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홍준표와 당랑의 꿈의 문제의식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현 국민의힘 의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 진영의 몰락이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2019년 자전적 정치 에세이 당랑의 꿈을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안보가 무너지고, 경제가 무너져 내리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진단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색한다. 책 제목 당랑의 꿈은 중국 고사성어 ‘당랑거철(螳螂拒轍)’에 빗댄 것으로, 거대한 수레바퀴를 향해 사마귀가 맞서는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여 “역사의 잘못된 흐름을 온몸으로 막겠다”는 그의 투지를 상징한다. 실제로 홍준표는 2017년 대선 당시 탄핵 국면으로 지지율 4%까지 추락했던 보수 정당의 후보가 되어 24% 득표까지 끌어올리며 끝까지 완주함으로써, 거대한 탄핵의 파도에 굴하지 않고 맞선 ‘당랑’에 비유되기도 했다. 당랑의 꿈에서 홍준표는 자신의 정치 여정과 함께 나라가 직면한 위기를 강조하고, 보수 우파 진영의 재건을 위한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국민도 잘 사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어머니의 유지를 자신의 “마지막 꿈”으로 내세우며, 과거의 공과는 역사에 맡긴 채 보수 진영이 하나로 단합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자고 역설한다. 본 고에서는 이러한 홍준표의 정치적 태도와 전략을 정치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슘페터의 민주주의 이론, 한나 아렌트의 통찰, 로버트 달의 다원주의, 후안 린츠의 권위주의 연구 등 정치철학적 시각을 원용하며, 포퓰리즘·권위주의·민주주의 공고화 등의 이론적 프레임워크를 적용해 그의 주장을 평가할 것이다. 이를 통해 당랑의 꿈에 담긴 논지가 논리적으로 일관된지, 그리고 현실 정치의 맥락에서 타당한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Ⅱ.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와 홍준표의 권력 전략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서 군주론은 흔히 근대 정치학에서 ‘정치적 현실주의’의 고전으로 간주된다. 마키아벨리는 혼란기에 국가를 통일하려면 군주는 선함과 도덕성만으로는 안 되며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질” 냉혹함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목적이 정당하다면 수단은 정당화된다”는 논리를 폈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정치 지도자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도덕적 한계를 넘어서라도 현실적으로 효과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함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 국가의 안위와 질서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홍준표의 정치행보와 당랑의 꿈에 나타난 태도에는 이러한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가 짙게 반영되어 있다.
무엇보다 홍준표는 권력을 잡기 위한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17년 대선 국면에서 홍준표 후보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등 돌린 보수층을 결집시켜 대통령에 오르려는 목적”을 위해 상황 변화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임기응변과, 문재인 후보를 *“친북 좌파 세력”*으로 규정하여 안보 위기감을 부각하는 선동, 나아가 거친 막말까지 동원하는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정치를 정당화했다고 평가된다. 그는 실제로 바른정당 탈당파의 자유한국당 복당과 친박계 징계해제 등을 일괄 타결하여 보수 진영을 통합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는데, 이를 “보수 결집”이라는 대의 명분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나라를 지키려면 때로는 인간성을 버릴 필요도 있다. 할 수 있다면 착해져라. 그러나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악해져라”라는 마키아벨리식 권모술수의 구현이라 할 만하며, 국내 언론은 홍준표를 주요 대선주자 중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군주론에 가장 부합하는 후보로 지목하였다. 다시 말해 홍준표는 권력을 잡고 보수를 재건하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그 과정에서의 거칠고 논쟁적인 수단들을 감수하는 현실주의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는 도덕성을 중시하는 전통적 지도자상과 대비되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비록 비판을 받더라도 실용적인 노선을 취하는 마키아벨리적 정치관에 부합한다.
