 부합한다. 예컨대 진중권은 홍준표를 두고 “극우 포퓰리즘”이라 비판하며, 대중영합적 선동으로 보수정치를 후퇴시키는 인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홍준표가 보여주는 강한 리더십과 질서 강조를 두고 전통적인 권위주의 정치의 망령이 부활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홍준표의 언동에는 포퓰리즘적 요소권위주의적 요소가 혼재한다.

포퓰리즘적 요소부터 짚자면, 홍준표의 정치 담론은 거의 교과서적으로 “순수한 국민 대 부패한 엘리트” 구도를 그린다. 그는 집권 세력뿐 아니라 야당, 관료집단 할 것 없이 기득권을 싸잡아 비난하며 자신을 민심의 대변자로 내세운다. 이러한 반엘리트주의는 포퓰리즘의 핵심 특성으로, 정치적 복잡성을 단순한 도덕 구도로 치환함으로써 대중의 공감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얇은 이념이기에 실제 정책 비전이나 이념적 일관성은 부족하고, 때로는 모순적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홍준표 역시 그렇다. 그는 진보 진영의 복지 정책을 “포퓰리즘 퍼주기”라고 공격하면서도, 본인도 선거 때는 선심성 공약을 내놓거나 지역 민원을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으로 표를 구했다. 이는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의 대칭적 모습일 뿐, 근본적으로 대중인기 영합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또한 포퓰리즘 지도자들은 흔히 자신만이 국민의 참된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독점적 주장을 한다. 홍준표도 여러 차례 자신이 아니면 보수가 승리하기 어렵다거나, 본인이 준비된 대선후보라고 자처하며 본인에 대한 지지를 국민의 뜻과 동일시하려는 언급을 했다. 이러한 유일한 대표자 인식은 포퓰리즘의 또다른 특징으로, 민주주의의 다원성과 충돌한다. 결국 홍준표의 포퓰리즘은 우파적 색채(강한 국가, 응징적 정의 강조)를 띠고는 있지만, 정치제도를 우회하여 직접 “국민의 뜻”을 실현하겠다는 반제도적 충동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잠재적 위협이 된다. 포퓰리즘이 강화되면 **다수파의 전제(專制)**가 출현하여 소수 의견이나 법치주의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 홍준표의 권위주의적 면모가 그런 방향으로 나타난다.

권위주의적 요소로서, 홍준표는 법치와 절차보다는 결과와 질서를 우선시하는 발언과 행동을 보여 왔다. 이는 과거 한국 정치의 권위주의 시절을 방불케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앞서 언급한 퀴어축제 탄압 사례는 민주사회의 기본권보다 본인의 보수적 도덕관을 강제로 밀어붙인 것이고, 그의 발언 중에는 “범죄와의 전쟁”식의 가혹한 법집행이나,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내용을 암시한 것들이 많다. 예컨대 그는 집권 진보정권 시절 대규모 촛불집회를 두고 “종북 좌파들이 선동한다”는 취지로 매도하며 국가의 강력 대응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다원적 시민사회에 대한 적대감으로, 민주주의보다는 질서와 통제를 중시했던 권위주의 정부의 논리를 닮았다. 홍준표 자신이 검사 출신으로서 법과 질서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진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는 책에서 “검사는 정의를 향한 열정으로 살 때 빛난다”고 적었는데, 이는 그가 사정(司正)정치, 즉 검찰권력을 통한 정의 구현을 정치의 이상으로 여기는 측면이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홍준표는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을 반대하고, 윤석열 정부의 검찰 수사에 힘을 실어주는 입장을 취해 왔다. 이는 법률가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긍정하는 경향으로, 대의민주주의보다는 법 기술관료적 지배를 선호하는 권위주의적 성향일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당내 인사나 언론, 시민단체에 대해서는 “잡범” “XXX” 등의 거친 용어를 동원하여 모욕을 주곤 했는데, 이런 반민주적 언행은 권위주의 지도자들이 보이는 관용의 부재와 상통한다. 민주 지도자는 비판자를 경쟁자로 존중해야 하지만, 홍준표는 종종 비판자들을 국민의 적 취급하거나 조롱함으로써, 정치적 적대관계를 절대화한다. 이는 정치적 반대자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태도로서, 민주주의의 경쟁 질서를 훼손한다.

