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현은 한국 보수 정당 내에서 극우적 정치 행보로 최근 주목받는 인물이다. 한때 온건파 이미지였던 그는 이제 선동적 발언과 권위주의적 태도로 변모하여, 전광훈 목사 등의 극우 세력과 공개적으로 연대하고 있다. 이러한 행보는 한국 민주주의의 건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정치학적 이론을 통해 그의 정치 전략과 영향을 분석할 필요성을 드러낸다. 본 논문은 마키아벨리, 슘페터, 한나 아렌트, 로버트 달, 후안 린츠 등의 정치이론적 프레임워크를 활용하여 윤상현의 극우적 정치 활동과 저서 더 플레이어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를 통해 그의 ①정치 행보, ②포퓰리즘 및 권위주의 경향, ③민주주의 훼손 여부, ④저서 내용 분석, ⑤향후 영향과 전망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윤상현 의원은 최근 극우 세력을 적극 포섭하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그는 주말마다 극우 성향 집회에 참석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은 “종북 주사파 카르텔”의 소행이고,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역시 “사법 좌파 카르텔”의 준동이라 주장하며 음모론적 선동을 일삼았다. 또한 극우 인사 전광훈 목사 앞에서 공개적으로 큰절 사과와 90도 인사를 하여 논란이 되었는데, 이는 극단 세력의 지지를 얻어 향후 당권이나 대권 주자로 부상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권력지향적 행보는 마키아벨리의 권력관과 맞물려 이해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권력 유지를 위해 “배신과 기만, 공포 조성도 불사하라”고 조언했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 비도덕적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윤상현이 당내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극우 집단과 손잡는 모습은 **“정치 권력 안정이 도덕보다 우선”**이라는 마키아벨리식 현실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고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기성 질서와 도덕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데, 이는 마키아벨리적 권력 획득 본능과 책략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윤상현의 선동 전략은 슘페터의 민주주의관으로도 조명된다. 슘페터는 민주주의를 *“정치인들이 국민의 표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제도적 장캇*로 정의하며, 실제 정치에서 대중의 합리성보다는 정치인의 선전과 경쟁이 핵심이 된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유권자는 이상적인 ‘공공선’을 합리적으로 추구하기보다 감정과 충동에 휩쓸리기 쉽고, 정치인은 이를 이용해 권력을 쟁취한다는 것이다. 윤상현이 펼치는 대중 연설과 음모론적 메시지 – 예컨대 *“좌파 카르텔이 나라를 위협한다”*는 주장은, 민의를 설득하기보다는 공포와 적개심을 자극하여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행태다. 이는 슘페터가 묘사한 정치인의 경쟁적 포퓰리즘과 부합하며, 대중의 비합리성을 이용해 표를 얻는 정치적 기업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결국 윤상현의 극단적 발언과 행보는 민주주의를 이상적 토론장이 아닌 권력 게임으로 간주하는 인식에 기반하며, 정치의 사냥터에서 표를 얻기 위한 플레이어로 자신을 포지셔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상현의 정치 전략에는 포퓰리즘적 선동과 권위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는 스스로를 *“애국 시민”*의 대변자로 내세우며, 기존 엘리트나 반대 진영을 *“국민의 적”*으로 규정하는 수사를 즐겨 쓴다. 예컨대 야당과 진보 세력을 “주사파”, *“좌파 카르텔”*로 매도하고, 사법부와 언론까지도 적대 세력의 일부로 간주하는 그의 담화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화법이다. 포퓰리즘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담론은 사회를 *“순수한 국민 대 부패한 엘리트”*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정치적 경쟁자를 국민의 적으로 악마화함으로써 대중의 분노를 동원한다. 실제로 윤상현은 “민주당의 입법 폭주” 등의 표현으로 의회를 폄훼하고, 자기 진영만이 *‘진정한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반대파의 정당성을 부인했다. 이러한 반플루럴리즘 태도는 *“다원주의보다 일원적 국민의 뜻”을 앞세우는 포퓰리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로버트 달이 강조한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원주의와 야당의 정당성 인정인데, 윤상현은 정적을 국익의 적으로 치부하여 정치 공동체에서 배제하려는 듯한 언행을 거듭하고 있다. 달의 민주주의 이론에서 볼 때 이는 다수파의 전제정 (tyranny of the majority)에 가까운 위험한 경향이며, 정치적 경쟁자도 제도 내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에 반한다.