홍준표의 이러한 권력 전략은 정치적 현실주의(political realism)의 관점에서 보면 일관성이 있다. 그는 당랑의 꿈에서 거듭 “정치는 현실”임을 강조하며 보수는 *‘정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홍준표가 존경하는 보수의 역사적 지도자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세 인물을 꼽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들 모두 필요에 따라 비판을 감수하면서 현실적인 결단을 내린 지도자들이다. 예컨대 이승만은 좌우대립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국을 위해 권위주의 통치를 불사했고, 박정희는 산업화를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했으며, 김영삼은 군부세력을 해체하기 위해 ‘3당 합당’이라는 비난받는 선택을 감행하였다. 홍준표는 이 세 인물을 “정치적 현실주의자”의 상징으로 내세우며 자신의 현실주의 노선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철학은 마키아벨리적 세계관과 통한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대로 홍준표는 국가의 존립과 자신의 권력 장악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위해 때로는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행보도 불사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책에서 “법과 원칙을 바로 세우다”라고 언급하며 법치와 질서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정치 실천에서는 상황논리에 따라 태세를 전환하고 공격적인 언사를 구사한 점은 이러한 이중성을 보여준다. 이는 마키아벨리가 말한 ‘여우와 사자처럼’ 필요에 따라 교활함과 강경함을 번갈아 구사하는 군주의 이미지와도 부합한다. 요컨대 홍준표의 정치적 태도는 이상주의보다는 권력 확보와 유지에 초점을 둔 현실주의 노선이며, 이러한 태도는 마키아벨리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민주정치 윤리에 비추어 정당화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며, 이는 후술할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Ⅲ. 슘페터의 민주주의 이론과 홍준표의 포괄적 국민주의
홍준표의 정치관은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이상보다는 경쟁적 선거를 통한 권력획득 과정 자체에 중점을 두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조지프 슘페터(J. Schumpeter)가 제시한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의와 맞닿아 있다. 슘페터는 고전적 민주주의 이론이 상정하는 ‘공공선에 대한 국민의 집합적 의사’보다는, 실제 민주주의를 **“국민의 투표를 얻기 위한 경쟁적 투쟁을 통해 지도자들이 결정권을 획득하는 제도적 장캇**로 재규정하였다. 즉, 민주정치란 궁극적으로 엘리트들(정치지도자들)이 선거라는 경쟁 메커니즘을 통해 권력을 놓고 다투고, 유권자는 그 중에서 대표를 선택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슘페터적 민주주의관에 따르면 유권자의 역할은 선거에서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으로 한정되며, 선거 이후의 통치는 뽑힌 지도자들의 재량에 맡겨진다. 정치의 초점은 시민의 숙의나 참여 그 자체보다는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전략과 경쟁에 맞춰진다.
홍준표의 정치 행보와 담론은 상당 부분 이러한 슘페터식 경쟁 엘리트 민주주의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는 당랑의 꿈에서 “정치는 프레임 전쟁”이라고 언급하며 정치에서 이미지와 담론 주도권을 잡는 것이 승패를 좌우한다고 보았다. 이는 정치 과정을 공론을 통한 합의 형성보다는 경쟁적인 여론전으로 인식하는 태도이다. 실제로 홍준표는 SNS와 유튜브 등을 누구보다 적극 활용하여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브랜드를 구축했다. 대변인을 많이 두기보다는 본인이 직접 페이스북과 유튜브 채널(일명 “TV홍카콜라”)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며 “대국민 소통”을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러한 행태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선거운동 스타일로서, 대중과 직접적인 유대감을 형성하여 인기 영합적 지지를 획득하려는 전략이다. 슘페터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홍준표는 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적 숙의보다는 지도자인 자신이 유권자들에게 어필하여 승리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본다. 