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현은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5선 의원으로, 전 대통령 전두환의 사위이기도 한 인물이다. 2013년 출간된 정치 너머의 세상에서 그는 자신의 삶과 정치 철학을 서술하며 “정치도 결국 사람”이고 희망과 행복이 정치의 기준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한국 사회문제, 약자에 대한 관심, 개인적 감정, 존경하는 인물과 서민 삶, 그리고 그의 국회 경험과 견해를 담고 있다. 윤상현은 스스로 “권력과 정치에는 관심이 없던 백면서생” 출신으로, 정치란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며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겉보기에는 포퓰리즘적 대중 친화와 새 정치를 표방하는 듯하다. 본 논문에서는 윤상현의 주요 논지를 정치학 이론의 틀로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마키아벨리, 슘페터, 한나 아렌트, 로버트 달, 후안 린츠 등의 관점을 통해 그의 정치 철학을 분석하고, 포퓰리즘 및 권위주의 경향과 민주주의에 대한 함의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책의 내용과 윤상현의 실제 정치 행보 간 모순을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논의한 후, 이러한 정치 행태가 한국 민주주의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과 전망을 평가한다.
윤상현은 정치 너머의 세상에서 “정치는 사람”이라는 인간 중심적 철학을 내세운다. 그는 정치인의 역할을 국민 각 개인의 행복과 희망을 이루는 데 두어야 한다고 말하며, 정치에서 소통과 공감을 강조한다. 예컨대 그는 정치란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기보다 개별화된 한 사람의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가지려” 하는 것이라며, 진영 논리의 극복을 역설한다. 이러한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이상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정치관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학자들은 이러한 관점을 다양한 시각에서 평가해왔다.
마키아벨리의 관점: 르네상스 시대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권력 유지를 위해 통치자가 때로는 선하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군주는 선으로만 일관해서는 안 되며, 필요에 따라 악행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통치자의 미덕보다는 효과적인 권력 행使를 중시했다. 윤상현의 저서는 도덕성과 인간미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에照ら해 보면 이러한 이상주의가 실제 권력 투쟁에서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자가 선한 척하는 것이 실제 선하게 행동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까지 말했는데, 윤상현 역시 책에서 ‘좋은 정캄의 이미지를 강조하면서도 실제 정치 과정에서는 권모술수를 활용하는 마키아벨리적 면모를 보였다. 이는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그의 막후 정치 공작과 권력투쟁 행태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윤상현의 정치 철학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겉과 속의 괴리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슘페터의 관점: 경제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인 요제프 슘페터는 고전적 민주주의 이론을 비판하며, 민주주의를 “국민의 투표를 얻기 위한 지도자들 간의 경쟁적 투쟁”으로 정의했다. 슘페터에 따르면 국민 일반의 합리적 공공선 추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엘리트들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위임받는 과정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윤상현의 “정치 너머”라는 이상은 마치 정치 엘리트의 권력투쟁을 넘어 진정한 민의 실현을 꿈꾸는 듯하지만, 슘페터식 냉소적 시각에서 보면 이는 *“종교적 희망에 가까운 환상”*일 수 있다. 윤상현이 말하는 ‘소통과 공감의 정캄는 오히려 슘페터가 지적한 고전 민주주의의 낭만적 전제—즉, 대중이 합리적으로 공공선을 결정한다는 믿음—와 닮아 있다. 그러나 정작 윤상현은 책에서 이상을 말하면서, 현실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경쟁에 깊숙이 뛰어들었다. 슘페터 이론대로라면, 윤상현 또한 결국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경쟁자에 불과하며, 그가 내세운 국민행복 담론은 권력 획득 수단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지역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도 늘 당선될 만큼 개인적 인기를 누렸는데, 슘페터식 민주주의에서 이는 지도자가 대중 지지를 얻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일 뿐, 정치 너머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다.