이러한 홍준표의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결합은 한국 **민주주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의 측면에서 볼 때 중요한 도전 과제를 제기한다. 민주주의 공고화란 민주적 규범과 절차가 모든 정치 행위자의 ‘유일한 게임의 규칙’으로 자리잡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홍준표 같은 정치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은, 제도적 규칙과 비제도적 선동이 경합하고 민주적 관용과 권위주의적 충동이 충돌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드러낸다. 한국 민주주의는 1987년 이후 형식적 절차는 확립되었으나, 정치문화와 행태의 측면에서 완전한 공고화에 이르렀는지는 논쟁적이다. 홍준표 현상은 바로 그 논쟁의 한복판에 있다.

한편으로, 그의 등장은 기성 정당정치가 국민의 다양한 욕구를 담아내지 못한 데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즉, 민주주의 내 포퓰리즘의 부상은 어떤 면에서 대표단위의 실패 –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된 기존 정치권 – 에 대한 대중의 응답이다. 홍준표의 인기가 일정층에서 유지되는 것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는 정치인이라는 인식 덕분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한국 정당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반영한다. 당내 민주주의가 부족하고 국민의 의사가 왜곡된 방식으로 반영될 때, 사람들은 체제 바깥에서 기존 규범을 깨려는 정치인에게 열광하기 쉽다. 홍준표는 바로 그러한 불신과 욕구를 공략하여 자신을 부각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민주주의 공고화의 미완성으로부터 생겨난 틈새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홍준표의 지속적 영향력은 민주주의 공고화에 부정적 영향을 줄 위험성이 있다. 포퓰리스트 지도자가 득세하면, 단기적으로는 정치권에 활력을 불어넣고 기존 질서를 뒤흔들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치 불신과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연구가 많다. 특히 홍준표처럼 거친 언행으로 정치 담론을 격화시키는 인물이 전면에 나설 경우, 정당 간 협치나 사회적 대화는 어려워지고 정치가 끝없는 대결로 점철될 수 있다. 실제로 홍준표는 당내에서도 계파 갈등을 부추기고 지도부와 충돌을 일삼아 당의 단합을 해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민주주의 공고화에는 정치적 안정성과 협력의 문화가 요구되는데, 홍준표 스타일은 안정보다는 충격을, 협력보다는 투쟁을 강조한다. 또한 그의 권위주의적 행태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권위를 약화시킨다. 법원이 제동을 건 퀴어축제 탄압 같은 경우, 법적 판결에도 불구하고 홍준표는 “항소하여 다시 판단받겠다”며 자신의 정당성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법원의 결정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으로, 민주주의의 권력분립과 사법권 존중 원칙을 흔드는 태도다. 이런 행동을 지역 수장이 보임으로써, 주민들에게도 법보다 힘이 우선이라는 그릇된 신호를 줄 수 있다.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사회에서는 선출직 지도자라도 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스스로를 제약하지만, 홍준표는 법보다 본인의 정치적 신념이 우위에 있다는 식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민주주의의 내재화(internalization)가 아직 부족함을 시사하며, 한국 정치 발전에 있어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정치가 왜 이래?』의 논지 검토: 이상과 현실 사이

