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가에서 극우 포퓰리스트로: 『김문수는 다릅니다』의 정치학적 비판
서론
김문수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이념 지형 변동을 극적으로 체현한다. 노동운동가에서 출발하여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를 거쳐, 최근에는 극우 포퓰리즘의 전면에 선 정치인으로 변모한 그의 궤적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김문수 본인은 자신의 자서전 『김문수는 다릅니다』에서 가난한 노동자 출신으로서 청렴과 성실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인간 김문수”의 면모를 강조한다 . 그러나 이러한 자기 서사는 그의 이념적 전향과 정치적 행보에 대한 충분한 성찰을 담고 있는가? 본 글은 김문수 자서전의 주요 논지를 요약하고, 이를 정치학 이론의 틀로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노동운동가에서 극우 성향 정치인으로 변모한 이념적 궤적에 주목하며, 포퓰리즘, 권위주의, 극우정치, 민주주의 후퇴, 정치적 선동, 정체성 정치 등의 개념을 활용해 김문수 현상의 함의를 평가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요제프 슘페터, 한나 아렌트, 로버트 달, 후안 린츠와 같은 정치사상가들의 관점을 원용하여, 김문수의 주장과 행보에 내포된 민주주의적 가치의 훼손과 극단주의의 위험성을 조명하고자 한다.
『김문수는 다릅니다』의 주요 논지와 자기 서사
김문수의 자서전 『김문수는 다릅니다』(2012)는 제목처럼 자신이 “다른” 정치인임을 강조한다. 책은 경북 농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노동 현장에서 잔뼈가 굵고, 택시운전사 자격증을 포함한 아홉 개의 자격증을 따며 생계를 꾸린 과거를 상세히 소개한다 . 이를 통해 김문수는 현장 노동자 시절부터 공직자에 이르기까지 정직과 청렴을 몸에 배인 인물로 자신을 그린다 . 그는 가족(특히 어머니)에 대한 소회와 공인으로서 지켜온 원칙들을 솔직하게 풀어놓으며, 기존 정치인과 다른 ‘청렴한 outsider’ 이미지를 구축한다. 요컨대 주요 논지는 **“김문수는 깨끗하고 성실한 사람이며,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위해 헌신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서사는 정치학적 분석의 관점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노출한다. 첫째, 자기 미화와 선택적 서술의 가능성이다. 김문수는 책에서 자신의 도덕성과 서민적 배경을 부각하지만, 이념적 변화나 정치적 논란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반성이 부족하다. 실제로 김문수는 과거 운동권 동지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 자서전에는 이러한 비판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책이 2012년 경기도지사 재임 중 선거를 염두에 두고 쓰인 점을 고려하면 ,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유리하도록 이념적 논쟁을 회피하고 행정 성과와 인간적 면모를 부각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전략적 자기서사는 마키아벨리가 언급한 **“군주(prince)는 필요할 때 선하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권모술수의 조언을 떠올리게 한다 . 즉,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자신의 참된 생각이나 과오를 드러내지 않고 미화하는 것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문수는 자서전에서 과거 좌파 운동 경력과 현재 우파 정치인 이미지 사이의 모순을 애써 봉합하며, 독자에게 일관된 정의로운 인생을 살아온 양 묘사한다. 이러한 이미지 관리는 정치학적으로 유권자 대상의 일종의 포장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자서전의 논지는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운 변신을 합리화한다. 김문수는 책에서 민주화 이후 **“이념을 떠나 실용주의자로서 행정과 주민 삶을 위해 일했다”**고 묘사하며, 과거 혁명가 이미지를 지운다 . 이것은 슈مپ터식 민주주의관과 통한다. 슘페터는 민주주의를 **“엘리트들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경쟁하는 제도”**로 정의했는데 , 김문수 역시 혁명 운동을 접고 제도권 선거정치에 뛰어듦으로써 엘리트 경쟁의 규칙을 받아들였다. 자서전에서 그는 좌우 이념보다는 도로, 복지, 경제발전 등 실용적 과제에 몰두한 것으로 자신을 그리며, 과거 급진 사상을 털어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치 참여를 대중 의지의 구현이 아니라 리더십 경쟁으로 보는 슘페터적 현실주의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대의민주주의의 심화된 의미, 즉 시민 참여나 숙의, 신념의 일관성 등은 퇴색된다. 김문수의 자기 묘사에는 시민사회 운동가로서의 신념이 어떻게 정책 엘리트로 전환되었는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거의 없다. 이러한 이념 공백은 훗날 그가 극단적 이념에 다시 경도되는 토양을 남긴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노동운동가에서 극우 정치인으로: 이념적 궤적 분석
김문수의 이념적 궤적은 한국 정치사의 전향(轉向) 논쟁과 맞물려 있다. 1970~80년대 김문수는 독재 정권에 맞선 대표적 노동운동가였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강제 제적 이후 공장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근로자 조직화에 나섰다 . 1980년대 초 서울지역노동조합연합(서노련) 지도위원을 지내며 마르크스주의 혁명노선을 신봉했던 김문수는 **“혁명만이 세상을 올바르게 이끈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 노동계급의 힘을 조직하려 했다 . 이 과정에서 그는 수배와 투옥, 고문까지 당하는 희생을 겪으며 투쟁했고, 당시 운동권 동지들에게 **“운동권의 황태자”**로 불릴 만큼 촉망받는 급진좌파 혁명가였다 .