권위주의적 경향 역시 윤상현의 행보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는 2024년 말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옹호하면서 *“비상계엄은 고도의 통치행위”*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전두환 신군부의 12월 쿠데타와 계엄령까지도 정당화하는 취지로 받아들여져, 국회에서 동료 의원들로부터 *“전두환!”*이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실제로 윤상현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위였던 인연이 있으며,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향수 내지 관용을 보이는 인물로 지목된다. 후안 린츠의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준(準)충성(semi-loyal)적 정치 행위자는 민주주의에 큰 불안정 요인이 된다. 린츠는 민주 체제 내에 민주 규범을 완전히 존중하지 않는 세력(반체제적 혹은 반민주적 세력)이 있을 경우, 그들의 언행이 체제에 대한 신뢰를 저해하고 위기 시 민주주의 붕괴의 촉매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윤상현이 합법적 절차(사법부의 영장 발부 등)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심지어 지지자들에게 *“군이 국회를 들어가도 문제될 것 없다”*는 식의 발언까지 늘어놓은 것은, 그의 정치가 민주 규칙에 대한 최소한의 충성도마저 의심케 한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태도는 지지자들 사이의 극단적 양극화를 부추겨, 상대 진영에 대한 증오와 불신을 심화시킨다. 실제로 윤상현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움직임에 맞서 극단 지지층을 동원하면서, 법원 담을 넘어선 지지자들에게 *“훈방될 것으로 본다”*며 사실상 격려하는 발언을 했다. 이는 지지자들에게 법과 절차보다 지도자의 의지에 따르는 행동을 부추긴 것으로 해석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원칙을 스스로 훼손한 셈이다. 야당은 이를 두고 윤상현이 *“시위대를 더 대담하게 만들어 습격의 도화선이 됐다”*고 비판했다. 이렇듯 윤상현의 포퓰리즘과 권위주의는 결합되어 한국 정치의 극단적 분열을 가속화하고 있다. 대중은 상호 불신 속에 분열되고, 각 진영은 민주 규범마저 희생하면서 승리를 쟁취하려는 양상이 심화되었다. 린츠와 야스차 몽크 등이 지적하듯, 극단적 양극화는 유권자로 하여금 자기 진영의 반민주적 행동도 무조건 감싸게 만들고 오히려 적극 지지하도록 한다. 윤상현과 같은 인물이 주도하는 극단 정치가 지속될 경우, 한국 정치는 상대 진영을 배제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민주주의는 다원주의, 법치, 권력 분립과 절차적 정당성 등의 원칙에 기반한다. 윤상현의 극우 행보를 이러한 원칙과照(비춰)보면, 심각한 훼손 징후들이 드러난다. 우선 정치적 다원주의(pluralism) 측면에서, 그는 반대 의견과 세력을 국론 분열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대한민국을 단일한 “애국 vs. 반역” 구도로 재편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로버트 달은 민주 정치의 요건으로 **포괄적 참여와 정책 경쟁(경합)**을 들며, 어느 한쪽도 완전한 도덕적 진리를 점유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강조했다. 그런데 윤상현은 야당과 진보 시민을 국가 전복 세력처럼 취급하여 적법한 반대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이는 민주적 “충성스런 야당(loyal opposition)” 개념의 부정이며, 일당 지배나 일인 지배에 가까운 정치관을 암시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극단 지지층 앞에서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백 번, 천 번 징계받고 제명당해도 좋다”*고 외쳤는데, 이러한 발언은 당내 민주주의와 숙의문화를 무시하고 오로지 최고권력자(대통령)와 그 추종세력의 의지만 중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정치학자 래리 다이아몬드가 지적한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의 1단계가 바로 *“반대파를 불순하고 비애국적으로 낙인찍는 것”*인데, 윤상현은 이를 충실히 실행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의 다원주의적 토대를 잠식하고 있다.