홍준표의 저서 *『정치가 왜 이래?』*는 그의 이러한 정치철학과 태도가 응축된 산물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2020년 11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홍준표가 페이스북에 쓴 글들을 주제별로 모은 것으로서, 현실 정치에 대한 홍준표의 진단과 대안이 담겨 있다. 책의 주요 논지는 앞서 부분적으로 언급되었지만,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공직자의 투명성과 도덕성 –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살아야” 한다, (2) 정치인의 품격과 금도 – 막말과 배신이 난무하는 정치풍토 비판, (3) 지도자의 책임 – “국민에게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4) 민의 존중 – “민심을 거역하는 당심은 없다”며 국민 여론에 따른 정치를 촉구, (5) 윈윈 정치 – “모두가 승자가 되는 좋은 정캇에 대한 이상, (6) 정의 구현 – 검찰 등 사정기관을 통한 사회정의 실현 강조. 요컨대 홍준표는 책에서 정치권 전반의 부패와 무책임을 성토하고, 깨끗하고 책임있는 정치, 국민 뜻에 충실한 정치를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표면적으로 볼 때 매우 타당해 보인다. 대부분의 시민들도 동의할만한 정치 개혁의 이상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논지를 현실 정치의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해보면 몇 가지 문제가 도출된다.

첫째,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이다. 홍준표는 책에서 정치인의 덕목을 열거하지만, 정작 그 스스로 그 덕목을 일관되게 실천해왔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이를테면 그는 투명성과 정직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의 재임 시절 여러 의혹에 대해 충분히 투명한 태도를 보였는지 의심스럽다. 경남지사 시절 불거진 토목사업 특혜 논란이나, 당대표 시절 공천 과정의 밀실성 등에 대해 그는 강하게 부인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그의 구호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본인이 과거에 했던 실언이나 번복에 대한 성찰이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책 어디에도 자신의 실책에 대한 반성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모두 남의 잘못만 지적할 뿐이다. 예컨대 *『정치가 왜 이래?』*에서 홍준표는 과거 보수정권의 실정이나 자신이 속했던 정당의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다루지 않고 있다. 이는 그의 비판이 선택적임을 보여준다. 진정한 자기반성이 결여된 채 남 탓으로 일관한다면, 그가 내세우는 정치 윤리 담론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결국 독자는 책을 읽으며 “정치인이 거짓말하면 안 된다면서, 과연 홍준표 당신은 항상 그랬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러한 메시지와 현실 간의 불일치는 책의 논증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둘째, 현실성과 실현 가능성의 문제이다. 홍준표는 모두가 승자가 되는 좋은 정치를 이상으로 제시하지만, 현실 정치의 본질은 이해관계의 조정과 갈등이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경쟁을 통해 정책이 결정되는 구조적 현실을 무시한 채 “모두가 승자”라는 슬로건을 내거는 것은 정치의 숙명을 간과한 공허한 이상론일 수 있다. 정치에서는 합의에 의한 윈윈(win-win)이 바람직하지만 항상 가능하지 않다. 특히 홍준표처럼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정치인이 주장하는 윈윈 정치는 모순적으로 들린다. 그는 책에서 여야 협치를 통한 상생보다는, 잘못한 세력은 심판받아야 하고 정의가 승리해야 한다는 식의 선악 이분법적 서사를 더 많이 펼친다. 그러면서도 막연히 모두가 이기는 정치를 언급한 것은, 듣기 좋은 추상적 포부일 뿐 구체적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다. 이는 일종의 포퓰리즘적 수사로 비칠 위험이 있다. 누구나 좋다는 얘기(“다 잘 살게 하겠다”)를 제시하지만, 어떻게 그 이상을 현실화할지는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홍준표는 정치권의 적대적 대립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민주당 등 반대 진영과 타협이나 협력의 경험이 거의 없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언사를 일삼았다. 그런 그가 모두가 승자가 되는 정치를 말해봐야, 현실성이 결여된 구두선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셋째, 정책 대안의 부재이다. *『정치가 왜 이래?』*는 에세이 모음집 성격상 구체적인 정책 프로그램보다는 그때그때 시사 사건에 대한 논평이 주를 이룬다. 홍준표는 현안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면서도, 대안을 심층적으로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예컨대 그는 책에서 조국 사태, 부동산 폭등, 탈원전 정책, 코로나 방역 등 문재인 정부 시기의 여러 문제를 비판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 정책 방향이나 대안 입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시피 한다. 이는 그가 근본적으로 비판자/관찰자의 입장에서 말을 하고 있지, 집권을 목표로 정책을 설계하는 책임자의 자세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홍준표 정치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는 늘 공격수로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자신이 집권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했다. 실제로 2017년 대선 때나 2021년 경선 때 그의 공약들은 몇 가지 상징적 이슈를 제외하면 두루뭉술했고, 집권 청사진이 뚜렷하지 않았다. *『정치가 왜 이래?』*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이어지며, 결과적으로 읽고 나면 속 시원한 욕은 있었지만 남는 대안 지식은 부족한 책이 되고 말았다. 학술적으로 보자면, 문제 제기에 치중하고 해결 방안은 결여된 일종의 수필집인 셈이다. 물론 정치인의 에세이가 정책 입법론일 필요는 없으나, 책 전반에서 홍준표가 내세우는 정치개혁론이 구체성을 띠지 못함으로써, 독자는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갚 하는 물음을 갖게 된다. 이는 그의 논지가 현실 정치를 바꾸는 힘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공허한 울림에 그칠 위험을 내포한다.