실제로 홍준표의 책은 보수가 다시 “국민 앞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당을 혁신하고 대중의 지지를 되찾아 정권교체에 이르는 전략을 모색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는 민주주의를 사회 내 다양한 세력의 타협과 조정 과정이라기보다, 선거를 통한 정권획득 경쟁으로 간주하는 시각에 가깝다. 슘페터가 말한 바와 같이, 홍준표에게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지도자 경쟁의 장”*이며 유권자는 그 경쟁의 승자를 결정짓는 심판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쟁중심 민주주의관은 한편으로는 현실 정치의 냉엄한 측면을 반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협의적·규범적 차원을 축소시킨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로버트 달(R. Dahl)을 비롯한 다원주의 정치이론가들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선거 경쟁뿐 아니라 시민의 광범위한 참여, 다양한 이익집단의 자율적 활동, 그리고 토론과 숙의의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달은 이상적인 민주주의에 가까운 현대 정치체제를 *다원적 민주정(polyarchy)*이라고 부르며, *“다수가 참여하는 통캇*를 가능케 하는 일련의 제도적 보장(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자유선거 등)과 더불어 국가권력을 시민사회가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의 질이 높아진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홍준표의 접근법은 이러한 다원적 절차보다 선거 승리를 통한 정권 획득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그의 전략 구호인 “네이션 리빌딩(Nation Rebuilding)”이나 “정권 교체 킹메이커”는 모두 궁극적으로 다음 선거에서 어떻게 이길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컨대 그는 보수정당 내부의 여러 목소리보다는 단합을 최우선으로 하여 일사불란한 선거기계를 만들려 했고, 보수 진영의 가치와 노선을 재정립하는 작업도 대중적 지지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이러한 태도는 슘페터의 최소주의적 민주주의와 궤를 같이하지만, 달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정의 심화를 위해 필요한 포용성과 숙의의 요소가 경시되고 있다는 한계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홍준표식 민주주의는 투표의 순간에만 국민을 주인공으로 대우할 뿐, 선거 이외의 시기에는 국민 여론을 정치 전략에 동원하거나 관리하는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국민 주권을 형식적으로는 존중하나 실질적 참여를 제한하는 엘리트주의 민주관으로서, 민주주의의 참여적·규범적 이상과 긴장 관계에 있다.
Ⅳ. 포퓰리즘적 대중 호소와 권위주의적 경향
홍준표의 정치 담론에는 **포퓰리즘(populism)**적 요소와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적 경향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먼저 포퓰리즘의 측면에서 보면, 홍준표는 자신을 *“서민 대통령”*감으로 포장하며 기성 엘리트와 대비되는 서민적 이미지를 강조해왔다. 그는 당랑의 꿈에서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성장한 자신의 배경을 내세우며 *“돈도 ‘빽’도 통하지 않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밝히고 있다. 이는 사회를 ‘힘있는 기득권층 대 힘없는 서민’의 이분법적 대결 구도로 파악하고, 자신이 힘없는 국민(‘순수한 민중’)의 대변자임을 자임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화법이다. 실제로 현대 정치학자 카스 무드(Cas Mudde)는 포퓰리즘을 *“사회가 ‘순수한 국민’ 대 ‘부패한 엘리트’의 두 진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치는 국민의 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를 구현해야 한다”*고 보는 이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홍준표의 수사에서는 이러한 도식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박근혜 정부의 붕괴 이후 보수 엘리트에 대한 국민적 환멸이 커진 상황을 파고들어, 자신을 깨끗한 outsider로 포지셔닝하고 부패한 이전 정권의 적폐와 거리를 두려 했다. 또한 경쟁자인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좌파 사회주의 실험으로 나라를 망치고 있다”거나 안보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식으로 공격하여, 현 집권세력을 **부도덕하고 무능한 ‘엘리트’**로 규정하였다. 