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의 책 『왜 지금 공존과 상생인가?』에 대한 정치학적 비판 분석
서론: 공존과 상생의 정치 수사와 현실 사이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은 한국 보수정치 진영에서 **“공존과 상생”**을 기치로 내세운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2016년 저서 **『왜 지금 공존과 상생인가?』**를 통해 rapid 성장 이후의 한국 사회에 필요한 협력과 조화의 가치를 역설했으며, 정치 행보에서도 “약자와의 동행” 등을 강조해왔다 . 이러한 수사는 표면적으로는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려는 진정성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실제 정치 전략과 정책은 이 수사와 일치했을까? 본 글은 오세훈의 정치 경력 전반—특히 서울시장 재임 시기의 행보와 대중 선동적 요소—및 저서의 핵심 논지를 정치학 이론의 틀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마키아벨리, 슘페터, 한나 아렌트, 로버트 달, 후안 린츠 등의 시각을 적용하여, 오세훈 정치의 포퓰리즘적 성격, 권위주의 경향, 정당정치 맥락, 양극화와 극단주의 요소, 그리고 민주주의 후퇴 위험성을 평가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공존과 상생”*이라는 구호의 실질적 의미와 실행 가능성을 검토하며, 그 담론이 특정 계층에 편향되어 있지는 않은지, 정치 레토릭과 정책 간 괴리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민주주의 가치와 충돌하지 않는지 비판의 초점을 맞춘다.
오세훈의 정치 행로 개관: 개혁적 보수에서 극우 포퓰리즘까지?
1) 초기 경력과 개혁보수 이미지: 오세훈은 2000년 국회 입문 후 한나라당 소장개혁파로 두각을 나타냈다. 2004년 안풍 사건 등 당내 부정부패 논란 시 당자산 매각으로 정치자금 추징금을 갚자고 제안하고, 5공 청산 및 동반 퇴진을 주장하며 스스로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등 참신한 결단으로 주목받았다 . 이른바 *“오세훈 법”*이라 불린 정치자금법 개정(기업 정치후원 금지)을 주도하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소장파들과 반대 서명하는 등 (표결에는 참여했지만) 원칙 있는 행보도 보였다 . 이러한 행동들은 마키아벨리적 관점에서 **지도자의 덕목(virtù)**을 대중에게 인식시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그는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으로까지 선정될 정도로 청렴성과 개혁성을 부각시켰고 , 이는 국민에게 도덕적 위상을 구축하려는 노력으로 해석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도덕적 명성을 갖추는 것이 통치에 유용하다고 조언했는데, 오세훈은 초반에 이러한 덕목의 외양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경고하듯 정치에서는 겉모습과 실질이 다를 수 있고, 결국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비덕목적인 행동도 불사해야 할 때가 온다 . 오세훈의 이후 행보는 이러한 마키아벨리적 통찰과 궤를 같이하는 변화들을 보여준다.
2) 서울시장 재임과 갈등의 극대화: 2006년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된 오세훈은 **“디자인 서울”과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한강 르네상스 등)를 추진하며 도시경쟁력 제고에 힘썼다 . 한편으로 도시 균형 발전과 복지 분야에서도 몇몇 혁신을 시도했는데, 예컨대 장기전세주택 공급(시프트) 등은 중산층 주거 안정을 도모한 정책으로 평가되었다 .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12기 시정은 경제성장과 도시미화에 방점이 있었고, 보편적 복지 확대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20102011년 무상급식 논쟁에서 극명히 드러났다. 당시 다수야당이 초등학생 전면 무상급식을 추진하자, 오세훈은 “선별 복지” 기조를 고수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시의회를 거부하고 **주민투표(2011년)**를 전격 제안하여, 자신의 시장직까지 걸고 이 문제를 대중의 심판에 부쳤다 . 오세훈은 이 주민투표를 **“망국적 포퓰리즘”**에 맞서 민주주의의 방향을 정립하는 역사적 선택으로 규정하며, *“대중영합주의 정치를 넘어서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이는 **포퓰리즘(populism)**에 대한 명시적 거부로서, 자신이 책임 있는 보수의 입장에 서 있음을 표명한 것이다. 슘페터의 민주주의 이론에 따르면 현대 정치인은 “인민의 표를 얻기 위한 경쟁적 투쟁” 속에서 권력을 획득하는 존재이며 , 유권자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도 권력 쟁취 수단으로 활용된다. 오세훈은 무상급식을 “표를 얻기 위한 인기영합”으로 간주하고 이를 배격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비(非)포퓰리스트적 리더임을 차별화하려 한 것이다. 이는 마키아벨리가 말한 **“독이 될 선행”**을 거부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과도한 관대함(예컨대 재정을 소모시키는 시혜)**을 베풀면 훗날 통치에 해가 된다고 경고했는데, 오세훈이 무상급식 보편지원을 거부한 태도는 재정 부담과 도덕적 해이를 우려한 결단으로 해석될 수 있다 (Machiavelli, 1532/2010).
그러나 주민투표의 결과는 오세훈의 정치적 패착으로 끝났다. 투표율 미달로 개표조차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그의 구상은 무산되었고, 그는 공언대로 시장직을 사퇴하였다 . 이 사건은 오세훈 정치의 양면성을 드러냈다. 한편으로 그는 정치적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력(“승부사 기질”)을 보였지만 , 다른 한편으로는 대의제 절차를 우회하고 정책을 사활을 건 정치 투쟁화함으로써 심각한 분열을 초래했다.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 기준으로 볼 때, 이 행동은 **“의제 설정에 대한 구성원들의 통제”**라는 민주 절차를 위협한 면이 있다 . 시의회 다수가 결정한 정책을 행정수가 거부하고 직접 시민투표로 뒤집으려 한 것은, 민주적 제도(대표기관)를 경시하고 플레비사이트적 정당성을 호소한 셈이다. 이는 후안 린츠가 민주주의 위기 상황에서 경고한 바와 유사하다. 린츠에 따르면 민주체제 붕괴의 징후 중 하나는 선출직 지도자가 의회를 “무용지물” 취급하며 직접 국민에게 호소하는 행태인데, 오세훈의 주민투표 강행은 비록 지방 수준이지만 그러한 권위주의적 충동을 엿보였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다행히 그는 투표 실패 후 법과 약속에 따라 퇴진함으로써 사태를 마무리 지었지만, 이 과정에서 서울 시민사회는 극심한 진영 대립과 양극화를 경험했다. 오세훈 스스로도 “험난해도 이번 투표로 복지 방향을 정립하지 않으면 미래가 주저앉을 수 있다”며 사활을 걸었던 만큼 , 그의 정치가 협력보다는 대결과 선동으로 치달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공존과 상생”*과는 거리가 먼, 제로섬 정치의 양상이다. 결국 그는 권력을 잃었고,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통치자의 신중함(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때만 대담한 행동을 하라는 조언)을 어긴 셈이 되었다. 이처럼 원칙 고수와 도박적 승부 사이에서 보여준 오세훈의 행보는 이후 그의 정치노선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3) 정치적 휴지기와 “공존·상생” 담론의 부상: 2011년 자진 사퇴 이후 한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던 오세훈은, 이 시기를 사색과 준비의 기간으로 삼았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 활동을 하며 자신의 정치철학을 다듬었고, 이를 바탕으로 몇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 그 중 2016년 출간된 **『왜 지금 공존과 상생인가?』**는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상생 해법을 담은 책으로서, 오세훈 사상의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 책의 목차를 보면, “‘한강의 기적’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 “어떻게 돕는 것이 잘 돕는 것인가?”, “공생의 정신,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문화의 힘으로 새로운 도약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이는 그가 압축성장의 그늘(불평등, 양극화)을 성찰하고, 효과적인 복지와 나눔의 방식, 상생의 철학 구현, 문화적 가치의 역할 등을 고심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오세훈은 이 시기 **“공생(共生) 연구소”**라는 싱크탱크를 운영하며 사회 양극화와 빈부격차 대물림 문제를 연구했다고 밝힌 바 있다 .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의 최대 문제점은 빈부 격차의 대물림과 양극화의 심화”*라고 진단하고, 공존과 상생의 가치야말로 이를 해소할 비전임을 역설했다 . 이런 인식 변화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공적 세계에 대한 성찰”**로 볼 수 있다. 아렌트는 《혁명론》 등에서 정치공동체가 **사회문제(빈곤 등)**를 직시하지 않으면 자유도 위태로워진다고 지적했는데, 오세훈 역시 경제 발전 이면의 사회 문제를 인정하고 담론화한 것이다.