넷째, 자신을 둘러싼 현실정치와의 관련성 측면에서, *『정치가 왜 이래?』*는 홍준표 자신의 정치 행보를 합리화하거나 선전하는 도구로 읽힐 소지가 있다. 책에 담긴 기간(2020.11~2022.12)은 홍준표에게 중요한 정치적 전환기였다. 그는 무소속 신분으로 대구시장에 출마하여 당선(2022.6)되고 곧 국민의힘에 복당했으며, 2022년 대선 국면에서 자신이 경선 패배 후 윤석열 후보를 애매하게 지원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기간 그의 페이스북 글들은 때로는 야당(민주당) 공격, 때로는 여당(국민의힘) 내부 비판으로 갈리는데, 결국 그 모든 흐름이 홍준표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라는 일관된 목표로 귀결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실제로 책 내용 중 **“민심 대 당심”**을 강조한 부분이나 “검찰의 정의”를 역설한 부분 등은, 당시 상황에서 각각 2022년 국민의힘 경선 결과에 대한 불복 섭섭함,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검찰 출신 대통령에 대한 옹호라는 현실 정치 맥락을 배경으로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겉보기에는 원칙론을 설파하지만, 속내로는 자신의 정치적 계산에 부합하는 주장을 편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정치가 왜 이래?』*는 홍준표 자신의 정치 행보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성격을 일부 가진다. 책에서 그는 본인을 직접 드러내 자화자찬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타자의 잘못을 공격함으로써 대조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노린다. 이런 서술 전략은 독자에 따라 반감을 살 수 있다. 책을 통틀어 홍준표는 “정치가 이 모양인 것은 저들 탓”이라는 논리를 구사하는데, 독자는 거꾸로 묻고 싶을 것이다: “정치가 왜 이래?”라는 질문에 홍준표 당신은 기여한 바가 없는가? 정치 불신 풍조나 대립을 과연 남 탓만 할 수 있는가? 이렇듯 책 제목과 내용 자체가 홍준표를 향한 부메랑 질문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가 의도한 메시지와 독자가 받아들이는 현실 인식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 있다.

요컨대, *『정치가 왜 이래?』*는 홍준표 특유의 현실진단과 독설이 담겨 있어 읽는 재미와 통쾌함을 줄 수는 있으나, 학술적·정책적 내실 면에서는 부족하며, 저자 자신의 행적과 주장 간의 모순이 해소되지 않은 한계를 보인다. 정치학적 분석 관점에서 이 책은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자기 서사로 볼 수 있다. 포퓰리즘 연구자들의 지적대로, 포퓰리스트는 문제를 통렬히 비판하지만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고, 결국 자신을 구원자적 인물로 부각시키는 담론을 편다. 『정치가 왜 이래?』 역시 이러한 틀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 홍준표는 정치의 온갖 병폐를 나열하지만, 그 처방은 결국 **“홍준표 같은 사람으로 교체하라”**는 암시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정치 혁신의 이정표라기보다, 홍준표 개인의 정치 브랜드 홍보물에 가깝다는 냉소적 평가도 가능하다. 이는 책의 공헌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의 성격을 정확히 규정하는 일일 것이다.