2017년 대선 당시 그가 외쳤던 슬로건과 메시지들은 “나라가 폭망 직전이니 나 홍준표만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식의 위기 담론과 구원자 이미지를 강조했다. 이는 포퓰리즘 정치인이 흔히 활용하는 전략으로서, 일종의 도덕적 서사를 통해 자신을 국민의 유일한 대표자이며 위기의 해결사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홍준표는 문재인 후보를 *“친북 좌파 세력”*이라 칭하며 그의 집권을 저지하는 것을 *“역사적 소명”*으로까지 격상시켰는데, 이러한 수사는 상대 정파를 ‘국민을 위협하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자신과 자기 지지층을 *애국적 “순수 국민”*으로 동일시하려는 포퓰리즘적 이분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준표의 포퓰리즘은 또한 직접소통과 대중동원의 방식에서 드러난다. 그는 전통적 매스미디어를 불신하고 “먹물 언론”이라고 비난하면서, 페이스북 글 모음집인 꿈꾸는 로맨티스트, 꿈꾸는 옵티미스트 등을 출간할 정도로 SNS를 통한 직접 메시지 전달에 주력했다. 이러한 행보는 기성 엘리트나 전문언론을 중간에 배제하고 국민과 리더가 직접 연결되는 통로를 중시하는 포퓰리즘 정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지지층과 직접 소통하거나, 유럽의 포퓰리스트들이 주류 언론을 “가짜뉴스”라 매도하며 소셜미디어로 지지층을 결집시킨 전략과 유사하다. 홍준표는 자신의 SNS팔로워 수와 유튜브 구독자 수를 자랑하면서 “언택트 시대의 중요한 소통 수단”을 가졌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는 대중의 직접 지지를 힘입어 당내 반대파나 기존 언론권력을 우회·압도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홍준표 정치의 포퓰리즘적 성격은 국민 대 엘리트 프레임, 위기 담론과 구원자 이미지, 직접 대중동원 전략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그의 책 당랑의 꿈 전반에 흐르는 정서이기도 하다. 그는 책에서 거듭 “오직 국민만 보고 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정치인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야지 기득권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언술은 명목상으로는 국민주권론에 입각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의 의사를 특정 지도자가 독점적으로 대변한다는 포퓰리즘적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홍준표가 “보수우파의 가치를 바로 세운다”면서도 자신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보수 인사들을 *“기득권을 위한 주장만 펼치는 분열세력”*으로 매도하거나, 탄핵에 미온적이었던 동료들을 두고 소신없는 “속빈 껍데기 보수”라 비판한 행적은, 자신만이 참된 보수를 대표한다는 선민의식을 드러낸다. 이는 포퓰리즘의 도덕적 독점주의(moral monopoly)와 일치하며, 다양한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 반다원주의로도 이어질 위험이 있다.
한편, 홍준표의 정치노선에서는 권위주의적 요소도 감지된다. 물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홍준표 역시 민주적 선거를 통해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이다. 그럼에도 그의 언행 곳곳에서 권위주의적 통치관에 대한 묵시적 동경이나 권위적 리더십 스타일이 나타난다. 앞서 언급했듯 홍준표가 긍정적으로 언급한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은 모두 민주주의를 제한했던 권위주의 통치자들이다. 그는 이들을 *“상징적인 인물”*로 기려 당사에 사진을 걸어놓았다고 밝히며, 혼란기에 필요한 현실적 지도자의 예로 제시했다. 이는 홍준표 본인도 필요하다면 권위적 통치 수단을 고려할 수 있음을 내비치는 대목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홍준표는 자유한국당 대표 시절 당내 윤리위의 친박계 징계를 전격 해제해버리고 바른정당 탈당파를 조건 없이 복당시키는 등, 당 운영에서 상당한 일인 지배적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모습은 조직 내부의 다원성이나 절차적 합의보다는 신속한 결단과 충성을 중시하는 권위주의 리더십의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그가 강조한 “내부 총질 금지”나 “단합이 최우선” 등의 구호에는 이견을 자제하고 일체감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담겨 있다. 이는 민주 정당 내 건전한 토론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는 것으로, 조직 내 소수의견을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경향이라 볼 수 있다.