또한 윤상현의 행보는 법치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을 내포한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견해를 인정할 뿐 아니라, 규범과 절차를 통한 갈등 조정을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윤상현은 사법부와 입법부의 정당한 권한 행사마저 *“좌파의 음모”*로 규정하며 따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예컨대, 그는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논의나 사법부의 결정(영장 발부 등)을 *“헌법 문란 세력의 책동”*으로 몰아붙여, 헌법이 부여한 권력 견제 절차를 전복하려 했다. 심지어 계엄령 정당화 발언에서는 군대가 국회와 선관위를 무력화시킨 12.12 쿠데타 사태조차 문제 될 것 없다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러한 언행은 삼권분립과 법치에 대한 명백한 도전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민주주의 이론가 후안 린츠는 민주주의 붕괴의 전조로 헌정질서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정치 행위를 꼽았는데, 윤상현이야말로 대의제와 사법적 절차에 불복하는 태도를 공개적으로 표출함으로써 그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사례로, 앞서 언급한 서울서부지법 난입 사건에서 윤상현은 구속된 지지자들에 대해 *“훈방될 것”*이라고 군중에게 말해 사실상 불법행위에 면죄부를 주었다. 그의 발언이 퍼지자 시위대는 더욱 과격해져 법원을 습격했고, 이는 입법·사법 기능에 대한 폭력적 공격으로 이어졌다. 윤상현 측은 뒤늦게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안 된다”*고 해명했지만, 이미 정치 지도자가 준법 대신 거리 투쟁을 통한 해결을 시사함으로써 민주주의 절차 규범을 훼손한 후였다. 절차적 정당성을 경시하고 *“거리의 정의”*를 외치는 이러한 풍조가 확산된다면, 법과 제도를 통한 문제 해결이 힘을 잃고 정치적 폭력과 무질서가 용인되는 위험이 커진다. 이는 민주주의의 후퇴, 나아가 전체주의적 혼란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역사적 경험이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도 전체주의의 부상에는 사법질서의 붕괴와 대중의 진실상실이 놓여 있었다고 분석했다. 윤상현의 선동은 시민들이 *“무엇이 사실이고 누가 정당한 권위인갚*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결국 힘을 가진 자의 말만 옳다고 믿는 위험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는 아렌트가 경고한,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파괴된 대중은 지도자의 말에만 의존하게 된다”*는 전체주의 프로파간다의 효과와도 상통한다. 종합하면, 윤상현의 행보는 민주주의의 다원주의적 대화와 절차적 규범을 훼손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의 정치가 지속되고 그 영향력이 커질수록, 민주 제도의 안정성과 법치의 권위는 약화되고, 극단적 “승자독식” 정치문화가 자리잡을 우려가 있다.
윤상현의 저서 더 플레이어는 그의 자전적 정치 아포리즘을 담은 책으로, 자신의 인생 여정과 정치 철학을 피력하고 있다. 책 제목 *“더 플레이어”*에서 드러나듯, 그는 자신을 정치 게임의 능숙한 선수로 인식하는 듯하다. 실제로 책에서 윤상현은 학자로서 조용한 삶을 꿈꾸다가 “우연과 필연이 겹쳐” 정치판에 뛰어든 과정, 그리고 권력의 정점 가까이에서 (과거 대통령의 사위로서) 목도한 경험들을 소개한다. 흥미로운 점은, 윤상현이 이 책에서 겸손과 민생 중심의 정치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 입문 시 *“정치는 개인의 이름을 잊지 않고, 겸손함을 유지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자신의 지역구 인천 미추홀에서, 낙선 후에도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이름과 사연을 새기고, 결국 무소속 출마에도 주민들의 지지로 4선 고지에 올랐던 일화를 소개한다. 책에 따르면, 당 공천을 못 받아 불리한 선거를 치러야 했을 때조차 지역 유권자들은 그를 끝까지 성원했고 수도권 첫 4선 의원이란 성취를 안겨주었다고 자부한다. 이러한 서술은 윤상현이 **기성 정치권이나 이념 성향을 넘어서는 ‘보통 사람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엘리트 정치에 맞서는 풀뿌리 정치인으로 이미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의 자기 서사와 닮아 있다. 포퓰리즘 지도자는 대개 *“나는 기득권에 속하지 않는, 민중의 친구”*라는 신화를 내세우는데, 윤상현 역시 책에서 권력자의 사위라는 출발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해 민심을 얻었다”*는 서사를 구축한다. 