그러나 1990년대를 전후하여 김문수의 사상은 급격한 전환을 맞는다. 첫 번째 전환점은 1991년 소련의 붕괴였다. 김문수와 같은 주체사상파·마르크스주의 성향 운동권에게 소련은 하나의 이상이었다. 소련이 해체되자 그는 혁명에 대한 꿈이 흔들리고 혼란에 빠졌다고 술회한다 . 많은 동지들과 함께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목도한 그는 기존 노선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두 번째 전환점은 1987년 6월 항쟁의 성공과 이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이었다 . 거리의 대중투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고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김문수는 혁명이라는 급진 경로가 아니어도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음을 깨달았다 . 그는 **“상상도 못했던 변화들이 눈앞에서 벌어졌다”**고 회고하며, 점진적 개혁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 결국 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부 시절, 김문수는 보수정당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여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다 .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17대까지 내리 3선 의원을 지내고 2006년부터 8년간 경기도지사를 역임하며 보수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
이러한 경력 변천은 정치학자 후안 린츠의 개념을 빌리면, 반체제 인사에서 체제 내 엘리트로의 변신으로 볼 수 있다. 린츠는 민주주의의 안정에 있어 **“충성스러운 야당(loyal opposition)”**의 존재를 강조했는데, 김문수는 1990년대에 들어서 체제 전복을 꿈꾸던 불충성 세력에서 제도 안에서 경쟁하는 충성 세력으로 위치를 이동한 셈이다 . 그는 과거 자신이 부정하던 기존 헌정질서에 편입되어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고, 제도 내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노선을 택했다. 이러한 이념적 중도화 혹은 전향은 한편으로는 시대적 흐름에 순응한 현실주의로 평가될 수 있다. 실제로 김문수는 “전향(轉向)”이라는 말을 극도로 싫어한다며, **“실천을 통해 자기 성숙의 과정을 거친 것일 뿐 시류에 편승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해왔다 . 그는 **“좌파도 애국자가 될 수 있다”**며 자신의 변화가 신념의 배신이 아니라 방법론의 변화였다고 항변한다 . 이를 김문수의 관점에서 보자면, 혁명을 통한 이상사회 실현이라는 목표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제도정치를 통한 국민행복 실현으로 수단을 바꾼 것이라는 자기정당화인 것이다. 다시 말해,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라는 원대한 신념은 그대로 간직한 채 이를 구현하기 위해 의회민주주의 경로를 택했다고 여긴다 .
하지만 비판적 시각에서 보면, 김문수의 이러한 변신은 이념적 신념의 후퇴 혹은 변절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그의 과거 동지들 (예컨대 정의당 심상정 의원 등)은 **김문수를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변절자”**로 지목하며,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동료들의 뜻을 저버렸다고 비판해왔다 . 김문수 본인이 아무리 스스로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믿는다 해도 , 급진 좌파에서 강경 우파로의 극단적 이동은 정당화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연구에서 **“이념에 심취했던 사람들이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면 정반대 극단으로 급속히 이동하는 경향”**을 논한 바 있다. 실제로 나치즘과 공산주의 사이를 오간 지식인들처럼, 김문수도 혁명에 대한 좌절감을 극단적 반공주의로 채운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가능하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 주체는 확고한 나치나 공산당원이 아니라, 사실과 허구의 구분이 사라진 사람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김문수가 **과거의 이상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극단적 신념(반공주의적 민족주의)**을 주입한 것은, 이념의 공백을 대체하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휩쓸린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그의 행보에는 과거 신념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나 중도적 가치로의 연착륙보다는,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의 이행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동운동가에서 보수 정치인으로 변신한 1990년대의 김문수는 겉보기에는 민주주의 체제 내로 편입된 성공적인 전향 사례였다. 마키아벨리의 관점을 빌리면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군주의 적응”**으로 볼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자가 생존을 위해서는 유연하게 행동하고, 필요하면 과거의 신념이나 도덕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 김문수는 혁명가의 옷을 벗고 개혁적 보수의 옷을 입음으로써, 시대의 흐름 속에서 현실 정치인으로 살아남는 선택을 했다고도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공익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 변신이었는지, 아니면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기회주의였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뒤이어 살펴볼 그의 극우 포퓰리즘 참여는 이 질문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답을 시사한다.