다만 오세훈의 상생 담론은 보수주의적 맥락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는 시장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결합하려 시도했는데, 예컨대 어떻게 돕는 것이 잘 돕는 것인가? 챕터에서 시혜적 복지의 한계와 지속가능한 지원을 강조하며, *“우리 안에 잠든 나눔의 정신을 깨우자”*는 식으로 자발적 나눔과 민간협력을 역설했다 . 이는 국가주도 복지 대신 개인과 사회의 책임 분담을 중시하는 보수적 접근이다. 정치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민주주의관을 빌리자면, 오세훈은 시민을 *“소비자”*이자 *“협력자”*로 보고 정치 상품(정책)을 제시한 셈이다 . 슘페터에 따르면 정치인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책 상품을 조정하는데 , 오세훈은 과거 선별복지 노선이 외면받은 후 ‘공존·상생’이라는 개선된 상품으로 자신의 이념을 리패키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노선 수정은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 **시대와 행운에 따른 유연한 대응(virtù)**이다. 즉, 한 번 권좌에서 밀려난 그는 대중의 정서와 시대 요구를 재학습하여, 보다 포괄적이고 온정적 이미지를 띤 슬로건으로 복귀를 도모했다. 2016년 말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 등으로 보수진영이 위기를 겪을 때, 그는 보수의 재정립을 위해 “공존과 상생의 보수”, “국민을 위한 개헌” 등을 제창하며 미래 비전을 제시하려 애썼다 . 이는 정당정치 차원에서 자신의 입지를 새로 구축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오세훈은 과거 박근혜계 등 강경보수와 일정 거리를 둔 합리적 보수 이미지를 강조하여, 향후 당내 경쟁에서 차별화를 노렸다. 후안 린츠의 연구를 보면, 민주 체제 내 보수 정당의 생존은 유연한 개혁과 광범위한 지지 연합에 달려있다고 한다 (Linz & Stepan, 1996). 오세훈의 상생 담론은 이러한 맥락에서 보수정치를 폭넓게 재편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4) 권력 복귀와 정치 전략의 양면성: 2021년 4월 보궐선거를 통해 오세훈은 10년 만에 서울시장에 복귀했다. 그의 당선은 문재인 정부 중반기 부동산 정책 실패 등에 대한 서울 민심의 반작용으로 평가되며, 보수진영의 재기 신호탄이 되었다 . 오세훈은 선거 과정에서 야권 단일후보로서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와 공조하였는데, *“당선되면 안철수와 서울시를 공동 경영하겠다”*고 공언하며 보수-중도 연합의 모범을 보이겠다고 약속했다 . 그는 유세 연설에서 *“젊은이들이 보고 싶어하는 정치는 통합과 화합의 정치지만, 우리 정치는 지긋지긋하게 분열의 정캇*라며 자신과 안철수가 통합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 이러한 행보는 극심한 당파대립의 완화를 염원하는 유권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어필했고, “공존·상생” 슬로건과도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선거기간 LH 투기 사태 등 현안 비판을 자제하고 “성장보다는 성숙”, “가치의 도시 서울” 등 추상적 가치를 강조하며 희망적 비전을 제시했다 . 표면적으로 이는 포퓰리즘적 선동보다는 미래지향적 담론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오세훈의 선거 전략에는 여전히 대중영합과 분열 조장의 요소가 혼재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먹고사는 걱정을 하는 나라로 추락했다”*며 현 정부를 실패로 규정하고, 정권교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 또 민주당의 조직력을 경계하라며 지지층의 위기감을 부추기는 언사도 동원했다 . 이는 고전적 포퓰리즘 수사인 *“나라가 망하고 있다”*는 위기담론과 맥을 같이한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운동이 팩트를 선전도구로 왜곡하여 군중을 동원한다고 분석했는데 (Arendt, 1951), 오세훈의 경우 물론 전체주의적이라 할 수는 없으나 상생의 가치 담론 뒤에 여전히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비난과 공포 조성이 공존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그는 통합을 말하면서도 선거 국면에서는 상대를 “망국적”으로 낙인찍는 이중성을 보였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는 ‘문제’인 정부”*라는 안철수의 독설에 편승하며 진영결집을 도모한 장면은 , 통합의 언어가 얼마나 빠르게 분열의 언어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마키아벨리가 말한 “여우와 사자” 전략 – 때로는 온건한 여우처럼, 때로는 사자처럼 포악하게 행동하는 – 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오세훈은 유권자 앞에서는 화합의 여우처럼 행세하다가도, 권력 쟁취를 위해서는 공격의 사자로 변모하는 실용적 두 얼굴을 지닌 정치인이라 평가될 수 있다. 슘페터식으로 보면 이는 유권자 시장에서의 포지셔닝 변화일 뿐이다; 즉, 소비자인 유권자의 다수를 얻기 위해 캠페인 메시지를 부드럽게 하지만, 경쟁자인 상대 정당을 깎아내리는 전략은 여전히 병행하는 모습이다 .
오세훈의 2021년 이후 시정 운영도 이러한 양면성을 드러낸다. 그는 재취임 후 **“약자와의 동행”**을 시정 철학으로 표방하며, 안심소득, 서울런(취약계층 교육 지원), **주택정책(모델하우스형 반값아파트인 ‘상생주택’ 등)**을 추진했다 . 안심소득은 일정 소득 이하 가구에 부족분의 절반을 현금 지원하는 부분 기본소득(negative income tax) 개념으로, 근로를 해도 혜택이 줄어들지 않아 “일할수록 더 받는” 구조라 홍보되었다 . 오세훈은 이를 *“전 세계가 주목하는 첨단복지 실험”*이라 칭하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 실제로 안심소득은 **기존 복지의 함정(일하면 복지혜택이 끊기는 현상)**을 개선하려는 실험으로서, 보수진영의 복지담론 혁신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는 이를 두고 *“공존과 상생을 평생 정치목표로 삼아 왔는데, 안심소득이 그 결실”*이라고까지 언급했다 . 이러한 정책들은 오세훈이 과거 무상급식 논쟁 이후 학습한 교훈—무조건적 복지 반대만으로는 민심을 얻기 어렵다는 점—을 반영한, 보다 온건하고 유연한 보수정책으로 볼 수 있다. 로버트 달이 강조한 포용성과 합의 형성 측면에서 볼 때, 안심소득 등은 상대 진영의 복지 가치 일부를 수용해 새로운 합의지대를 모색한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 이것은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이 말한 “정책적 수렴” 현상으로, 선거에서 패배한 보수정당이 생존을 위해 일부 진보의제를 흡수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세훈이 내세운 **“약자와의 동행”**이 실제로 광범위한 사회적 연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그의 복지정책들은 제한적 규모의 시범사업에 그치거나 엄격한 재정건전성 테두리 내에 있다. 안심소득은 3년간 500가구 대상 실험일 뿐이고 , 향후 전국 확대에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나 그에 대한 로드맵은 불투명하다. 또한 오세훈은 보편적 복지에 대해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2022~2023년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야당대표가 제안한 각종 현금지원 정책을 그는 공개적으로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 규정하며 비판했다 . 