한나 아렌트의 관점: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정치를 인간의 ’복수성(plurality)’, 즉 다양한 개인들이 공론장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함께 행위하는 것으로 보았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들이 단수가 아닌 복수로 지구에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의 전제 조건이며, 어떤 하나의 절대적 의지나 집단이 정치 공간을 독점하면 진정한 정치가 사라진다. 윤상현이 강조하는 ‘사람’ 중심 정치와 개개인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이런 아렌트의 다원주의와 일견 통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진정한 소통은 다른 의견들과 함께 나타날 때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거짓과 속임수가 난무하면 공론장이 붕괴한다고 경고했다. 윤상현의 저서가 표방하는 공감의 정치는 아렌트적 이상인 공동 세계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아렌트라면 윤상현의 실제 정치 행태에서 다원성의 훼손을 우려할 것이다. 예를 들어, 윤상현은 자신과 다른 입장에 선 동료 정치인(김무성 등)을 배척하고자 했고,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행동도 보였다. 이는 아렌트가 말한 공론장의 조건—다양한 관점의 공존과 진실에 대한 존중—을 저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윤상현의 ‘정치 너머’ 구상은 아렌트가 보기에 정치를 근본에서 파괴하는 전체주의적 유혹(한 집단·한 지도자만이 “진리”를 대표하는 상황)과 맞닿아 있을 위험이 있다.
로버트 달의 관점: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를 이상적 원칙이 아니라 **현실적 제도들의 집합(다원주의)**으로 파악하며, ‘폴리아키(polyarchy)’ 개념을 통해 참여와 경쟁의 제도화된 보장을 강조했다. 달은 민주 체제의 성숙도를 **시민의 폭넓은 참여와 공정한 정치적 경쟁(즉, 다원적 권력 중심의 공존)**으로 평가하였으며, 사회가 두 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완전히 분열되는 현상을 민주주의의 위험 요인으로 지목했다. 윤상현의 철학에서 긍정적으로 볼 부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겠다는 대표성에 대한 고민이다. 이는 달의 민주주의 기준 중 포용성과 참여에 부합하는 면도 있다. 그러나 윤상현은 동시에 자신이 속한 친박 진영의 이익을 위해 정치 과정을 뒤에서 조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공개적 경쟁의 원칙을 훼손하는 행위였다. 달의 이론에照ら해보면 윤상현이 주도한 밀실 공천 개입이나 정적 배제 시도는 민주주의의 경쟁성과 다원성을 해치는 것이다. 달은 특히 **극단적 양극화(double-peaked preferences)**가 민주주의를 마비시킬 수 있다고 했는데, 윤상현이 몸담은 정치 환경은 친박 대 비박, 보수 대 진보로 첨예하게 양분되어 있었다. 그의 행동은 이러한 양극화를 완화하기보다 오히려 심화시키는 방향이었고, 달의 관점에서 보면 다원적 견해의 공존보다는 편가르기 정치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후안 린츠의 관점: 정치사회학자 후안 린츠는 민주주의 붕괴와 권위주의 대두를 연구하면서, 민주 체제를 무너뜨리는 핵심 요인으로 지도층의 비민주적 행태와 정치적 극화를 들었다. 린츠에 따르면 권위주의 체제는 공식 이데올로기 없이도권력자에 대한 개인 충성과 반대 세력의 억압으로 유지되며, 특히 언론과 시민사회 영역의 다원성을 억제하는 특성이 있다. 윤상현의 정치적 메시지에는 표면상 권위주의와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의 행보는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내포했다. 예컨대 그는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정무특보로서 권력 핵심에 있었고, 검찰 수사 기밀 유출 등 권력기관을 사익에 이용하는 의혹에 연루되었다. 또한 앞서 언급한 김무성 대표에 대한 공천 배제 공작은 민주 절차를 무시한 권위주의적 행태라 할 수 있다. 린츠의 연구는 이런 기회주의적 권력 행위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좀먹는지 보여주는데, 윤상현 사례는 그 경고를 뒷받침한다. 나아가 린츠는 민주 붕괴의 전조로 집권층이 경쟁을 형해화하고, 야당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꼽았는데, 윤상현은 자신이 속한 계파에 반대하는 이들을 “죽여버려”라고까지 말하며 적대시했다. 이는 린츠가 말한 권위주의 **“개인 지배와 보상-공포의 통캇**가 민주사회 내부에서 나타난 사례로 볼 수 있다. 