김문수의 정치 행보와 극우 포퓰리즘의 결합
국회의원 3선과 경기도지사 2선을 거치는 동안, 김문수는 비교적 중도보수적 행정가의 이미지를 유지했다. 도지사 재임 시절 그는 복지 정책 확대나 경제 활성화 등 실용적 공약을 내세웠고, 개인적 청렴성도 인정받아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은 깨끗한 보수로 평가되기도 했다 . 자서전에서도 이 시기 김문수의 삶은 혁명·이념보다는 행정성과와 주민 밀착으로 채워져 있다 . 이는 본인이 의도한 “이념을 떠난 실용주의자” 이미지와 부합하며, 그 덕분에 한동안 보수진영 내부에서 대권주자 급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실제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잠재적 후보군에 올랐고, 2018년에는 자유한국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이 시점까지의 김문수는 체제 내 보수 정치인으로서 크게 이탈적이지 않은 행보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 특히 진보정권(문재인 정부) 집권기를 맞이하며 김문수는 다시 한번 급격한 이념적 이동을 보인다. 이번에는 기존 보수정당의 범주를 넘어 극우 포퓰리즘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표출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2017)과 문재인 정부 출범(2017)을 전후하여, 한국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이를 **“좌파에 의한 정권 찬탈”**로 규정하는 음모론적 담론과 함께 거리 투쟁이 벌어졌다. 이른바 **“태극기 집회”**로 불린 극우 집회에 김문수는 적극 참여하여 문재인 정부를 맹렬히 성토했다 . 예컨대 2019년 광복절 광화문 집회에서 김문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나라를 사회주의로 만들어 북한에 바치려 한다”**는 주장까지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는 증언이 있다 . 이런 발언은 사실상 현직 대통령을 반역자로 규정하는 극언으로, 정치적 선동의 극치라 할 만하다.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현 정부를 **종북(從北)**으로 몰아붙이는 이러한 담화는, 김문수가 이미 민주 공화국의 합의적 틀을 넘어 극단주의적 세계관에 경도되었음을 보여준다. 한때 합리적 보수로 여겨졌던 그의 언어는 냉전 시기의 매카시즘식 색깔론과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과격해졌다.
2019년 이후 김문수는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극우 기독교 세력과 긴밀히 연대한다. 전광훈은 보수 개신교인들과 함께 문재인 퇴진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과격한 발언과 집회로 유명하다. 김문수는 전광훈과 함께 2020년 초에 “자유통일당”이라는 극우 정당을 공동 창당하여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 자유통일당은 문재인 정부를 **“종북 좌파 정권”**으로 규정하고 탄핵 무효, 친북세력 척결 등을 내건 극단적 강령을 내세웠다. 비록 이 정당은 2020년 총선에서 실패로 끝났지만, 김문수의 이러한 행보는 기존 제도권 보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비제도권 극우운동의 리더로까지 역할을 확장한 것이다. 정치학에서 **포퓰리즘(populism)**은 흔히 “순수한 국민 대 부패한 엘리트”라는 대립 구도를 특징으로 삼는데, 김문수와 전광훈 등이 주도한 태극기 집회 담론은 **“애국 국민 대 종북 좌파”**라는 서사를 그리며 자신들을 ‘진정한 국민’의 대변자, 상대를 **‘부정한 권력 찬탈자’**로 규정했다. 이는 정체성 정치의 일종으로, 이념적·종교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국민을 선별하는 태도를 보인다. 예컨대 전광훈 및 김문수 세력은 보수 개신교 신앙, 반공 애국주의, 반이민·반난민 정서 등을 결합하여 자신들과 지지층을 정통 한국인/애국자로 묘사하고, 진보진영이나 소수자 운동 세력을 **“반대한민국 세력”**으로 낙인찍는다. 이러한 배타적 포퓰리즘은 아렌트가 우려한 전체주의 운동의 징후, 즉 **“모든 문제를 하나의 적을 상정함으로써 설명하고 대중의 불안과 고립감을 헤쳐 나가는 전략”**과 유사하다. 김문수의 경우, 그 적이란 다름 아닌 **“종북 좌파”**로 구체화되었다. 그가 지속적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을 김일성주의자, 신영복(과거 좌파 인사)을 간첩이라고까지 언급하며 공격한 것은 , 한층 음모론적 선동으로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려는 포퓰리즘 정치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2018년 서울시장 선거 기간에도 김문수는 문 대통령에 대해 **“김일성 사상을 매우 존경하는 분”**이라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는데 , 2022년 국정감사에서는 아예 **“문재인 전 대통령은 확실히 김일성주의자”**라고까지 주장해 국회가 파행을 빚기도 했다 . 이러한 언어적 공격은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정치적 신념에 기반한 선동으로, 다수 시민의 현실 인식에 혼란을 주고 민주적 공론장을 왜곡시킨다.