 

결론

홍준표의 최근 정치적 행보와 그의 저서 *『정치가 왜 이래?』*를 통해 드러난 그의 정치관은 대중영합적 보수주의와 개인주의적 권위 리더십으로 요약된다. 마키아벨리의 현실 정치론에 비추어 볼 때 그는 권력을 다루는 감각과 대중 장악 기술을 보유한 정치인이나, 동시에 정치적 언행 관리의 미숙함과 자기모순으로 인해 군주론적 이상형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슘페터의 민주주의 이론 관점에서는, 홍준표는 민주주의가 본래 지니고 있는 엘리트 경쟁과 포퓰리즘적 선동의 논리를 체현한 사례로서, 민주 정치의 민낯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그 한계를 보여주는 존재다. 한나 아렌트의 철학으로 보면, 홍준표는 진실성을 내세우나 사실은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줄타기하고 있으며, 권위주의적 충동을 드러내면서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에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결국 홍준표 현상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중적 함의를 가진다. 한편으로 그는 기성 정치의 타성에 일침을 가하고 국민의 울분을 대변함으로써 정치 변화의 필요성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자신이 보여주는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행태는 민주주의의 내부적인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의 정치적 성공과 한계는 곧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도와 직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가 왜 이래?』*라는 책 제목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홍준표라는 정치인의 왜 이런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그의 비판대로 한국 정치가 문제투성이인 것은 맞지만, 그 해결의 방향이 홍준표식 정치로 나아가는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정치학적 비판의 시선에서, 홍준표에게는 분명히 민주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의 결핍이 보인다. 특히 타협과 관용, 제도 존중과 같은 민주주의 공고화에 필수적인 태도가 약하다는 점은, 향후 그가 국가 지도자가 될 경우의 위험성을 시사한다. 동시에 그의 인기와 영향력은 한국 정치사회가 안고 있는 불신, 양극화, 엘리트 불만의 반영이므로, 이를 마냥 배척하기보다 건설적으로 승화시키는 과제가 민주진영 전체에 놓여 있다. 홍준표 현상에 담긴 대중의 요구 – 정직한 정치, 유능한 보수, 시원한 소통 – 를 건강한 민주주의 발전 경로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기존 정치권이 자기혁신을 통해 포퓰리즘의 토양을 줄이고 유권자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했고, 아렌트는 “거짓이 난무하면 결국 누구도 아무 것도 믿지 못하게 된다”고 경고했으며, 슘페터는 “민주정은 인민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 승인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통치자를 두는 제도”라고 갈파했다. 이 통찰들을 빌리자면, 홍준표의 정치 실험은 예언자의 탈을 쓴 권력 추구자의 모습과, 불신사회에서 군림하려는 거짓 없는 척하는 거짓의 모습, 그리고 인민의 환호 속에 등장했다 인민에 의해 퇴장당할지도 모르는 지도자의 모습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그의 정치가 궁극적으로 성공할지, 또 그것이 한국 민주주의에 이로울지 해로울지는 향후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분명한 한 가지: 홍준표의 등장은 **정치가 왜 이래?**라고 묻는 국민의 불만에 대한 한 응답이지만, 그 응답이 또 다른 **“정치가 왜 이래!”**를 불러오지 않도록, 우리는 그의 정치에 담긴 함의를 면밀히 따지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정치학적 비판은 그런 점에서 홍준표라는 정치 현상에 민주사회의 면역체계를 작동시키는 일종의 백신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 민주주의가 이 백신을 통해 더욱 면역력을 키워,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주】

 

  • 홍준표 『정치가 왜 이래?』 (2025) – 2020년 11월~2022년 12월 사이 페이스북에 올린 정치 시평 모음집. 주요 챕터로 “공직자 투명성”, “정치의 금도”, “지도자의 정직성”, “민심과 당심”, “승자없는 정캇, “검찰의 정의” 등이 설정되어 있다. 책 표지에 “시정잡배 노릇이나 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 문구를 넣는 등 현 정치권에 대한 작심 비판을 담았다. 그러나 책의 논조는 대체로 남에 대한 질타 일색이고, 자신이 몸담은 정치세력에 대한 책임 언급은 적다는 평가가 있다.