정치학자 후안 린츠(Juan Linz)의 권위주의 이론에 따르면, 권위주의 체제는 “제한적 다원주의”, “강한 지도자 중심 통캇 등의 특징을 갖는다. 홍준표의 정치관에는 완연한 권위주의 체제 옹호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헌신 부족과 강한 지도력에 대한 선호가 엿보인다. 예를 들어 그는 책에서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강력한 군주”*에 가까운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탄핵 정국 후 국가가 혼란스러울 때 “이른 시일 내 안정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을 언급한 부분은 그가 민주적 절차 이상의 특단의 리더십을 갈망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그는 북한 김정은식의 “독재와 폭압”은 안 된다고 선을 긋고 있으나, 박정희식의 개발독재 모델에는 일정 부분 공감을 표명하고 있다. 실제로 홍준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민주화보다 산업화를 선택해 국민을 가난에서 구했다”*고 평가하며 그 결정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경제발전을 위한 권위주의 통치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하다. 홍준표가 집권했다면, 과연 사법부나 언론, 야당과 같은 견제 세력의 자율성을 존중했을지 확실치 않다. 그는 이미 야당 시절에도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을 “삐뚤어진 먹물”이라고 공격했고, 여당 및 진보세력을 향해 거친 언사를 일삼았다. 이는 권력 획득 이전임에도 견제자들을 적대시하는 태도로, 권력 획득 이후에는 견제기관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려 할 가능성을 엿보인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의제 기관과 언론, 시민사회에 의한 견제와 균형이 필수인데, 홍준표의 언행은 이러한 견제 장치들을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권위주의적 기질을 보여준다. 후안 린츠는 민주주의 붕괴 사례 연구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질 때 나타나는 징후로 상대 정파의 정당성 불인정과 배타적 충성 경쟁을 들었다. 홍준표가 경쟁자인 진보진영을 반역시하거나 국가의 적처럼 취급하는 수사는 정치적 적대감을 극대화함으로써 상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효과를 낳는다. 또한 그는 보수 내부에서도 자신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이를 향해 “배신자” 프레임을 씌우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러한 이분법은 정치의 적대적 양극화를 심화시켜 민주주의의 토양을 약화시킬 수 있다. 아렌트(H. Arendt)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홍준표의 정치언어는 진실성보다는 효과적인 허구의 서사에 기댄 측면이 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부상 배경에 대중의 현실감각 마비와 허구에 대한 맹신이 있다고 보았다. 홍준표의 위기담론이 과장되고 음모론적으로 흘러간다면, 이는 유권자들의 이성적 판단보다는 공포와 분노에 기반한 맹목적 지지를 유도하여 민주 여론시장의 건강성을 해칠 위험이 있다. 또한 아렌트가 정치의 본질로 강조한 **다원성(plurality)**의 가치에 비추어볼 때, 홍준표의 ‘프레임 전쟁’식 정치는 다양한 관점들의 공존과 토론보다는 단일한 내러티브의 지배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서로 다른 의견과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공론장에 함께 나타나(concerted action) 소통하는 활동이지만, 홍준표식 정치에서는 반대자나 비판적 목소리가 설 자리가 줄어들게 된다. 결국 그의 포퓰리즘과 권위주의 성향은 모두 다원주의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포퓰리즘은 도덕적 이분법으로 다원성을 훼손하고, 권위주의 성향은 강력한 지도자와 일원화된 통치를 선호함으로써 다양한 이해관계의 공존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경향들은 민주주의의 자유롭고 활발한 경쟁을 장기적으로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홍준표의 정치노선을 우려스럽게 만드는 요소라고 하겠다.
Ⅴ. 당랑의 꿈의 논지 평가: 민주주의 공고화 관점에서의 비판
홍준표의 당랑의 꿈에 담긴 주장은 대한민국 정치 현실에 대한 나름의 처방전을 제시하고 있으나, 그 논리적 일관성과 현실성 면에서 몇 가지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로, 위기 담론의 과장 문제이다. 그는 책 전반에서 문재인 정부 하 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가 “절망적 상황”에 빠져 있다고 규정하며,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무너질 것처럼 묘사한다. 물론 안보·경제 정책에 대한 보수 야당의 위기의식 제기는 있을 수 있지만, 홍준표의 서술은 과도한 파국 담론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예컨대 2018년 당시 대한민국은 북핵 위협에도 불구하고 한미동맹과 국제공조 속에 안정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경제 역시 어려움 속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홍준표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책을 국가안보 붕괴로 단정하고, 소득주도성장 정책 등을 경제 파탄으로 몰아갔다. 이러한 평가는 상당 부분 정파적 과장이며 객관적 지표나 다수 국민의 인식과 괴리가 있었다. 아렌트가 경고했듯 정치 지도자의 일관된 거짓된 서사는 대중으로 하여금 차츰 현실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홍준표의 위기 담론이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 비판을 넘어 정치적 동원 수사로 기능한다면, 이는 민주공화국의 공론장을 왜곡하는 행위이다. 더욱이 자신이 집권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은 승자 독식적 권력관을 반영하는데, 민주정에서는 어떤 정권 교체도 국가의 존립 기반을 무너뜨리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서술은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신을 조장할 소지가 있다.