이로써 그는 대중에게 친근하고 헌신적인 일꾼의 이미지를, 보수층에게는 *“중앙 권력과 인연도 있는 능숙한 인물”*의 이미지를 동시에 전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플레이어의 내용과 윤상현의 실제 정치행태 사이에는 뚜렷한 괴리와 모순이 드러난다. 책에서 그는 *“정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어려움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했지만, 정작 현실 정치에서 그의 언행은 국민 개개인의 다양한 목소리를 포용하기보다는 편 가르기와 선동에 집중되어 있다. 예를 들어, 책에서는 지역구민의 삶을 챙기는 생활 정치인을 자처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전국적 극우 담론을 이끄는 이념 정치인으로 행보를 바꾸었다. 또한 책에서 그는 박근혜, 전두환 등 과거 권력자들의 몰락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느낀 바를 담담히 회상한다고 했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윤상현은 권력의 덧없음과 남은 가족들의 고통 등을 언급하며 권력자에 대한 인간적 면모를 강조하거나 동정적 시각을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은 전두환 독재나 박근혜 국정농단에 대한 분명한 비판보다는 인간적 이해에 치우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책에서 전두환, 박근혜를 *“시대의 빌런으로 추락한 최고 권력자들”*이라 표현하며도, *“세상이 몰랐던 그들의 뒷모습”*을 솔직히 말해주겠다고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권력의 이면까지 꿰뚫어본 내부자임을 부각하는 한편, 독자들의 동정을 유도하여 권위주의 유산에 대한 비판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로 읽힐 여지가 있다. 실제 그의 현실정치에서 나타나는 권위주의 옹호 성향(예컨대 계엄 옹호)은 이런 역사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은 또한 윤상현 개인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까지 담았다고 홍보되는데, 이는 그를 친근한 이웃 같은 인간미 있는 인물로 포장하려는 전략이다. 요컨대, 더 플레이어는 윤상현의 정치적 자기정체성 구축의 산물로서, 표면적으로는 겸손한 민생 정치인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권력과 민심 양쪽을 다 아우르는 *“플레이어”*로서의 본인을 부각하고 있다. 이중적 메시지는 그의 실제 전략 – 겉으로는 국민을 위하는 듯하면서 속내로는 권력 게임을 주도하려는 자세 – 와 맞물려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여우와 사자의 본성을 모두 지녀야 한다”*고 조언했는데, 윤상현의 책에서도 **겸손한 시민의 종(servant)**과 **영리한 권력 기술자(player)**라는 두 얼굴이 교차한다. 이는 유권자들에게 혼재된 인상을 남겨, 그에 대한 평가를 복잡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더 플레이어는 윤상현의 정치 행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스스로 설정한 역할극 – 민중 속에서 권력을 꿈꾸는 플레이어 – 을 세상에 내보였고, 이후 현실에서 그 역할을 실현하고자 극우 포퓰리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윤상현의 극우적 정치 행태와 그가 표방하는 메시지는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 문화에 심각한 도전과 장기적 영향을 남길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행보는 단기적으로는 극단적 보수 세력의 결집을 가져와 보수 진영 내부 권력 재편에 변수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집권 여당 내 일부 인사들은 윤상현의 극단노선에 우려를 표하며 자제를 촉구하고 있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그를 통해 열성 지지층의 결속과 동원을 기대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부 분열과 갈등은 보수 진영 전반의 노선 투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만약 윤상현식의 강경 포퓰리즘이 당 주류 노선으로 자리잡을 경우, 한국의 보수정당은 전통적 보수주의(법치와 점진적 개혁 중시)에서 더욱 탈피하여 편 가르기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정당으로 변모할 수 있다. 이는 단기적으로 선거에서 일정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 효과를 볼지 몰라도, 중도층과 청년층의 이탈을 가져와 정치 지형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다. 궁극적으로 극우 포퓰리즘 노선은 사회 통합보다는 사회 균열의 확대를 가져와, 선거마다 진영 간 제로섬 게임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정치를 고착시킬 전망이다.