예컨대 2021년 코로나19 재난지원금 전국민 지급 논쟁 때 *“25만원 살포는 이재명식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했고 , 2023년 난방비 급등 사태 때는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요금 동결정책을 *“포퓰리즘으로 가격을 인위적으로 눌러둔 탓에 발생한 폭등”*이라며 전임 정권을 향해 사과를 요구했다 . 이처럼 그는 경제위기 원인을 전임 진보정부의 “포퓰리즘”으로 환원하여 비난함으로써, 정책 실패의 복잡한 구조를 정파적 프레임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나 아렌트는 *“진실성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거짓은 정치의 정당한 도구로 여겨져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 물론 오세훈의 주장이 모두 거짓은 아니지만, 그가 인과관계를 선택적으로 강조하고 정치적 책임을 일방에 전가하는 화법은 복잡한 현실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할 위험이 있다. 난방비 문제의 경우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과 한국전력의 구조적 난맥 등 다층적 요인이 있음에도, 오세훈은 이를 단순히 *“문재인 정부 포퓰리즘 탓”*으로 몰아갔다 . 그러면서도 자신의 시정에서는 취약계층 난방비 지원, 노숙인 보호, 단열재 교체 등의 한정적 조치를 강조하여 *“나는 즉각 대처한다”*는 이미지를 부각했다 . 이는 시민의 불만을 이전 정권에 투사하면서, 제한된 구제를 베푸는 시혜적 정치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바, 군주는 잔인함마저도 백성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행사해야 한다고 했는데, 오세훈은 **가혹한 긴축(보편지원 반대)**조차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 정치로 포장하고, 선심성 지원은 자신의 도덕적 선의로 내세우는 전략을 사용한다. 이러한 이미지 정치는 슘페터가 경고한 민주주의의 한계와 맞닿아 있다. 슘페터는 대중이 정치 이슈에 대해 합리적 판단을 내리기 어렵고 지도자에 쉽게 영향받는다고 보았는데, 정치인은 이를 이용해 마케팅 기법으로 표를 얻으려 한다 . 오세훈이 공존과 상생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유리한 이슈 프레임을 설정해 대중정서를 움직이는 모습은, 과학적 여론관리와 선전에 능했던 현대 포퓰리스트들과 통한다. 이는 민주주의가 **숙의(deliberation)**보다 경쟁적 선동으로 흘러갈 위험을 보여준다.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의 이상적 조건 중 하나로 **“정책 대안과 결과에 대해 시민이 충분히 알고 이해할 기회(계몽된 이해)”**를 꼽았지만 , 오세훈의 정치 담론은 유권자가 대안적 관점을 깊이 숙고하기보다는 단순한 도식(책임 있는 보수 vs 무모한 포퓰리즘) 속에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상호이해의 공간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정치학적 프레임워크를 통한 분석
포퓰리즘과 대중 선동: **“안티-포퓰리즘”**도 하나의 포퓰리즘인가?
오세훈의 정치에서 가장 흥미로운 역설은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포퓰리즘의 모습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망국적 포퓰리즘”**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자신과 보수진영을 반(反)포퓰리즘의 수호자로 위치지웠다 . 그러나 이러한 규정 자체가 일종의 포퓰리즘적 담론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포퓰리즘은 일반적으로 엘리트 대 대중 또는 선량한 국민 대 부패한 기득권의 이분법적 구도를 그리며, 감정적 호소로 지지자를 결집하는 정치 전략을 뜻한다 (Mudde, 2004). 오세훈은 좌파 진영의 복지 확대나 현금 살포 정책을 모두 “대중영합”, **“무책임”**으로 싸잡아 비난함으로써, 자신과 상대 진영을 도덕적 차원에서 구분했다. 그는 보수를 “미래 세대를 생각하는 책임 세력”, 진보를 *“당장 표를 위해 나라 재정을 해치는 포퓰리스트”*로 그린다 . 이러한 이분법은 결국 **“이성적 국민 vs 선동당한 국민”**의 구도를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즉, 무상복지나 재난지원금을 지지하는 다수 시민은 오세훈 눈에 단기적 이익에 끌린 군중이며, 긴 안목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국민은 그의 편에 서야 한다는 논리다. 이처럼 국민을 둘로 나눠 자기편만 참된 국민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야스차 뭉크 등이 지적한 포퓰리즘의 배타적 국민주권관과 닮아 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대중의 불안과 좌절감이 선동가에 의해 *“한 덩어리의 군중”*으로 조직될 때 정치가 위험해진다고 했다. 오세훈은 좌파의 포퓰리즘이 그런 위험을 불러온다고 경고하지만, 정작 자신도 **대중의 불만(증세에 대한 거부감, 복지 남용 우려 등)**을 결집시켜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포퓰리즘을 펼쳤다고 볼 수 있다. 그의 2011년 주민투표 캠페인은 **“무상복지 = 세금 낭비”**라는 정서에 호소했고, 2022년 지방선거 등에서 강조한 *“현금살포 복지에 나라가 거덜난다”*는 메시지는 중산층 유권자의 불안감을 동원하는 수사였다 . 결과적으로 오세훈은 포퓰리즘에 반대한다는 구실로 새로운 형태의 포퓰리즘을 구사한 셈이다. 이 점에서 그는 슘페터적 의미의 정치 기업가로 비쳐진다 – 유권자라는 시장에서 상대의 인기상품(보편복지)을 공격하면서, 자신은 **대안상품(선별복지와 재정건전성)**을 마케팅하는 기업가적 정치인 . 슘페터는 민주주의를 지도자 간 경쟁 시장으로 묘사하며, 이 과정에서 유권자의 합리성은 제한적이라고 보았다. 오세훈의 사례는 유권자들이 포퓰리즘 vs 안티포퓰리즘의 극단적 구도 속에서 본질적 정책 내용을 면밀히 따지기보다, 정파적 내러티브에 따라 움직이게 됨을 보여준다. 이는 담론의 양극화를 심화시켜, 정작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에 대한 실용적 해법 모색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예컨대 무상급식 논쟁 이후 오랫동안 한국에선 보편 vs 선별 복지 이분법이 정치쟁점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두 접근의 조합과 조정이 필요하다는 실무적 논의는 뒷전이었다. 오세훈은 이 이분법 구도의 형성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의 “반(反)포퓰리즘” 투사는 역설적으로 한국 정치의 포퓰리즘적 양상(적대적 대립 구도)을 강화한 측면이 있으며, 이로 인해 정치 담론이 분노와 경멸의 정서에 휘둘리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권위주의 경향과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
오세훈 개인은 전통적 의미에서 권위주의 정치인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그는 자유선거로 선출되었고, 임기 내 법치와 절차를 대체로 준수했으며, 노골적으로 민주 제도를 부정한 적은 없다. 오히려 2024년 말 윤석열 대통령이 (가상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오세훈은 이를 *“민주주의 규범에 어긋난다”*며 내각과 함께 강력히 비판했다고 전해진다 .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는 헌정 질서와 규범 수호 측면에서 원칙을 지킨 *“제도적 보수”*로 볼 수 있다 . 실제로 오세훈은 2004년 탄핵소추국면에서도 당론에 반해 탄핵에 서명하지 않는 등, 권력투쟁보다 민주주의의 안정을 우선시하려 애쓴 이력이 있다 . 이러한 면모는 린츠가 말한 **“충성적 반대자(loyal opposition)”**의 덕목과 닿아 있으며, 그를 체제내 개혁가로 평가할 여지를 준다.