둘째, 제시된 해결책의 현실성 문제이다. 홍준표는 책에서 보수우파 진영의 재건을 위해 단합, 혁신, 국민지향, 가치정립의 4대 강령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들은 추상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 구체적 실행 방안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내부 총질 금지, 단합 우선”이라는 강령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다양한 의견 조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한다. 홍준표는 탄핵 정국 이후 분열된 보수를 추슬러야 한다는 명분으로 일사불란한 단결을 강조했지만, 이는 곧 당내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장 본인이 2017~2018년 한국당 대표로 있을 당시 친박계와 비박계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내놓은 조치들은 일방적 결정으로 이루어졌고, 2018년 지방선거 참패 후에는 계파 갈등이 재연되어 그의 리더십이 도전을 받았다. 이는 강압적 단합의 한계를 보여준다. 또한 “육참골단의 각오로 혁신”이라는 홍준표의 주장은 자신을 포함한 보수 인사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취지로 읽히지만, 실제로 혁신의 내용을 살펴보면 주로 인적 쇄신이나 조직 개편 등 당내 권력 재분배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작 보수진영의 정책노선이나 이념적 재정립에 있어서는 얼마나 새로운 비전이 제시되었는지 불투명하다. 요컨대 그의 혁신 담론은 정치공학적 처방에 치우쳐 있으며, 보수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사상적 성찰은 부족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셋째, 도덕성과 국민에 대한 이중적 태도이다. 홍준표는 책에서 “깨끗하고 당당한 보수”를 주장하며 도덕성을 강조했다. 병역·납세 등 기본 의무를 다하고 부패하지 않는 도덕적 정당성이 보수에게 필요하다고 역설한 점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실제 언행은 때때로 이러한 도덕적 기준과 충돌했다. 그는 과거 ‘돼지발정제’ 사건 등의 구설로 국민 눈높이에 어긋나는 행적을 드러낸 바 있고, 막말 정치로 품위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는 스스로 말한 보수의 품위와는 배치되는 행태였다. 또한 그는 “오직 국민만 보고 간다”면서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이나 보수 진영에 비판적인 다수 국민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불편한 진실로 취급하거나 좌파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촛불혁명으로 표출된 국민 여론에 대해 그는 처음에는 “좌파 선동”으로 치부했으며, 탄핵 이후 민심의 변화를 충분히 수용하지 않고 보수 지지층의 정서에만 집중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구호와는 달리 국민 전체의 민의보다는 자기 지지층의 민의만을 “국민”으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포퓰리즘 정치인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 바로 이 점인데, 홍준표 역시 폭넓은 국민통합보다는 진영 결집의 논리에 치우쳐 있었다. 결국 그의 “국민”이란 실질적으로는 지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그 외 국민의 상당수가 동의하지 않는 주장도 국민의 뜻이라고 강변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국민통합이라는 민주정의 가치를 저해한다.