김문수(왼쪽)가 2019년 8월 극우 성향의 전광훈 목사(오른쪽)와 함께 광화문 집회 무대에 올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문수의 태극기 집회 참여와 전광훈과의 연대는 노동운동가 출신이라는 그의 과거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김문수 본인은 자신과 전광훈을 향한 “극우” 지적에 강하게 반발하며, 오히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애국세력”**이라고 주장한다 . 2022년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김문수(당시 경제사회노동위원장 겸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는 **“전광훈 목사는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목사”**라고 두둔했고, **“전광훈이나 김문수나 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들”**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을 빚었다 . 야당 의원이 **“그런 사람들이 헌정질서를 부정하고 내란을 옹호하지 않느냐”**고 묻자, 김문수는 동문서답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내란 수괴라 하는 데 동의 못 한다”**며 질문을 교묘히 피해갔다 . 이 장면은 김문수가 자신의 극단 성향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애국과 자유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극우 혐의에 대한 방어 논리로 **“친북·반미가 극좌이지, 우리가 극우가 아니다”**라고도 말했는데 , 이러한 주장 이면에는 자신들의 행위는 모두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것이므로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자기확신이 자리한다. 이는 마키아벨리식 자기정당화와 전체주의적 신념이 결합된 위험한 태도로 볼 수 있다. **“대의를 위해서는 거짓말도 불사한다”**는 자세는 이미 슘페터가 **“인간은 이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거짓을 말한다”**고 지적한 바 있고 , 아렌트 역시 전체주의 선전에서 거짓과 진실의 경계 붕괴를 경고했다 . 김문수의 언행은 자신이 믿는 가치(반공 자유민주주의)를 절대선으로 상정하고, 그 실현을 위해 사실 왜곡도 개의치 않는 이념 정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김문수의 극우 포퓰리즘 참여에서 나타난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극단성 강화: 정치적 수사에서 상대 진영을 적으로 악마화(demonization)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합리적 비판과 견제의 수준을 넘어, 상대를 국가 전복 세력으로 규정함으로써 정치 경쟁을 적대적 투쟁으로 치환했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와 사회 통합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수사다.
•반공주의 이념 재부상: 냉전 이후 퇴색했던 극단적 반공 이념이 김문수 담론에서 부활했다. 북한 및 좌파에 대한 과장된 위협 담론이 동원되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빨갱이”**라는 낡은 프레임이 다시 사용되었다. 이러한 반공주의는 과거 권위주의 통치자들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용한 전술로서, 김문수는 민주화 세대임에도 냉전 권위주의의 언어를 답습하고 있다.
•민주주의 훼손 우려: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상대에 대한 인정과 룰의 존중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김문수는 헌정 질서로 선출된 대통령의 정통성 자체를 부인하고 거리에서 퇴진운동을 벌였다. 이는 선거 결과 불복이나 다름없으며, 민주주의 규범의 위반에 해당한다.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 이론에 따르면 **“패자(consent of losers)의 승복”**이 민주주의 안정의 핵심인데, 김문수와 태극기 세력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민주주의의 합의 기반을 흔들었다고 볼 수 있다. 후안 린츠 역시 **“준(準)충성 세력(semi-loyal opposition)”**의 위험을 경고했는데,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체제 불신과 훼손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을 때 체제는 내부에서부터 붕괴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 김문수는 명시적으로 민주주의를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행보는 사실상 준충성적 또는 불충성적 정치인의 양상을 보였다. 집권 세력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거리 압박으로 전복하려 한 점, 그리고 음모론을 퍼뜨려 시민들이 헌정체제에 불신을 갖게 한 점에서 린츠가 말한 **“체제에 대한 잠재적 반역”**의 요소가 있다 .
•정치적 선동과 허위정보: 김문수의 발언들은 팩트 체크를 거치면 근거가 희박한 주장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문재인 정부 고위인사들을 주사파로 몰거나 북한에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등의 주장은 음모론 내지 허위정보에 가깝다. 이러한 포스트-진실 정치는 시민들로 하여금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혼란스럽게 만들어, **아렌트가 우려한 “팩트와 허구의 경계가 사라진 대중”**을 양산할 위험이 있다 . 민주주의 사회에서 건강한 여론 형성을 위해서는 사실에 입각한 토론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김문수류의 선동 정치는 감정과 공포에 호소함으로써 합리적 토론을 마비시킨다.