그러나 오세훈 정치의 몇몇 측면은 권위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한다. 첫째, 앞서 언급한 주민투표 정치는 대표자 상호간 권력 분점과 타협의 민주문화를 약화시켰다. 린츠에 따르면 민주 안정에는 **“우리는 적이 아니라 경쟁자”**라는 인식, 즉 상호 존중과 자제의 정치문화가 필수적인데, 오세훈은 시의회의 결정을 **“횡포”**로 몰아붙이고 자신의 권위를 직접 대중에게 재신임 받으려 했다 . 이는 대의민주제에 대한 도전이자 개인 통치자에 대한 대중의 직접 충성을 구하는 행동으로서,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의 단초가 될 수 있다. 비록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만일 성공했더라면 **“지도자가 옳다고 믿는다면 의회 다수결도 뒤집을 수 있다”**는 위험한 선례가 될 뻔했다. 현대 민주주의 이론에서는 이런 플레비사이트적 리더십을 경계하는데, 이는 국민적 인기와 권위를 등에 업은 지도자가 입법부나 사법부를 무시하고 독주할 가능성을 열기 때문이다 (Linz, 1978). 오세훈은 이후 이런 직접민주 방식을 쓰지 않았지만, 정책 결정에서 협치보다는 일방향 소통을 선호하는 경향은 남아있다. 예컨대 2021년 복귀 후 그는 여소야대였던 서울시의회와 마찰을 빚기보다, 중앙정부 및 당정 협의로 시정 주요 사업을 추진하는 데 주력했고, 2022년 지방선거로 시의회까지 여당이 장악한 뒤에는 사실상 일당 지배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시정 견제가 약화되고 오세훈의 구상이 큰 반대 없이 관철되는 구조가 되었다. 달은 민주주의에서 **“독립적 조직 및 반대 세력의 존재”**를 중요시하는데 , 현재 서울시정은 시의회, 시민단체 등에서 과거보다 비판이 위축된 상태다. 오세훈이 4선 시장이라는 무게감으로 시 공무원 사회와 여론을 장악하고 있어 내부 견제도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이는 민주적 대화와 조정보다는 행정적 권위로 시정을 이끄는 모습으로, 민주주의보다는 효율성에 비중을 두는 통치철학의 반영일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질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두려움과 강압도 정당화된다”**는 입장이었는데, 오세훈도 시정을 운영함에 있어 공존을 말하면서도 실제 결정구조는 탑다운으로 흘러가는 경향을 보인다.
둘째,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적 태도는 권위주의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오세훈은 “공존과 상생”을 외치지만, 그 테두리에 모든 사회집단이 포함되는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그의 젠더 이슈 대응은 논쟁적이다. 2009년 첫 임기 때 여성안전을 위해 도입했던 **‘여성 우선 주차장’**을, 2022년에는 **‘가족배려 주차장’**으로 개편·폐지하였다 . 그는 저출산 문제 해결과 남성 역차별 논란 해소를 명분으로 들었지만, 실제로는 보수 성향 남성들의 반발을 수용한 결정으로 해석되었다. 이는 보수진영 일부가 주도한 안티페미니즘 흐름에 편승한 조치로, 여성계의 반발을 샀다. 결과적으로 오세훈은 젠더 갈등 국면에서 한쪽 편을 들어줌으로써, 공존 담론의 보편성에 의구심을 남겼다. 공존이라는 가치가 성별이나 소수자 인권 영역에서는 후퇴한 것이다. 이는 다수파의 문화적 보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소수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권위주의적 민족(또는 가족)주의의 한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인민 다수의 지지를 유지해야 안전하다고 했는데, 오세훈은 젊은 남성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여성친화 정책을 희생한 면이 있다. 한나 아렌트는 **“사실의 진위보다는 동조자의 수”**가 진실을 결정짓는 위험을 경고했는데, 오세훈의 이 결정은 정의나 형평성의 원칙보다 다수 남성의 여론을 앞세운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마찬가지로, 서울시 청사 앞 광장 사용을 두고 보수단체와 진보단체(예: 퀴어문화축제 조직위 등) 간 갈등이 있을 때, 시 정부가 친정부 보수단체에 유리하게 편의를 준 일도 거론된다. 이러한 사례들은 오세훈이 표방하는 ‘공존’이 과연 누구와 누구의 공존인지를 묻게 만든다. 혹자는 그의 공존이란 중도·보수 성향의 시민들끼리의 조화일 뿐, 급진적 목소리나 소수 집단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배제는 민주주의의 포용 원칙에 어긋난다. 달은 민주주의가 성인 시민의 거의 전부를 정치 과정에 포함시킬 때 완성된다고 했는데 , 오세훈의 정치에서는 특정 이념·계층·집단은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이는 권위주의적 국민통합 관점에 가깝다 (국민을 하나로 통합한다면서 비판세력은 배제하는 방식).
셋째, 정당민주주의에 대한 기여와 훼손 측면 모두가 보인다. 오세훈은 국민의힘(한나라당)의 중도개혁파 계보를 계승하며 당내 민주적 다양성을 높였다는 평가가 있다 . 당이 과거 극우적 경향으로 치우칠 때 그는 균형을 잡는 역할을 했고, 실제로 2023년 말 당내 권력투쟁 속에서도 “더 큰 국민 통합”, *“연대”*를 강조하며 강경일변도의 일부 지도부와 선을 그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정치적 입신 과정에서 당내 민주주의가 훼손된 일도 있다. 2021년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그는 안철수 후보와의 TV토론에서 사실과 다른 발언(내곡동 땅 의혹 관련)을 했다가 논란을 겪었고, 당 경선에서도 경쟁자인 나경원 전 의원 측과 신경전이 치열했다. 이후 당선된 뒤에는 안철수와의 공동경영 약속이 흐지부지되면서 권력 공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는 정당 및 연합 파트너에 대한 신뢰 훼손으로, 권위주의적 권력독점 욕구의 발현으로 읽힐 수 있다. 린츠는 **“자신만이 국민의 온전한 대표”**라고 믿는 정치인을 경계했는데, 오세훈이 서울시정에서 보여준 *“내가 책임진다”*식 리더십은 때때로 그 한계를 드러냈다. 특히 4선이라는 전무후무한 경력으로 인해, 당내에서는 *“오세훈 밖에 대안이 없다”*는 식의 개인우상화 기류도 감지된다 . 민주정에서는 특정 인물에 과도한 권력과 영광이 집중될 때, 조직과 제도의 견제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 서울시와 국민의힘 모두 포스트 오세훈을 준비하기보다는 그의 향후 대권 행보에 편승하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이러한 일인지배적 경향은 민주주의 건강성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종합하면, 오세훈은 제도적 민주주의의 룰을 대체로 준수하는 정치인이지만, 권위주의적 통치 기술—직접민주주의의 도구화, 다수 여론에 영합한 소수자 배제, 개인 권위의 강화—을 부분적으로 활용해온 인물이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흔히 나타나는 하이브리드 형태라 할 수 있다. 겉으로는 민주적 정당성과 절차를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강력한 지도력과 일방향적 정책 추진을 선호하는 것이다. 이러한 리더십은 안정과 성과를 내기 쉬우나, 민주주의의 참여적·숙의적 측면을 잠식할 우려가 있다.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시민의 적극적 참여와 토론이 필수라고 했는데 , 오세훈 시대의 서울은 시장의 비전에 동의하거나 침묵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가 진정 바라는 *“성숙한 가치의 도시”*란 복종과 조화를 통한 질서인지, 다양성의 공존을 통한 활력인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는다. 만약 전자라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와 상충될 수밖에 없다.
정당정치와 양극화: 보수정당 내 입지와 한국 정치 분열의 연장선
오세훈의 행보는 정당정치의 역학 속에서도 조망해야 한다. 그는 일관되게 보수정당에 몸담아왔지만, 당내 계파와 노선 변화에 따라 여러 번 위상 변동을 겪었다. 이력 초반 그는 친이회창계로 시작해 개혁파로서 5공 청산을 외쳤고, 박근혜 비대위 시절엔 박근혜계와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2011년 사퇴 후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사실상 야인이었으며, 2016년 총선 때 잠시 복귀 시도를 했으나 당내 기반 미흡으로 공천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2020년 총선에서 황교안 대표 체제 아래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낙선하는 등, 보수정당 주류와 호흡이 완전히 맞지는 않았다 . 그러다 2021년 보선에서 김종인 비대위의 지원과 안철수와의 단일화로 극적으로 귀환하면서, 그는 단숨에 당의 간판스타로 부상했다.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 승리 후,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 그리고 이준석 당시 대표까지 여러 축의 권력이 존재하는 구도가 되었다. 오세훈은 이 중 비윤(非尹)계 잠룡으로 분류되면서도, 공개적으로는 윤 대통령과 협조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는 당내 권력 지형 속 실용적 처신으로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분열된 궁정 내에서 살아남으려면 겉으로는 충성, 속으로는 기회 포착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는데, 오세훈은 당장의 충돌을 피해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실제로 2023년 이준석 대표 축출 등 친윤계 강경행보에 대해 그는 직접 맞서기보다는,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야당도 인정하고 상생정치 해야” 한다는 원론적 발언만 하며 거리를 두었다 . 이는 당내 주류와 불필요한 대립을 피하면서 중도층 호감도를 지키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당 외연 확장을 위해 “네거티브보다는 미래비전을”, *“민생 우선”*을 주장함으로써 윤석열 정부의 거친 이미지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이런 행보는 정당정치 이론에서 말하는 중도투표자 공략 전략과 합치된다 (Downs, 1957). 즉 보수 핵심지지층은 이미 확보되었으니, 승리를 위해선 중도층을 잡아야 한다는 계산이다. 오세훈 본인은 서울이라는 대도시 표심, 특히 청년층과 중도층이 원하는 실용적이고 유연한 보수상을 구현하려 애쓴다. 그의 약자와의 동행 정책들이나, 문화도시·스마트행정 담론 등은 모두 이념 색채를 줄이고 실용성을 강조한 것들이다.