결국 윤상현의 정치 철학은 표면적 민심 숭배 이면에 권위주의적 리스크를 안고 있으며, 이는 마키아벨리, 슘페터, 아렌트, 달, 린츠 등 여러 이론가들의 시각에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윤상현의 정치 너머의 세상은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강조하고 기존 정치권에 대한 염증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적 요소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포퓰리즘은 **“순수한 국민” 대 “부패한 엘리트”**의 이분법에 호소하고 자신을 국민의 유일한 대표로 내세우는 정치 스타일로 정의된다. 윤상현 역시 책 제목 자체로 ‘정치(엘리트) 너머’를 말하며, 기존 기득권 정치와 차별화된 국민 중심 정치를 자임한다. 그는 정치권 내부 권력싸움이나 이념 대립보다 국민 삶의 문제 해결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접근은 겉으로는 반(反)엘리트적이고 탈이념적인 듯하여 포퓰리스트들이 흔히 보이는 태도와 닮았다. 실제로 책에서 장애인, 고령화 등 서민 문제를 다루며 “정치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한 것은, 자신을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로 부각시키는 포퓰리즘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윤상현의 권위주의적 경향은 그의 메시지보다는 행동 양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포퓰리즘이 현실 권력을 잡으면 종종 권위주의로 변질되곤 하는데, 윤상현의 행보에서도 그런 위험이 감지된다. 우선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 *“친박 실세”*로 불리며, 권력 유지에 유리하다면 절차와 규범을 우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6년 총선 직전, 그는 친박계 승리를 위해 당시 당대표였던 김무성을 “공천에서 떨어뜨려야 한다”고 공모하며 노골적인 욕설까지 했다. 유출된 녹취에 따르면 윤상현은 *“김무성 X자식 죽여버려”*라는 원색적 표현으로 정적을 배척하려 했고, 결국 이 파문으로 새누리당에서 탈당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자기 진영 외의 정치인을 국민의 대표로서 인정하지 않고 적대시한 행위로, 포퓰리즘의 반(反)다원주의가 극단화되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포퓰리스트들은 흔히 자신들만이 *“진정한 국민”*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파를 국민의 적으로 모는데, 윤상현 역시 내부 경쟁자인 비박계를 배신자 취급하며 정치적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한국 정치의 심각한 진영 양극화를 부채질한 요인 중 하나였다.
한국 정치에서 윤상현과 같은 친박계 메시지는 박근혜 정권 시기 포퓰리즘적 수사와 권위주의적 국정운영으로 이어졌다. 박근혜 대통령 본인도 “국민 행복시대”를 약속하며 포퓰리즘적 공약을 내걸었지만, 집권 후에는 블랙리스트 사태 등 비판세력 억압, 국정원을 통한 여론조작 시도 등 권위주의 논란이 불거졌다. 윤상현은 그 권력의 핵심에서 정무특보로 활동하며 이러한 흐름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2013년 당시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이던 채동욱 검찰총장을 겨냥해 혼외자 의혹을 제기하며 여론전에 가담했는데, 그가 근거로 댄 “혈액형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 거짓말 논란을 빚었다. 이 사건은 권력층이 가짜 정보로 공직자를 축출하려 한 사례로,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흔히 언론 플레이로 사법체계를 흔드는 행태와 맥을 같이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조직적 거짓말이 대중을 혼란에 빠뜨려 결국 민주주의 기반을 붕괴시킨다고 경고한 바 있는데, 윤상현이 가담한 검찰총장 흠집내기는 사실상의 민주적 제도에 대한 공격이었다.
요컨대 윤상현의 정치적 메시지는 대중 친화적이고 ‘국민 위한다’는 포장으로 포퓰리즘의 특징을 보였으며, 실제 그의 권력행사는 권위주의적 방식을 띠어 민주 절차와 경쟁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행태는 한국 정치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한편, 유권자들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규범보다 진영 승리를 우선시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연구에 따르면 극단적으로 분열된 유권자들은 민주 원칙을 훼손하는 정치인도 자기 편이면 용인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윤상현은 막말 파동 후 무소속 출마했음에도 지역 유권자의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고, 다시 당으로 복귀했다. 이는 유권자들의 당파적 동원이 민주주의 견제 장치를 무력화한 사례이며, 포퓰리즘 정치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여실히 보여준다.