결국 김문수의 이러한 극우 포퓰리즘적 행보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절차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적 권리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정작 그 내용 면에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러한 모순적인 정치는 민주주의의 자기파괴적 역설을 보여준다. 슘페터식으로 말하자면, 엘리트 경쟁의 민주주의가 포퓰리스트에 의해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얻는 순간, 제도는 그 내부의 승자에 의해 잠식될 수 있다. 김문수는 선출직을 통해 권력을 누렸고 헌정질서의 수혜자였음에도, 대중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체제 자체도 부정할 수 있다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정치학 이론의 관점에서 본 김문수 현상
김문수의 자서전과 정치적 궤적을 마키아벨리, 슘페터, 아렌트, 달, 린츠 등의 관점으로 조망하면, 흥미로운 통찰과 함께 날카로운 비판이 도출된다.
1. 마키아벨리적 관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주의 수완을 강조하며, 통치자는 “필요하면 선하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하고 겉으로는 미덕을 가장하되 실익을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김문수의 변신과 자기서사는 이러한 마키아벨리즘의 적용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젊은 시절 혁명가로서 이상주의에 투철했던 그는, 현실 정치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원칙을 재편했다. 자서전에서 도덕성과 청렴함을 강조한 것은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한 미덕의 가장(假裝)**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권좌를 향한 실용적 판단에서는 과거의 급진 노선을 버리고 보수정당으로 적시에 이동함으로써 포르투나(fortuna, 시운)의 흐름에 올라탔다. 마키아벨리는 **“시대가 변할 때 사람도 그에 맞게 변하지 않으면 몰락한다”**고 경고했는데, 김문수는 소련 붕괴와 민주화라는 시대변화에 발맞추어 자신의 정치 노선을 수정함으로써 몰락을 피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또 다른 충고 중 하나는 **“군주가 미움을 사지 않도록 할 것”**이다. 김문수가 극우 행보로 나아가며 과거 동지들과 다수 시민들의 미움을 산 점은, 오히려 마키아벨리적 지혜에 어긋난다. 한때 대권 잠룡으로 거론되던 그가 스스로 극단으로 치우쳐 중도층의 지지를 상실하고 정치적 고립을 자초한 것은 현실 정치의 통찰 측면에서 전략적 실책일 수 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 관점에서 김문수를 보면, 초기의 유연한 전향은 현실 권력 획득에 성공적이었으나, 후기의 극단화는 군주의 책략 면에서 실패로 평가될 수 있다.
2. 슘페터적 관점: 슘페터는 민주주의를 **“지도자들의 경쟁적 투쟁”**으로 파악하고, 대중은 선거를 통해 엘리트를 교체할 수 있을 뿐 직접 지배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 김문수의 행보는 슘페터의 엘리트 민주주의론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그는 운동권 시절 대중에 의한 혁명을 꿈꾸었지만, 나중에는 엘리트로서 선거 경쟁을 통해 권좌에 오르는 길을 택했다. 이는 슘페터식 민주주의로의 편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슘페터는 또한 대중이 비합리적 정서에 휘둘릴 위험을 지적했는데, 김문수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포퓰리즘적 선동으로 대중의 비합리성을 자극했다. 슘페터의 관점에서 본다면, 김문수는 민주 엘리트로서 책임 있는 정책 경쟁보다, 감정적 구호로 표심을 얻으려 한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다. 이는 민주주의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다. 슘페터가 우려한 것은 지도자들이 유권자의 단기적 관심을 얻기 위해 편의적 거짓말이나 선동을 남발하는 현상인데 , 김문수의 문재인 정부에 대한 근거 없는 주사파 몰이가 바로 그런 사례다. 결국 슘페터라면 김문수를 **“민주주의를 시장 경쟁으로 축소시키되, 시장을 혼탁하게 만든 교란자”**로 평가할 것이다. 대중은 그의 선동에 일시적으로 호응할 수 있으나, 정책 비전 없이 증오심만 동원하는 정치는 장기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건강성을 해치는 기회주의적 행동으로 본다.
3. 한나 아렌트의 관점: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며 이념과 거짓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그녀는 **“거짓이 판을 칠 때 사람들은 결국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다”**고 경고했고, 진실과 허위의 경계가 무너지면 대중은 냉소와 허무에 빠져 권위주의에 취약해진다고 보았다 . 김문수의 극단적 반공 선동은 한국 사회에서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역할을 했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합리적 비판과 **“대통령이 종북세력”**이라는 음모론적 주장은 엄연히 다르다. 후자를 남발함으로써 김문수는 지지자들로 하여금 현실인식보다는 이념적 확증편향에 갇히게 만들었다. 이는 아렌트가 말한 “이상적 전체주의 주체”, 즉 아무 것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도자의 주장만 추종하는 군중을 길러낼 위험이 있다 . 또한 아렌트는 권위주의적 지도자는 고립된 개인들의 군중을 동원한다고 했는데, 김문수-전광훈식 선동정치는 노년층 보수 시민들을 광장으로 불러내 극단화시켰다. 고립감을 느낀 일부 시민들은 극단 담론에서 위안을 찾고 더욱 맹신적으로 변모하는 경향이 있다. 김문수는 반공 이념이라는 하나의 대의로 과거 운동권 동료들마저 적으로 규정했는데, 이러한 흑백논리의 정치는 아렌트가 지적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사고 방식과 닮았다. 나치나 스탈린 체제만이 전체주의가 아니다. 민주사회 내부에서도 **“전체주의적 요소”**가 나타날 수 있는데, 김문수의 언행에서 우리는 진실 경시, 음모론, 편 가르기, 맹목적 충성 요구 등의 요소를 발견한다. 아렌트의 관점이라면 김문수 현상은 민주주의 사회가 방심할 때 출현하는 전체주의의 미세한 전조로 비칠 것이다.