하지만 정당정치의 측면에서 볼 때, 오세훈은 보수진영 내 양극화에도 일조했다. 그는 유승민, 안철수 등 다른 온건 보수 인사들과 연대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이 그 공간을 독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2021년 안철수와의 동행은 현실화되지 않았고, 2022년 지방선거에서는 아예 안철수 대신 본인이 서울시장에 출마하여 압승함으로써 중도보수 공간의 지배자로 올라섰다. 이는 정당 내부 다원성의 감소를 의미한다. 로버트 달은 미국정치 연구에서 다양한 엘리트들의 경쟁과 타협이 민주주의에 유익하다고 했는데 , 한국 보수정당에서 현재 오세훈-윤석열 양강 구도로 좁혀진 것은 오히려 엘리트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두 그룹 모두 강성 지지층을 거느리며 당을 이끌고, 서로 미묘한 견제를 하는 구도는 내부 균열을 내포한다. 특히 윤석열계는 강경보수 노선을, 오세훈은 좀 더 온건 노선을 상징하게 되면서 당내에도 이념 스펙트럼의 양극단이 생겼다. 만약 향후 당권·대권 경쟁에서 이 둘이 충돌한다면, 국민의힘은 또 다시 내홍과 분열을 겪을 수 있다. 오세훈은 이를 피하려 대선 조기실시설 등에서 자기 언급을 자제하지만, 주변에서는 이미 그를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하고 있다 . 이는 불가피하게 권력투쟁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 당장의 당내 상황을 떠나, 오세훈의 정치스타일 자체가 정략적 양극화 이용을 내포한다. 그는 필요시 통합을 말하지만, 선거국면에서는 누구보다 날카롭게 진영대결을 구사해왔다. 이런 이중전략은 궁극적으로 한국의 **정치적 양극화(polarization)**를 해소하기보다는 관리하거나 활용하는 데 가깝다. 최근 학계에서는 양극화가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주요인임을 지적한다 (예: Levitsky & Ziblatt, 2018). 특히 상대 진영을 *적(敵)*으로 간주하고 상호 혐오하는 정치는 민주주의 후퇴를 초래한다. 오세훈은 겉으로 *“분열의 정치 지겹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상대를 불신하고 자기 편만 옳다고 여기는 정파성을 버리지 못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 위기를 지속시키는 한 요소다. 그의 책에서 말한 공존이 진정하려면, 최소한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관용과 협력의 제도화가 필요한데, 서울시정이나 당 운영에서 그런 움직임은 부족하다. 물론 오세훈은 문재인 정부 시절 여당 시장이던 박원순과 달리 중앙정부와 관계가 반대다 보니, 정부-서울시 갈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서울시를 발판으로 야당(민주당)과 대립각을 세우며 자신의 존재감을 보였고, 민주당 역시 오세훈을 차기 유력 보수주자로 공격하면서 정치 투쟁의 소재로 삼았다. 예컨대 2023년 국정감사 등에서 민주당은 오세훈 시정을 두고 **“격차 심화, 보여주기식 행정”**이라고 혹평했고, 국민의힘은 이를 *“발목잡기”*라고 맞서는 등, 협치는 실종되고 상호 비난만 난무했다. 이는 결국 시민의 삶보다는 정치공방이 우선시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오세훈이 *“상생의 특별시”*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 정치권의 상생부터 이루지 못한다면 그 비전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극단주의 정치와 민주주의의 후퇴 위험
**극단주의(extremism)**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다원주의, 관용, 법치 등)을 부정하거나 폭력적인 수단을 용인하는 정치행태를 의미한다. 오세훈 본인에게 극단주의자 딱지를 붙이는 것은 과도할 수 있다. 그는 합법적 틀 내에서 경쟁해왔고, 폭력이나 불법을 선동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환경과 수사는 극단주의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우선, 한국 보수진영의 극우화 흐름에서 오세훈도 자유롭지 못하다. 2019~2020년 문재인 정부에 반대하며 등장한 극우 담론 (예: 반공주의 재부상, 음모론적 태극기 부대 등)에 대해, 그는 공개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선을 긋지도 않았다. 오히려 2021년 보선 국면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했던 보수층과 화해하는 자세를 취했다. 자신이 탄핵에 반대 서명까지 했던 이력이 있음에도, 탄핵 반대 태극기세력을 포용하려 노력한 것은 극우와 온건보수의 연대를 용인한 것이다. 이는 전략적 모호성으로 볼 수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극우 담론이 보수진영 주류에 스며드는 것을 방조한 셈이다.
또한 오세훈의 일부 정책과 언사는 극우적 내러티브를 받아들인 면이 있다. 특히 반북(反北) 안보관이나 반공주의 프레임이 그것이다. 그는 시장으로 복귀한 후 서울시 차원의 대북전단 살포 단체 지원, 탈북자 지원 강화 등 보수층이 민감해하는 대북 이슈에 발언권을 행사했다. 한 번은 진보 교육감이 추진한 평화통일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이념 편향”*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태도는 극우까지는 아니어도 보수 진영의 강경파 정서에 부합한다. 한국 극우는 흔히 진보세력을 “종북”, *“공산주의자”*로 모는데, 오세훈은 그런 노골적 발언은 하지 않더라도 진보정책을 국가안보와 연계해 경계하는 기조를 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세훈의 “공존” 담론에는 이념적 공존은 빠져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는 좌우 이념 간 공존보다는, 경제계층 간 공존만을 강조한다. 이는 곧 극단적 이념대립은 계속 용인하거나 무시한 채, 경제사회적 양극화만 관리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문화적·이념적 양극화와 떼어놓고 볼 수 없다. 달이 말한 **“약한 하부문화 분열(weak subcultural pluralism)”**이 민주주의에 유리한 조건인데 , 지금 한국은 지역, 이념, 세대, 성별 할 것 없이 하부문화 간 분열이 강하다. 오세훈은 세대·계층 문제는 부각했지만, 지역 갈등(예: 서울 vs 지방)이나 이념 갈등(보수 vs 진보) 해소에선 별 메시지가 없다. 이는 그의 상생론이 편식적임을 시사한다. *“공존”*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직접 표를 받는 서울시민(특히 보수성향 시민) 내부의 통합에 주력하고, 전국적·보편적 공존 의제는 잘 다루지 않는다. 가령 선거제도 개혁이나 중앙-지방 갈등 조정 같은 이슈에서 그는 적극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세훈의 정치적 관심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권한 영역과 권력 상승 경로에 국한되어 있다. 이는 정치 지도자가 국가 공동체 전체의 화해와 통합을 도모하지 않을 때, 민주주의 발전이 정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린츠와 스테판은 민주화 공고화의 조건으로 *“국가적 통일성”*과 *“광범위한 합의”*를 들었는데 (Linz & Stepan, 1996), 한국은 여전히 민족분단, 이념갈등, 지역주의 등 통일성이 약한 요소들이 많다. 이런 부분에 대한 치유 노력 없이 경제적 상생만 외친다면, 민주주의의 토대가 불안정한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후퇴론의 시각에서 보면, 오세훈의 행보는 뚜렷한 후퇴 유발 요인이라기보다 현상 유지 혹은 완만한 퇴조의 일부로 볼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 지표들은 2010년대 후반부터 약화되는 추세를 보였는데 (자유언론 지수 하락, 시민참여 저조 등), 오세훈이 가세한 2021년 이후 보수세력의 재집권은 이러한 흐름을 반전시키지 못했다. 촛불혁명으로 잠시 고양되었던 시민참여와 민주개혁 요구는, 보수의 복귀와 함께 안정과 성장 담론으로 대체되었다. 오세훈은 바로 그 안정과 성장 담론의 유력한 전달자다. 그는 민주주의 심화보다는 경제 회복과 사회질서 회복을 전면에 내세우며, 많은 시민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이명박 시장 시절 “한강의 기적” 신화 등을 언급하며 ). 이러한 민주주의 후퇴의 문화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아렌트는 시민들이 공적 관심을 잃고 사적 안위에 몰두할 때, 자유가 위협받는다고 했다. 오세훈의 메시지는 *“이념 싸움 그만하고 먹고사는 문제 해결하자”*는 것으로 들리지만 , 이는 동시에 시민들의 정치적 열정과 참여 의지를 꺾을 위험이 있다. 실제로 오세훈 취임 후 서울시에서 혁신적 주민참여 정책이나 직접민주 실험은 크게 줄었다. 박원순 시장 시절 활성화되었던 주민참여예산, 시민위원회 등은 동력을 잃었고, 시민단체 보조금 삭감 등 시민사회 위축 조치도 있었다. 이것은 민주주의 *“깊이”*의 후퇴를 의미한다. 단순히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만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일상적 거버넌스에서 시민이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내용인데 (Dahl의 유효참여 기준 참고 ), 오세훈 시대 서울은 그런 면에서 후퇴했다.