윤상현의 책 정치 너머의 세상에서 표방된 가치들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정치에서 “소통과 공감”을 이야기하며 국민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또한 다수보다는 개인의 존엄을 중시하는 듯한 그의 철학은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 다원주의(pluralism)와 맞닿아 있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이견과 이해관계의 공존을 전제로 하며, 대의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인은 다양한 유권자의 대표로서 상호 조정과 설득에 임해야 한다. 윤상현이 말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정캇는 이러한 대의 책임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윤상현의 실제 정치 행보는 그의 주장과 상당 부분 모순되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첫째, 절차적 민주주의의 훼손이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절차에 따른 권력경쟁을 요구하지만, 윤상현은 앞서 언급한 2016년 공천 개입 사건에서 정당 내부 민주절차를 무시했다. 공천은 유권자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보장하기 위한 정당 민주주의의 중요한 절차인데, 윤상현은 특정 계파의 이익을 위해 이를 불투명하게 조종하려 했다. 그 결과 새누리당 내부의 공천 갈등이 격화되고 국민 신뢰가 추락했는데, 이는 정당정치라는 대의제 기관의 건전성을 해치는 일이었다.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로 공직 취임을 위한 진정한 경쟁을 들었는데, 윤상현의 행동은 이러한 경쟁의 공정성을 해친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막말 파동은 정치 담론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상대 정치세력을 정당한 민주주의 경쟁자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대적 대상으로 취급함으로써, 의회주의의 협력 규범을 깨뜨렸다.
둘째, 다원주의의 훼손이다. 윤상현은 책에서 “내 편 네 편 가르지 않겠다”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편(친박)에 속하지 않은 인물들을 배척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 의견의 존중과 견제와 균형 원리에 어긋난다. 특히 그가 전두환 정권의 쿠데타를 옹호하는 발언까지 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전두환의 집권은 군사 반란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민주 원칙을 철저히 짓밟은 사건인데, 윤상현은 “전두환 정신”을 긍정적으로 거론하며 내란 행위를 두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민주주의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쿠데타를 단죄하고 헌정 질서를 수호해야 함에도, 윤상현은 가족적 연을 이유로 역사적 진실마저 외면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민주주의의 법치와 헌정 질서 존중이라는 기본 원칙을 훼손하며, 유사시에 반민주적 행위를 묵인할 소지가 있음을 드러낸다.
셋째, 대의제에 대한 신뢰 훼손이다. 윤상현의 여러 논란 사건—세금 체납, 검찰총장 사찰 의혹, 수사기밀 유출 등—은 국민들로 하여금 선출직 지도자에 대한 실망과 냉소를 갖게 만들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유권자의 삶을 생각하는 정치인 코스를 밟았지만, 실제로는 권력 남용과 사익 추구의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예컨대 채동욱 혼외자 의혹 제기 사건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거짓 정보가 판명되고도 끝까지 “정보 입수 과정이 합법”이라 우기는 모습)는 정치인의 책임성 결여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는 대의민주주의의 신뢰 기반인 진실성과 책임성을 훼손하여,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환멸을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 국민은 자신의 대표가 도덕적이라고 믿고 표를 줬는데, 돌아온 것은 권모술수와 이중적 행태였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사실에 대한 합의가 무너지고 거짓이 만연하면, 시민들이 현실 파악을 못해 정치 참여가 왜곡된다고 했다. 윤상현이 연루된 여러 의혹들은 한국사회에 정치 혐오와 음모론을 퍼뜨려 건전한 민주정치 담론을 약화시켰다. 또한 후안 린츠의 분석처럼, 지도층의 반민주적 일탈은 체제 전복의 위협만이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는 민주주의 부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윤상현 개인의 행위가 즉각 민주주의 붕괴를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이 쌓여 정치 전반의 규범 약화와 편가르기 심화를 불러왔다. 이는 민주주의의 질적 저하를 의미하며, 결국 국민의 정치 혐오를 통해 권위주의적 대안이 등장할 토양을 만들 위험이 있다.
윤상현의 경우 말과 실천 사이의 괴리가 크다는 점에서, 그의 저서 내용과 실제 정치적 입장의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책에서 이상론을 펼치지만 현실에서는 권력 현실론을 따른 사례가 반복되었다. 몇 가지 대표적 모순 사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 중심” vs. 정적 공격: 윤상현은 책에서 정치의 목표를 사람 개개인의 행복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특정 인물들을 겨냥한 정치 공작을 주도했다. 김무성 대표에 대한 막말 녹취 사건이 단적인 예다. 그는 동료 정치인을 “죽여버리겠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공격했는데, 이런 행동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조차 결여한 것이다. 책에서 그가 내세운 ‘공감’과 ‘소통’의 정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태로, 정치적 이익 앞에서 인간적 가치가 뒷전이었음을 보여준다.