더 심각한 것은 윤상현 현상의 민주주의에 대한 장기적 잠식 효과이다. 앞서 논의했듯 그의 언행은 민주주의의 규범적 경계선을 지속해서 허물고 있으며, 이러한 행태가 **묵인되거나 성과를 거둘 경우 민주주의의 ‘오기’(악습)**로 정착될 위험이 있다. 예컨대, 폭력적 시위나 불복종이 정치 수단으로 용인된다면 향후 여야 불문하고 패배 시 거리 동원과 폭압적 행정으로 대응하려는 유혹이 커질 것이다. 또한 음모론과 가짜뉴스를 활용한 지지층 결집 방식이 성과를 거두면, 건전한 여론 형성이 더 어려워지고 국민의 현실 인식은 더욱 분극화될 것이다. 아렌트가 우려한대로, 진실의 붕괴와 cynyism이 만연하면 합리적 토론에 기초한 민주정치는 설 자리를 잃는다. 결국 이는 민주주의의 내부로부터의 부식으로 이어진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 관찰된 민주주의 퇴행 사례들에서도, 처음에는 일부 극단 정치인의 일탈이 “표현의 자유” 또는 *“정치 전략”*으로 간과되다가 점차 시스템 전체의 신뢰 하락과 규범 파괴로 연결된 바 있다. 한국 정치에서도 윤상현과 같은 인물이 계속 활약하고 영향력을 넓힌다면, **민주주의의 형식은 유지되더라도 내용은 크게 훼손된 껍데기 민주주의(민주주의의 공허화)**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후안 린츠가 “민주주의의 균열”이라 부른 현상과 상응하며, 최악의 경우 민주주의의 비가역적 퇴보를 초래할 수도 있다.
향후 전망을 살펴보면, 윤상현 개인의 정치적 미래는 두 가지 시나리오로 나뉜다. 하나는 극우 포퓰리즘의 지속적 영향력 확대이다. 이 경우 윤상현은 극우 지지층을 발판으로 당내 권력을 장악하거나 대선 주자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의 노선이 당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 한국 정치는 한동안 극단 대립의 소용돌이에 갇힐 것이며, 정책보다는 이념 전쟁이 우선시되는 비생산적 국정운영이 전개될 것이다. 다른 시나리오는 역풍과 한계 노출이다. 즉 다수 시민과 온건 보수층이 그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인식하여, 윤상현이 점차 고립되는 경로다. 이미 일부 여당 의원들과 보수 지식인들은 윤상현의 행보를 두고 *“전체 보수를 욕먹이는 자기 정캇*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법치를 중시하는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계엄 옹호 등 그의 발언에 등을 돌릴 수 있다. 이 경우 윤상현은 특정 강경파의 마스코트로 남을 뿐 대중정치 지도자로의 성장은 제한될 전망이다. 실제 민주사회에서는 극단주의자는 결국 외연 확장에 실패하고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1960년대 미국의 조지 월리스나 1970년대 이후 유럽의 일부 극우 정당들도 처음에는 선풍을 일으켰으나, 과격성과 비현실성 때문에 집권 주류로 올라서지 못한 바 있다. 윤상현 역시 한국 사회의 성숙한 시민의식과 민주주의 면역체계에 부딪혀 일정 한계에 봉착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설령 그가 몰락하더라도 이미 남긴 나쁜 선례와 정치 풍토의 타락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악은 그 영향이 멀리까지 미친다”*고 경고했는데, 윤상현의 극우 포퓰리즘은 퇴장 이후에도 한국 정치 문화에 혐오와 불신의 잔재를 남길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윤상현의 극우적 정치 행보와 저서 더 플레이어는 현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를 상징한다. 정치학적 프레임으로 볼 때, 그의 행태는 마키아벨리적 권모술수, 슘페터적 엘리트 경쟁, 아렌트적 거짓 선동, 달이 경계한 다수 전제와 린츠적 민주주의 와해 요소들이 뒤섞인 위험한 혼합물이다. 이러한 정치가 득세할 경우 민주주의의 기반이 약화되고 사회 통합은 난망해진다. 따라서 시민사회와 책임 있는 지도자들은 윤상현 현상을 경종으로 받아들여, 민주주의의 토양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다행히도 한국 민주주의는 수십 년간의 발전을 거치며 위기 때마다 시민의 힘으로 균형을 복원해온 역사를 가진다. 궁극적으로 윤상현의 극우 포퓰리즘이 장기적으로 성공할지, 아니면 한때의 일탈로 끝날지는 대한민국 시민들의 집단 지혜와 민주적 면역력에 달려 있다. 우리 정치가 이 도전을 딛고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간다면, 윤상현의 행보는 반면교사로 남겠지만, 만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그 **후과(後果)**는 향후 세대까지 두고두고 짐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어떤 정치행태를 용인하고 어떤 선은 넘지 말아야 할지, 윤상현이라는 *“플레이어”*가 던진 물음에 답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