4. 로버트 달의 관점: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로 포괄적 참여와 경쟁, 그리고 시민적 심의를 들었다. 또한 상대에 대한 관용과 패배 수용 등 정치적 평등의 규범을 강조했다. 김문수의 극우 행보는 이러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규범에 반한다. 우선, 그는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진보진영, 좌파 세력의 정당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척결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민주적 경쟁자의 정통성을 부인했다. 달에 따르면 건강한 민주정치에서는 서로 이견이 있어도 **“충성스러운 반대파(His Majesty’s loyal opposition)”**로 인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 하지만 김문수에게 야당(또는 여당인 진보세력)은 충성은커녕 존재해서는 안 될 반역자 무리였다. 이는 민주적 토론과 경쟁의 전제를 무너뜨리는 태도다. 둘째, 소수자나 반대파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었다. 달은 민주주의를 **“누구도 배제되지 않은(polyarchy적) 열린 경쟁 체제”**로 봤는데, 김문수는 정치적 견해가 다른 집단(주로 좌파 성향 시민들)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 공동체에서 배제하려 했다. 이러한 배타성은 민주주의보다는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에 가깝다. 셋째, 시민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라 지도자의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했다. 달의 이상에서 시민은 정보를 기반으로 토론하고 판단하지만, 김문수의 언행은 허위 정보와 공포 조장으로 시민의 판단력을 마비시켰다. 결과적으로 달의 기준에서 김문수는 민주적 가치에 반하는 정치인으로 분류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수호를 자처하지만 실은 그것을 좀먹는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역설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에서 강조되는 **“헌정주의적 민주주의(consolidated democracy)”**의 가치—법치, 관용, 진리 존중—를 김문수가 훼손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달식으로 표현하자면, 김문수의 정치는 **“비포용적 배타주의”**로, 정치 체제를 승자독식의 투쟁터로 만들어 버리는 위험성을 지닌다.
5. 후안 린츠의 관점: 린츠는 민주주의의 붕괴를 연구하며 체제에 대한 엘리트들의 태도를 특히 중시했다. 그는 민주정 붕괴의 징후로 “반체제 정당(anti-system parties)”이나 “불충성 세력(disloyal opposition)”의 득세를 지목했다 . 김문수 개인은 하나의 정당이 아니지만, 그의 영향력과 상징성은 보수진영 일부를 반체제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린츠의 이론에서 **“불충성(opposition of principle)”**이란 체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민주 규칙을 깨는 것을 정당화하는 입장이다 . 김문수의 경우, 공식적으로 민주주의를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언행은 민주 규칙을 훼손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예컨대 탄핵된 대통령을 복권시키기 위해 법치에 불복하고 거리 압박을 넣거나, 선출된 정부를 몰아내기 위해 헌법 외적 방법을 묵인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이는 린츠가 말한 “준충성(semi-loyalty)” 또는 **“우유부단한 충성”**의 사례로 볼 수 있다 . 린츠는 준충성 세력이 명시적으로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비민주적 행위를 묵인하거나 협력함으로써 체제에 악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 김문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비자유적 행동들(거짓선동, 선거불복 정서 조장 등)을 눈감거나 주도했다. 특히 그는 전광훈 등 노골적 불충성 인물과 제휴함으로써, 주류 보수 정당 세력 내에 극단 세력을 교두보처럼 들여왔다. 린츠 식으로 말하면, 이는 민주주의 내부에서 자라난 반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윤석열 정부 들어 김문수 자신이 **고위 공직자(경사노위 위원장)**가 된 후에도 이러한 극단 입장을 버리지 않았는데, 이는 집권 엘리트층에 준충성 인사가 포함된 특이한 상황이다. 린츠는 **“체제 옹호자들이 불충성 세력과 협력하면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한다”**고 분석했는데, 김문수 사례는 바로 그 위험을 현실로 보여주는 경고 신호일 수 있다 . 민주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집권 세력이 극우 인사를 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극단주의에 면죄부를 준 형국이기 때문이다. 린츠의 관점을 빌리면, 김문수의 정치 행태는 민주주의 체제의 자정능력을 시험하는 사례이다. 만약 이런 불충성적 언행이 계속 묵인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서서히 내부로부터 부식될 수 있다. 반면 시민사회와 다른 정치세력이 이를 견제하고 민주주의 원칙을 수호한다면, 린츠가 말한 “재균형(reequilibration)”, 즉 체제의 자기회복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김문수의 극우행보에 대해 언론과 국민 다수가 비판적 시선을 보내고 있고, 선거에서도 그의 극단적 메시지가 크게 호응을 받지 못했다는 점은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보여주는 반증일 것이다.