  • 2023년 “폭우 골프” 논란 – 2023년 7월 기록적 폭우로 전국에 피해가 발생한 와중에, 홍준표 대구시장이 사적 모임에서 골프를 쳤다가 언론 보도로 논란이 되었다. 홍준표는 initial 해명으로 “주말에 골프 금지한 법 있나”라고 응수해 비판을 키웠다. 국민의힘 중앙윤리위원회는 “자연재해 시 골프자제” 당 규정을 들어 그를 징계했고, 홍준표는 SNS에 한때 “과하지욕”이라는 고사성어를 올려 징계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다. 윤리위는 7월 26일 홍준표에 당원권 정지 10개월 처분을 내렸고, 홍준표는 “3년의 시간(대구시장 임기)이 아직 있다”며 받아들였다. 이 사태는 홍준표의 정치적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고, 당내 입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홍준표는 이후 2024년 총선을 앞두고 당 활동을 하지 못해 사실상 당내 주변인물이 되었다.

  • 홍준표와 포퓰리즘 – 홍준표의 정치 스타일은 우파 포퓰리즘으로 종종 분류된다. 그는 문재인 정부 시절 각종 무상복지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비판했으나, 정작 본인도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발언을 많이 해 내로남불 지적을 받았다. 2021년 대선 경선 때 경쟁후보 캠프는 홍준표를 두고 “좌파 이재명과 별다를 바 없는 이란성 쌍둥이 포퓰리스트”라 공격하기도 했다. 학술적으로 Cas Mudde 등의 정의에 따르면 홍준표는 포퓰리즘의 주요 특징(반엘리트주의, 도덕적 대중담론, 카리스마 지도자론)을 갖추고 있다. 다만 그는 경제정책 면에서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여 좌파 포퓰리즘과 구별된다.

  • 홍준표와 권위주의 – 홍준표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보수정당 내에서 강경한 국가주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공과가 있다”는 입장을 취하며 경제성장은 높게 평가하고 민주화운동은 때로 폄훼하는 시각을 보였다. 2019년 황교안 대표 시절 보수통합 모임에서 “박정희 정신 계승”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인식과 더불어 홍준표의 정치행태(일방적 지시 선호, 토론보다는 결정 중시 등)는 탈권위화된 정당문화와는 거리가 있다. 2022년 대구시장 당선 이후 시정 운영에서도, SNS를 통한 일방적 지시나 공무원 인사 논란이 있어 “홍준표식 옛날 정캇라는 비판을 들었다. 이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관행보다는 개인 지도자의 의중이 앞서는,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잔재로 볼 수 있다.

  • 민주주의 공고화에 대한 평가 – 홍준표 사례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척도로 자주 인용된다. 정치학자들은 한국이 형식 민주주의는 정착했으나 정치문화적 공고화는 더딘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며, 그 예로 지도자 중심 정치, 지역주의, 포퓰리즘 등을 꼽는다. 홍준표는 영남 지역주의 기반, 개인기반 정치, 대중선동을 모두 활용해온 인물이라, 그의 영향력은 곧 이러한 미성숙 요소의 지속을 의미한다. 반면 일각에서는 홍준표 같은 인물이 존재하고 경쟁하는 자체가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보여준다는 옹호도 있다. 이는 민주주의 내 반체제 인사의 허용이라는 측면이다. 어쨌든 그의 부상과 한계는 한국 민주주의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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