넷째, 민주주의 공고화와의 관계에서 본 우려이다. **민주주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란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주요 행위자들 누구도 비민주적 대안을 고려하지 않게 된 상태를 뜻한다. 한 국가의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려면 승자와 패자가 민주적 규칙을 완전히 내면화하고, 서로를 체제 내 합법세력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2017년의 홍준표는 패배 후 야당 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며 제도 안착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 그는 비록 선거에서 졌지만 선거 결과를 법적으로 시비 걸지 않았고, 의회 정치의 범위 안에서 문재인 정부를 견제하는 야당 역할에 충실했다. 이는 행동적으로는 민주 규칙을 존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태도와 담론의 측면에서는, 홍준표의 언행이 민주주의의 장기적 안정에 긍정적 영향만을 준 것은 아니다. 그의 극단적 수사와 적대적 태도는 앞서 지적한 대로 한국 정치의 양극화를 증폭시키는 면이 있었고, 이는 민주주의 공고화에 부담을 준다. 특히 탄핵 직후 보수 진영 내부에 아직 민주적 헌정질서에 대한 회의나 독재 향수(鄕愁)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홍준표가 박정희 등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 것은 보수 유권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카드였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보수정당의 정상화 방향은 과거 권위주의와의 결별이어야 함에도, 홍준표는 *“과거의 공과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며 과오에 대한 비판을 유보하자고 했다. 이는 보수진영 내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 부재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박근혜 탄핵에 찬성했던 세력과 반대했던 세력이 끝내 화학적 결합을 이루지 못한 채 앙금이 남았고, 그 여파는 이후 보수정치의 내분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맥락에서 홍준표의 리더십은 민주주의 공고화를 위한 가치 통합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탄핵을 둘러싼 분열을 봉합하기 위해 진실한 토론을 유도하기보다, 덮어두고 빨리 정권쟁취에 나서자는 식으로 서둘렀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보수 진영 결집을 도모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보수 진영의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전략은 민주주의 공고화에 역행하는 요소를 내포했다고 볼 수 있다.
Ⅵ. 결론: 홍준표 현상의 의의와 민주정에 주는 교훈
홍준표의 당랑의 꿈과 그에 담긴 정치적 태도를 살펴본 결과, 그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전환기에 등장한 포퓰리스트적 보수 정치인으로서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 전략을 구사하며 논쟁적 리더십을 행사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정치행보는 슘페터가 묘사한 민주주의의 경쟁적 속성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달이 강조한 다원주의적 가치를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심화에 한계를 드러냈다. 그는 민심을 등에 업은 *당랑(사마귀)*처럼 거대한 흐름에 맞서겠다는 투지를 보였지만, 그 과정에서 활용한 수단들은 포퓰리즘적 선동과 권위주의적 일면을 띠어 민주주의의 규범적 기반을 잠식할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그의 저술 당랑의 꿈은 한편으로 보수 진영에 자기 혁신과 가치 회복을 촉구하는 제언으로서 긍정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실제로 홍준표가 강조한 부패 청산이나 보수의 도덕성 회복, 서민에 대한 책임 등은 보수 정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나름의 성찰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제언들이 채택한 방식과 논리는 민주주의 정치문화의 발전 측면에서 볼 때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홍준표 현상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민주주의 위기 국면에서 karizmatik(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등장해 대중의 불안을 파고들 때, 그는 종종 마키아벨리의 군주를 자처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권력을 쟁취하려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 국가에서 권력획득의 정당성은 절차와 가치에 대한 준수에서 나온다. 목적이 아무리 정당해도 수단이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를 훼손한다면, 그 정당성은 훼손된다. 홍준표의 경우,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보여준 극단적 수사와 배제의 정치가 이에 해당한다.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더욱 공고해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포퓰리즘적·권위주의적 유혹을 경계하고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와 민주주의 규범 간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정치 지도자는 현실 감각과 결단력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아렌트가 말한 인간의 다원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며, 달이 강조한 협의와 견제 장치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당랑이 거대한 수레바퀴를 막아서듯 한 개인의 분투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은 낭만적이지만 위험하다. 민주사회에서는 여러 당랑들이 함께 토론하고 협력함으로써 비로소 큰 수레바퀴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홍준표의 당랑의 꿈에 담긴 꿈이 진정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면, 그 꿈은 권력의지뿐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과 다원적 소통의 노력으로 뒷받침될 때 비로소 현실에서 긍정적 유산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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