극단성, 반공주의, 민주주의 훼손: 종합적 비판
김문수의 자서전과 이후 정치 행보를 통합적으로 살펴보면, 그 극단성, 반공주의적 강박, 민주주의 훼손 위험성 등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는 곧 김문수 현상에 대한 종합적 비판의 초점을 이룬다.
첫째, 이념적 극단성의 문제이다. 김문수는 좌에서 우로 이동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스펙트럼의 극단에 위치해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혁명을 부르짖는 극좌에 가까웠고, 노년에는 음모론적 극우에 다가섰다. 그의 사고방식에는 타협이나 중용의 미덕이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양극단의 경험은 그 자신은 **“신념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여기겠지만, 타인에게는 **“왜곡된 신념에의 맹신”**으로 보일 수 있다. 정치에서 극단주의는 폭력과 배제를 낳기 쉽다. 김문수의 언사는 비록 직접적 폭력을 선동하지는 않았으나,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언어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사회적 폭력성을 증대시켰다. 이는 다원주의 사회의 안전판인 관용과 협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둘째, 냉전 반공주의의 시대착오이다. 김문수가 맞서 싸웠던 1980년대의 독재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내세워 인권을 탄압했었다. 역설적으로, 김문수는 그런 정권과 싸웠던 인물이었음에도 본인이 나중에 극단적 반공 이데올로기의 전도사가 되었다. 반공주의에는 애국심의 요소도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도를 지나치면 맹목적 증오가 된다. 김문수의 발언 곳곳에는 이념의 이름으로 동족상잔의 상처까지 긁어내는 증오가 감지된다. 예컨대 그가 **과거 운동권 출신인 임종석 전 비서실장을 거론하며 “이 사람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 대목은 , 과거 자신과 함께 독재에 맞섰던 동료들을 한순간에 국가의 잠재적 반역자로 몰아붙이는 잔인함을 보여준다. 반공투사로서의 정체성이 인간적 연대나 역사적 맥락마저 지워버린 것이다. 이러한 반공주의는 한국 정치에서 오랫동안 색깔공세와 지역 갈등을 부추기는 데 이용되어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해왔다. 김문수가 그 구태 정치의 언어를 21세기에 부활시킨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셋째, 민주주의 퇴행에 대한 우려이다. 김문수의 사례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얼마든지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 있는 언행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단지 선거만이 아니라, 법의 지배와 권력에 대한 견제, 그리고 무엇보다 **“상호 존중”의 문화다. 그런데 김문수는 선거에서 패배하거나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정책이 집행될 때, 이를 민주 절차의 산물로 존중하기보다 “국가 위기”나 “부정한 음모”로 규정했다. 이는 게임의 규칙에 승복하지 않는 반민주적 태도다. 이런 태도가 만약 광범위한 정치세력으로 확산되면, 체제 자체가 붕괴할 수 있다. 린츠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1930년대 와이마르 공화국이 몰락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보수 엘리트들이 히틀러 같은 극단주의자들과 결탁하고 민주 규칙을 경시한 것이었다 . 물론 현재의 한국이 그런 극단 상황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민주주의 퇴조(democratic backsliding)**는 어느 사회에서나 서서히 진행될 수 있다. 선거의 연속성은 유지되지만, 민주주의의 정신이 훼손되는 현상에 대해 학자들은 경고하고 있다 . 김문수 현상은 한국 민주주의도 포퓰리즘과 극단주의의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일깨웠다. 다행히도, 그의 노골적 극우 노선은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정치적으로도 변방화되었다. 그러나 일부 권력자들이 그의 언설에 동조하거나 묵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내부 방어벽을 더욱 단단히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언론의 사실검증 강화, 시민교육을 통한 비판적 사고 함양, 보수진영 내 책임있는 지도자의 극단주의와 절연 등이 요구된다. 김문수와 같은 행태가 정치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시킬 때, 민주주의는 그러한 내부 공격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언어적 품격과 시민 담론의 문제이다. 김문수의 극단적 언행은 정치 담론의 품격 하락을 초래했다. 원색적 비난과 자극적 구호는 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지만, 남는 것은 증오와 반목뿐이다. 이는 정치 혐오와 냉소를 불러일으켜 시민들이 건전한 정치 참여를 꺼리게 만든다. 아렌트는 정치에서의 거짓과 선동이 결국 시민들을 공적 삶으로부터 철수시킨다고 보았다 . 김문수식 담론이 횡행하면, 지식인과 중도시민들은 정치를 토론하기를 포기하고 사회는 분노에 기반한 진영 결속만 남게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의 언행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정치문화 전반에 퍼뜨리는 악영향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건강한 민주정치에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의견이 상호 존중 속에 논박되어야 하나, 김문수는 토론보다는 선동, 경청보다는 독설을 택했다. 이는 정치의 저급화이며, 나아가 시민들의 정치 혐오 증폭으로 이어져 민주주의의 토대를 약화시킨다.