결국 오세훈의 정치가 민주주의에 끼치는 영향은 양가적이다. 한쪽 면에서 그는 제도는 지켰지만, 정신은 희석시켰다. 공존과 상생이라는 미명 아래 참여와 숙의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옅어졌다면, 그것은 일종의 *“조용한 민주주의 침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학자들이 우려하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의 특징이 보인다: 즉, 선거의 외피는 유지하면서 자유롭고 활발한 공론장은 약화시키는 현상이다 (Levitsky & Ziblatt, 2018). 오세훈이 권위주의자로 불리진 않지만, 그의 통치 스타일이 결과적으로 시민의 정치적 효능감 감소와 정치 불신 증가로 이어진다면 민주주의는 후퇴하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오세훈 스스로 자신의 슬로건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공존과 상생”*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이 단지 수사에 그치지 않고 정치 과정 전반의 운영 원리로 구현되어야 한다. 야당과도 상생하고, 비판세력도 포용하며, 시민을 단순한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정책을 만들어가는 동반자로 대우할 때, 비로소 그의 리더십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공존과 상생 담론의 실질과 한계에 대한 비판
앞서 오세훈 정치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았듯, 그의 “공존과 상생” 담론은 긍정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현실정치와 부합하지 않는 모순들을 드러낸다. 이제 그의 저서 **『왜 지금 공존과 상생인가?』**의 논지와 관련해, 이 담론의 실질적 실행 가능성, 계층적 편향성, 정치 레토릭과 정책의 괴리, 민주주의 가치와의 충돌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겠다.
첫째, 수사의 실질적 실행 가능성 문제: 공존과 상생은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보편적 선(善)**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지가 문제다. 오세훈의 책과 발언을 보면, 그는 경제적 성장과 사회적 형평의 조화를 핵심으로 한다. *“한강의 기적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에서 드러나듯, 고도성장이 낳은 양극화를 인식하고, *“이제는 성장보다 성숙”*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이는 방향성으로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구체적 경로인데, 그의 해법은 대체로 체제 내 점진적 개선이다. 시장경제와 자유주의 틀은 유지하되, 제도를 손봐서 약자를 돕자는 접근이다 . 안심소득 같은 정책이 그 예다. 그러나 이러한 개선적 접근만으로 심각한 불평등이 해소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서울의 주택문제나 교육격차 문제는 이미 구조적이고 전국적인 사안인데, 서울시장 권한으로 일부 사업을 한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안심소득 역시 전국 확산 시 천문학적 예산과 중앙입법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정치적 합의는 멀기만 하다. 다시 말해, 오세훈의 담론은 크게 보고 작게 행하는 경향이 있다. 거창한 상생 사회를 말하지만, 정작 자신이 취한 조치는 시범적이고 제한적이었다. 이는 실험 정신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상생을 말로만 떠벌렸지 실상은 손쉬운 일부터 했다는 비판을 부를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위대한 목표를 가진 군주는 그것을 뒷받침할 위대한 행동도 보여주어야 백성이 따른다고 했다. 오세훈의 경우 *“공존”*이라는 가치 목표에 상응하는 과감한 정책 혁신이 있었는가? 선별복지 실험이나 약자 지원 확대는 기존 정책의 범주 안에서 조정된 수준이다. 정작 공존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대타협(예: 부유층 증세나 노동시장 개혁을 통한 양보)은 그의 의제에 없다. 슘페터식 “엘리트 민주주의”에 충실한 그는 민중이 체제 근간을 뒤흔드는 수준의 요구 (예: 경제민주화, 재벌개혁 등)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상생 담론은 체제 유지적 개혁에 머물고, 급진적 변화가 필요한 영역은 도외시된다. 이로써 그의 구호는 실질적 내용이 결핍되고, 추상적 수사로 보일 위험이 있다. 한나 아렌트는 *“스토리텔링은 의미를 드러내지만, 그것을 정의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 오세훈의 상생 이야기에도 분명한 정의(定義)나 이행계획이 부족하다. 이는 실행 단계에서 자의적 해석과 축소를 가능케 한다. 예컨대 그는 상생을 말하면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같은 이슈엔 소극적이다. 서울시 산하 투자기관의 공공성 강화나, 민간위탁사업의 노사상생 구조개선 등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이런 불일치는 상생 수사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둘째, 특정 계층 중심의 담론 구조: 오세훈의 공존담론은 계층적 편향성을 지닌 것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그는 *“빈부격차 대물림 해소”*를 말하며 사회통합을 얘기하지만 , 실제 구상을 들여다보면 중산층 및 생산계층 중심이다. 안심소득 정책만 해도, 최빈곤층보다는 일정 소득이 있는 저소득 근로층에 초점을 맞춘다 . 완전한 빈곤층(소득이 전무한 계층)은 기존 기초생활보장제도 틀에 남겨두고, 그보다 약간 위 계층을 돕는 식이다. 이는 “더 일할 의욕이 있는 계층”을 겨냥한 것으로서, 일하기 힘든 최약자층(노인 무연고 빈곤층 등)은 상대적으로 관심 밖임을 의미한다. 실제 서울시 복지 예산에서 최저생계 보호보다는 청년지원, 창업지원 등이 부각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즉, 상생에서 중요한 파트너로 중산층과 잠재중산층이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보수적 생산연대 담론의 전형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세금을 내는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사회계약을 맺는 그림이다. 자연히, 거기에 속하지 못한 비생산 인구(예: 장애인 중증빈곤층, 장기실업자 등)는 부차화된다. 오세훈이 종종 쓰는 “건강한 복지”, *“일할 수 있게 돕는 복지”*라는 표현은 이런 철학을 반영한다. 일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부양은 건강하지 않다는 함의다. 따라서 그의 상생은 조건부 상생이다. 이는 어찌 보면 공정한 원칙 같지만, 복지국가 이념에서 보면 보편적 권리로서의 복지 개념과 충돌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담론은 생산계층-소비계층 간 상생, 서울과 지방 상생(그의 ‘지방상생주택’ 정책 등에서 나타남) 등 선택적 상생에 가깝다. 빠져있는 부분은 노동자-자본가 상생이나 고용없는 사람들과 있는 사람들의 상생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비정규직 노동 문제나, 플랫폼 노동자 보호 같은 이슈에서 그는 뚜렷한 입장을 보여준 적이 없다. 대형 노조파업에 대해서는 중앙정부의 강경대응을 지지했고, 2022년 화물연대 파업 당시 *“시민 불편을 담보로 한 파업은 안된다”*며 정부 편에 섰다. 이는 노사갈등에서 사용자측 입장을 옹호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상생이 계급 간 상생까지 포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어렵다. 또한 부동산 정책에서도, 그는 재건축·재개발 규제완화를 통해 주택공급을 늘리겠다고 하나, 이는 기본적으로 집 가진 계층(재건축조합 등)의 이익과도 맞물린다 . 반면 그가 직접 공급한 공공주택은 제한적이고, 기존 주거약자의 권리(예: 세입자 보호)는 전임 진보시장에 비해 소홀했다. 이러한 정책 편중은 그가 상생을 부르짖지만 사실은 중산층 표심을 중심에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마키아벨리가 말한 *“대다수 인민의 지지를 얻어야 안정적으로 통치한다”*는 원칙과 부합하는데, 현대 한국사회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산층(혹은 중산층 지향층)을 겨냥한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전략이 진정 약한 처지의 소수를 배제한다는 점이다. *“공존”*이란 말의 윤리적 함의는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는 공동체일 터인데, 오세훈의 공존 공동체에는 눈에 보이는 주요 구성원들만 참여하고, 보이지 않는 주변인들은 끼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한 계층 편향적 상생론은 민주주의의 평등 이념과 충돌한다. 로버트 달은 정치적 평등을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꼽았는데 , 만약 정치 지도자가 정책 설계부터 특정 계층을 우선시한다면 이는 평등원칙을 저해하는 것이다. 오세훈은 노동존중, 사회연대 세력으로부터 그간 신뢰를 받지 못했다. 서울시 공무직 처우 개선이나 생활임금 인상에도 소극적이어서 노동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런 정황들을 보면, 그의 상생 담론은 계층 간 신뢰 구축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부 영역에서는 반감(反感)을 키웠다. 이는 상생 구호의 실천 결여로 인한 설득력 저하로 이어진다.