“진영 초월” vs. 파벌 정치: 윤상현은 자신은 편가르지 않는다고 했지만, 현실에서는 한국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친박계 핵심으로서 철저히 파벌 논리에 따라 움직였다. 그는 박근혜 계파에 속하지 않은 인사들을 공천에서 배제하고, 박근혜 정부에 우호적인 인물들을 비호하는 데 앞장섰다. 예컨대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수사를 지휘하던 채동욱 검찰총장을 사임시키는 데 윤상현이 개입했다는 의혹은 그의 진영주의를 드러낸다. 책에서 말한 *“정치 너머”*와 달리 실제로는 여의도 정치 한복판에서 편 가르기에 몰두한 모순된 모습이다.
“법과 상식” vs. 반법치 행태: 책에서 윤상현은 법치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강조한 희망과 행복은 법과 정의의 토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가치다. 그러나 그의 실제 행보는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세금을 체납하여 물의를 빚거나, 국가 기밀을 유출하는 등 법을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 쿠데타까지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 이는 헌정질서를 어긴 행위나 다름없으며, 상식과 정의에 반하는 태도다. 책에서 “사람”을 말하면서 정작 모든 사람을 위한 공정한 규칙은 무시하는 자기모순이 나타난 것이다.
“서민 존중” vs. 기득권 옹호: 정치 너머의 세상 2장은 장애인과 고령화 등 사회적 약자를 다루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윤상현 자신의 삶은 특권층과 밀착되어 왔다.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 가문과 연결되었고, 재혼으로 대재벌가(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일가)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물론 출신이나 혼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으나, 문제는 그가 사회 특권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듯한 행동을 했다는 점이다. 전두환 미납 추징금 은닉 재산과 관련해 가족들이 비판받을 때 자녀 재산 공개를 거부하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 일이나, 재벌과 가까운 관계 등은 그의 서민 대변자 이미지를 무색게 한다. 책 속에서는 약자를 말하면서 현실에서는 기득권을 비호하는 이중성이라 할 수 있다.
以上의 모순들은 윤상현의 정치적 신뢰성 결여를 보여준다. 이러한 모순적 행보 때문에 윤상현의 메시지는 진정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결과적으로 정치 혐오를 증폭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국민 입장에서는 그가 책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써놓아도 “결국 정치인은 똑같다”는 냉소를 품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표와 유권자 간 신뢰의 사회적 자본을 갉아먹는 일로, 윤상현 개인을 넘어 정치권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문제다.
윤상현의 저서 정치 너머의 세상은 그의 정치 철학을 대중에게 알리고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활용되었다. 책이 담은 희망과 공감의 메시지는 한국 정치에 대한 환멸이 큰 시기에 유권자들에게 신선함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보를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면, 이 저서는 말과 행동의 괴리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윤상현이 책에서 제시한 이상은 실제 정치현장에서 실천되지 못했고,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정치 너머의 세상이 한국 정치에 미친 장기적 영향은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이다. 겉과 속이 다른 정치인에 대한 실망을 안긴 점, 포퓰리즘적 언어가 얼마나 쉽게 권위주의적 행태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드러낸 점이 그것이다.
특히, 윤상현의 사례는 포퓰리즘의 양날의 검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친서민 언어를 구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제도와 규범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행태는 단기적으로는 정치적 성공을 가져올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민주주의의 토대를 침식하여 체제 불안정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정치학 연구가 지적하는 바다. 한국 정치는 이미 양극화와 불신이 깊은 상황인데, 윤상현 같은 행동 양식은 이를 더욱 악화시킨다. 정치 지도자들이 다원주의와 타협의 정치를 복원하지 못하고 계속 진영 결집을 위한 선동과 편가르기에 치중한다면, 민주주의의 질적 저하는 불가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윤상현의 정치적 행보는 하나의 경고 신호라고 할 수 있다.
향후 한국 정치에서 윤상현과 같은 모순적 포퓰리스트들의 영향력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망해볼 수 있다. 첫째, 부정적 피드백을 통해 정치 혁신의 요구가 커질 가능성이다. 유권자들은 결국 말뿐인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행동까지 일치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을 수 있다. 둘째, 반대로 정치 냉소의 확산으로 유사한 인물이 계속 등장할 가능성이다. 만약 유권자들이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라며 냉소할 경우, 검증되지 않은 선동가형 정치인이 더 득세하여 민주주의에 도전할 수 있다. 이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한다. 한국 정치의 장기적 전망은 결국 유권자들의 집단학습과 정치권의 변화 의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윤상현의 사례는 정치인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민주주의 기본 원칙—다원주의, 법치, 절차적 정의—을 수호하려는 노력이 정치인 개개인의 수준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보여준 이상, 이를 교훈 삼아 보다 성숙한 정치문화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