결론
김문수의 자서전 **『김문수는 다릅니다』**와 그 후의 정치행보는 한 개인의 일대기를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변천과 도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산업화 세대의 가난을 몸으로 겪은 노동자, 군부독재에 맞선 운동권 투사, 민주화 이후 제도권에 입성한 개혁적 보수 정치인, 그리고 탈권위주의 시대의 극우 포퓰리스트라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얼굴들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이 다중적 페르소나는 그의 표현대로 **“시류에 흔들린 것이 아니라 자기 성숙의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 그러나 정치학적·역사적 평가는 그의 자기평가와 다르다. 이념의 스펙트럼을 한끝에서 다른 끝까지 오간 흔치 않은 행로는, 일관된 신념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권력 추구의 기회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말년에 보여준 극단주의적 행태는 그의 공적 기여보다 민주주의에 끼친 해악이 더 크게 부각되는 결과를 낳았다.
김문수 현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민주사회에서는 영웅도 배신자도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민주화 투사로 추앙받던 인물도 새로운 맥락에서는 민주주의의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 이는 인물에 대한 맹목적 신뢰보다, 행위와 결과에 대한 지속적 감시와 평가가 중요함을 시사한다. 둘째, 이념은 유용한 나침반이지만, 이념적 맹신은 폭주를 낳는다. 김문수는 좌우를 막론하고 이념에 몰입한 나머지 현실과 유리되는 오류를 범했다. 정치이념은 현실과 대화하며 유연하게 적용될 때 사회를 개선할 수 있지만, 김문수처럼 이념을 투쟁의 깃발로만 간주하면 타협과 조정의 정치는 사라진다. 셋째, 민주주의는 자기방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표현의 자유를 악용한 허위선동, 제도 밖에서의 권력 다툼 시도 등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난다. 이를 방치하면 한 개인의 일탈이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김문수의 사례는 민주주의의 관용이 어떻게 반민주적 세력에 의해 악용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민주주의 수호자들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음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김문수에 대한 평가는 시간의 법정에 맡겨져 있다. 그가 남긴 **긍정적 유산(노동운동 기여, 지방행정 성과)**과 부정적 유산(분열과 선동) 중 무엇이 더 오래 기억될지는 앞으로 한국 정치사회가 어떤 경로를 걷느냐에 달렸다. 만약 한국 민주주의가 앞으로도 성숙한 토론문화와 포용의 정치를 발전시켜나간다면, 김문수의 극단주의는 일시적 해프닝으로 잊혀질 것이다. 반면 정치권이 계속 극단대결에 매몰된다면, 김문수의 이름은 민주주의 퇴행의 한 상징으로 역사에 남을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적 권모술수, 슘페터적 엘리트주의, 아렌트적 전체주의 조짐, 달의 다원주의 부정, 린츠의 불충성 정치가 모두 뒤섞인 김문수 현상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는 어떤 정치문화를 지양하고 지향해야 할지 성찰해야 할 것이다. **“김문수는 달랐다”**는 책 제목의 선언은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그는 달랐고, 그 다름은 한국 정치에 경종을 울렸다. 이제 한국 민주주의가 그 다름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남은 과제다.
주석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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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바다. (2018, May 23). 운동권에서 태극기집회까지 김문수의 삶 – 책 <김문수 스토리 靑>을 읽고. 브런치스토리.
3.김문수. (2018, 5월 3일). “문재인 대통령, 북한 김일성 사상 존경하는 사람”. YTN.
4.오마이뉴스. (2022, 10월 14일). 극우 본색 드러낸 김문수 “전광훈, 자유 민주주의 수호 목사”. 오마이뉴스.
5.노동자 연대. (2023). 윤석열의 선동에 결집하는 극우. 노동자 연대 신문.
6.Machiavelli, N. (1532). The Prince. (Goodreads 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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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Linz, J. J. (1978). The Breakdown of Democratic Regimes. (해석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