셋째, 정치 레토릭과 정책 간 괴리: 오세훈의 경우 말과 글의 수준에서는 상당히 세련된 담론을 구사하지만, 정책 집행의 수준에서는 때로는 엇박자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그는 저서에서 국제 원조와 지식공유 등을 언급하며 한국의 역할론을 피력했다 . 그러나 실제 서울시장으로서 국제협력 활동을 크게 진전시켰다는 평가는 드물다. 오히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시는 러시아 대사관 인근 거리를 일방적으로 “프레지던트 젤렌스키 거리”로 명명하려다 외교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는 국제공존이라는 큰 맥락보다는 국내 정치 분위기迎合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작은 사례지만, 공존 레토릭과 실무 감각의 괴리를 보여준다. 또 하나, 그는 *“문화의 힘으로 새로운 도약”*을 강조했으나 , 정작 문화예산은 삭감되고 시민예술 지원은 줄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는 재정압박 때문일 수 있으나, 적어도 말한 대로 실천하려는 의지부족으로 읽힌다.
정책과 수사의 괴리는 특히 환경·공원 문제에서 드러났다. 오세훈은 전임 시장들이 조성한 광장이나 공원 정책을 일부 되돌리면서 *“시민 불편 해소”*를 명분으로 들었다. 예컨대 광화문광장 재개장에 대해 그는 박원순 시장의 기존 설계를 비판하며 동선 문제를 지적했다. 물론 그것도 상생 – 즉 차량 소통과 보행자 편의의 상생 – 논리로 포장했다. 하지만 시민사회에서는 이를 두고 *“정치적 이유로 전임자 업적 지우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광장의 디자인은 바뀌었으나 교통체증 문제는 여전하다는 평가가 있다. 이런 사례는 정책 성과와 상생 수사 간 괴리를 나타낸다.
또 다른 괴리는 부채와 재정 운용에서 나타난다. 오세훈은 *“포퓰리즘 복지”*를 비판하며 재정건전성을 중시했지만, 정작 서울시 채무는 2021~2023년에 늘어났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세수는 줄고, 그는 자신이 공약한 사업들을 추진하기 위해 적자예산을 편성했다. 그러자 야당은 *“말로는 건전재정, 현실은 빚더미”*라고 공격했다. 물론 코로나19 등 특수상황을 감안해야겠지만, 언행 불일치 프레임에 취약해진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정치적 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약속을 어겨서 비난받지 않을 꾀도 알려주었지만 (필요하면 약속을 깨더라도 핑계를 잘 대라는 식),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정치인의 신뢰가 일단 금이 가면 복구하기 어렵다. 오세훈이 향후 대권에 도전할 경우, 과거 말과 실제의 불일치 사례들이 공격 포인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 “공존을 외치더니 결과는 대결 정캇, *“상생을 말했지만 정책은 불균형”*이라는 식의 검증이 뒤따를 것이다. 이는 그 자신의 레토릭이 자초한 시험대다.
넷째, 민주주의 가치와의 충돌: 가장 본질적인 비판은, 오세훈의 상생담론이 리버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와 긴장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자유와 평등, 다원주의와 인권이다. 그런데 오세훈이 그동안 보인 정책적 입장은 자유주의 가치 중 평등보다는 자유, 복지보다는 성장에 기울어져 있었다.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합법적 이념이지만, *“공존과 상생”*이라는 수사는 마치 평등과 연대를 옹호하는 듯한 어감을 준다. 결국 가치의 불일치가 발생한다. 예컨대 그는 *“공정한 기회 제공”*을 강조하지만, 결과적 평등에는 반대한다. 그런데 상생이란 보통 결과의 공유까지를 의미한다. 기업과 노동자가 상생한다면 이윤도 나누고 책임도 나누는 것인데, 한국에서 보수가 말하는 상생은 대부분 **“기업이 성장하면 고용과 낙수로 혜택이 돌아간다”**는 일방향 모델이었다. 오세훈도 이런 시각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진보진영에서 볼 때 그의 상생론은 기득권 옹호 이데올로기로 비친다. 한편 민주주의의 또다른 가치인 다원주의와도 충돌한다. 오세훈은 일치와 통합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한데, 민주사회는 때로 갈등의 노출과 조정이 더 건강할 수 있다. *“화합”*만을 중시하면 갈등 억압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실제로 서울시 산하에서 갈등조정위원회나 협치기구 활동이 위축되고, 노사정 대화보다는 행정명령이 앞서는 분위기가 이는 것에 우려가 제기된다. 이는 입헌민주주의에서 갈등을 제도화하여 푸는 메커니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아렌트는 갈등과 이견이 표출되는 공간이 정치의 본령이라 했는데, 오세훈의 행정은 그런 공간을 좁히고 행정편의적 해결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인권과 시민권 측면에서도 상생담론은 모호하다. 예컨대 서울시의 청년 기본소득이나 여성 안전 조치 등이 축소된 것은 “재원의 효율적 사용” 논리로 정당화되었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사회적 약자의 권리 축소”*로 보았다. 상생이라는 단어의 함의는 시혜적이다. *“같이 잘 살자”*는 식의 윤리로 들리지만, 법적 권리로서 주장하기 어렵게 만든다. 복지나 지원을 권리로 보면 당연히 주어져야 하지만, 상생으로 보면 좋은 마음으로 베푸는 것처럼 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리담론이 후퇴하고 공동체주의 담론이 앞서면, 소수자나 구조적 약자의 정당한 권리 청구가 “이기심”으로 매도될 수 있다. 오세훈이 즐겨 쓰는 *“함께 살아가는 사회”*라는 말도 얼핏 옳으나, 막상 현실에서 홈리스가 지하도를 점거하면 *“함께 사는데 피해주면 안된다”*며 쫓겨날 수 있다. 실제 서울시가 노숙인 쪽방촌 재개발 등에서 보여준 태도를 보면, 도시 미관과 개발 논리가 상생의 명분 아래 우선하기도 했다.
이렇듯 민주주의의 섬세한 가치들 – 소수의 권리, 비판의 자유, 갈등의 인정 – 이 오세훈의 상생정치 하에서 위축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는 현 정부 여당의 전체 기조와도 상통한다. 오세훈은 그 속에서 이의를 제기하기보다 발맞추는 편이었다.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면, 그의 상생담론은 민주주의의 자유·권리 담론에 대응되는 공동체주의 레토릭으로서, 궁극적으로 권력자의 통치이념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종교나 도덕을 활용해 통치의 정당성을 얻으라고 조언했는데, 현대 세속사회에서 “공존과 상생” 같은 윤리적 구호는 일종의 세속 종교처럼 쓰일 수 있다. 정치인은 아름다운 가치를 말하고, 시민은 그 뜻을 지지하지만, 정작 그 구현을 위해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인에 대한 견제는 느슨해진다. “좋은 분이겠지” 하고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민주주의에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의심하고 질문하는 시민에 의해 지탱되는데, 모두가 *“화합”*만 부르면 비판은 쉽게 *“반대만 하는 발목잡기”*로 몰릴 수 있다. 오세훈이 야당 서울시의회 시절 그런 프레임을 덧씌웠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 그는 다수 야당의 결정을 *“횡포”*라 했고, 자신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를 *“정치세력”*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대 의견에 대한 비하는 공존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
비판 정리: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오세훈의 “공존과 상생” 담론은 정치적 수사와 실제 통치행태 사이의 간극이 크고, 민주주의 및 평등 이념과 충돌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그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마키아벨리적인 현실감각과 슘페터적인 엘리트주의에 입각해 다듬어왔지만, 이를 포장하는 언어는 공동선과 협력이라는 규범적 이상을 차용했다. 이 언어와 현실의 불일치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Juan Linz가 언급한 **“이중 통로(double talk)”**가 떠오른다. 권위주의적 경향의 지도자들은 민주주의 언어를 활용해 대중을 안심시키면서, 실제로는 권력 집중과 반대 억압을 추진하곤 한다. 오세훈이 그런 극단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생이라는 말 뒤에 숨은 권력의지와 정치적 의도는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가 진정 한국 사회의 공존을 원한다면, 더 솔직하고 투명한 정치, 그리고 자기 편향을 넘는 포용을 실천해야 한다. 반대로 말뿐인 상생을 계속 내세운다면, 그것은 결국 국민을 기만하는 레토릭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결론: 마키아벨리적 군주인가, 슘페터적 정치기업가인가?
오세훈의 정치 행보와 *『왜 지금 공존과 상생인가?』*에 담긴 메시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한 정치인의 다층적 얼굴을 보았다. 그는 때로는 개혁적 보수의 가면을 쓰고, 때로는 기득권 수호자의 본색을 드러냈다. 승부사적 기질로 대담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실용주의자로서 유연하게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그린 이상적 군주의 단면들을 연상시킨다. “인기와 존경을 동시에 받되, 필요하면 악덕도 쓸 줄 아는 통치자” . 오세훈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공존과 상생이라는 누구나 원하는 가치를 제시했고 (사랑받는 모습), 동시에 정적들을 무능하고 위험한 포퓰리스트로 매도하며 자신을 책임있는 지도자로 부각시켰다 (두려움을 활용하는 모습). 이런 점에서 그는 마키아벨리식 현실정치의 능숙한 플레이어다. 또한 슘페터의 논리를 빌리자면, 그는 민주주의를 경쟁 시장으로 보고 치열한 정치적 기업 활동을 펼쳐온 인물이다 . 자신의 “상품”이 잘 안 팔리면 (선별복지 노선의 한계가 드러나면) 재빨리 리패키징해서 “공존 복지”라는 새 브랜드를 내놓고, 경쟁자가 내건 “보편복지” 상품은 품질이 나쁘다고 홍보하며, 유권자라는 소비자의 선택을 끌어왔다. 이러한 정치공학 측면에서 오세훈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서울이라는 최대 지방정부의 수장 자리를 네 번이나 차지했고, 현재 보수진영 차기 주자 중 상위권으로 거론된다 . 이는 그가 정치인으로서 유능함을 증명한다.
그러나 정치학적 이상에서 볼 때, 오세훈의 이러한 행보는 민주주의 발전에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 한편으로, 그의 상대적 온건 보수 노선은 극단적 분열을 완화하는 중도균형추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극우적 선동이나 탈법을 지향하는 인물이 보수진영을 이끄는 것보다는, 그나마 상생을 말하는 오세훈 스타일이 한국 민주주의에 덜 해로울 수 있다. 2024년 The UnPopulist 분석처럼, 오세훈은 *“제도주의적 보수”*로서 민주규범 위반을 비판하기도 한다 . 그러나 동시에, 그의 정치술은 대중의 참여와 요구를 무력화시키고 정치 엘리트의 경쟁 구도 속에 민주주의를 가둬버리는 면이 있다. 이는 슘페터식 민주주의의 한계 그 자체다. 슘페터는 민주주의를 *“민중이 아닌 지도자가 주인공인 체제”*로 묘사했고, 오세훈은 정확히 그 틀에서 움직인다. 시민들은 그의 구호를 소비할 뿐, 정책 형성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지 못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축소다.
또한 그의 공존과 상생 구호는 과대광고일 수 있다.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크지만, 실제 내용은 빈약하면 유권자의 환멸만 커질 것이다. *“공존”*을 들었지만 삶은 나아지지 않고, *“상생”*을 기대했지만 사회 갈등은 여전하다면, 시민들은 냉소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냉소와 염세주의가 퍼질 때 약해진다 (아렌트 역시 허위 이념이 믿음을 잃게 할 때 전체주의 토양이 된다고 경고했다 ). 그러므로 오세훈의 담론이 책임있는 정치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독이 된다.
정치철학자들의 시각을 종합하면, 진정한 공존과 상생은 아름다운 구호가 아니라 어려운 실천이다. 마키아벨리는 사람들이 필요할 때만 선을 행한다고 냉소했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정치는 필요 없어도 선을 추구하는 시민덕성에 달려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에서의 진실과 약속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로버트 달은 평등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민주주의의 심장으로 보았다 . 후안 린츠는 민주 제도를 존중하는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이 관점들로 오세훈을 비춰볼 때, 그는 아직 민주주의의 모범적 지도자상과는 거리가 있다. 다만 변화의 가능성은 남아있다. 그도 정치 환경에 따라 스스로 진화해왔듯, 상생 구호를 현실로 만들 압력이 커진다면 더 구체적이고 포용적인 행보를 보일 수 있다. 예컨대 차기 대권을 노린다면 전국적 지지기반을 넓혀야 하므로, 지금보다 야당 지지층이나 소수자 집단에도 손을 내미는 전략을 펼칠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역설적으로 비판받던 상생담론이 보다 진정성 있는 내용을 채워갈 여지도 있다. 민주주의의 탄력성은, 비판여론과 시민사회의 요구가 지도자를 변하게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결론적으로, 오세훈의 *“공존과 상생”*은 현재까지는 매력적 구호 이상의 의미를 확립하지 못한 정치레토릭으로 평가된다. 그의 정치 행보는 극우 포퓰리즘과 책임정치 사이를 줄타기하며, 정치 전략과 민주주의 이상 사이에 긴장을 노정해왔다. 이 긴장을 풀어내는 작업은 오세훈 본인과 한국 정치 모두의 과제다. 만약 공존과 상생이 수사로 남는다면, 이는 또 하나의 정치적 기만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판을 통해 정제되고 실천으로 이어진다면, 극심한 분열과 갈등에 빠진 한국 민주주의에 새로운 활로가 될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는 *“운명은 인간의 용기에 보답한다”*고 했고, 아렌트는 *“행동만이 새로운 시작을 가져온다”*고 했다. 오세훈이 진정으로 용기있게 새로운 시작을 열 정치인인지, 아니면 한 시대의 영민한 경쟁자에 불과했는지는, 앞으로 그의 행보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진로가 함께 판가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