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의 가장 큰 강점은 유려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의 유려함은 다음에 올 구절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문장력이라고 배웠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정말 유려하다. 일반적인 작가라면 몇 개의 장으로 나누었을 법한 에피소드들을 주나영 작가는 하나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엮어낸다. 현재의 산책과 과거의 에피소드 사이의 전환도 아주 매끄럽게 이루어진다. 이 흐름 속에서 독자는 화자인 나와 남편인 현우가 나누는 짧은 산책 위로 겹쳐지는 여러 겹의 과거를 통해 하나의 감정적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이 소설은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이 상실은 죽음이나 명백한 이별 같은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다. 작가는 '잃어버림'이라는 보다 은유적이고, 때로는 일상적인 상황을 통해 상실의 감정을 말해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아이보리코스트에서 수화물을 잃어버리는 장면이었다. 이 일화는 단순한 여행 중의 해프닝으로 시작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현우는 내 표정을 살피는 듯하더니 뭐 그런 말을 하느냐고 얼버무렸다. 현우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뿐이었지만, 고개를 조금 떨구는 현우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아이보리코스트에서 수화물을 잃어버린 날도 그랬다. 공항에서 한 시간 동안 수화물을 기다렸다. 탑승객들이 수화물 벨트 위의 여행 가방을 하나둘 가져갔다. 어떤 가방은 뒤집혀 있어서 우리 것인가 싶어 가보면 아니었다. 수화물 벨트 위에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기이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벨트도 멈췄다. 혹시나 해서 옆 수화물 벨트까지 들여다보았지만, 가방은 없었다. 현우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 서두르자고 하지 않았냐고, 남의 가방을 가져가는 사람이 있다며 언성을 높였다.
수화물 분실 카운터로 가서 가방이 없어졌다고 하자 직원은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내가 이름과 주소를 적는 동안 현우는 비슷한 가방을 끌고 가는 사람을 보면 따라가서 가방에 붙은 태그를 확인했다. 사람들은 멈춰 서서 현우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서류를 제출했으니 가방을 찾으면 연락이 올 거라고 말했지만, 현우는 가방이 지금 어디 있냐고 계속 물었다. 기어이 직원에게 다가가 같은 질문을 했고, 직원은 내일까지 수화물이 도착하지 않으면 몬트리올 협약인지 바르샤바 협약인지에 맞게 보상한다고 대꾸했다.
아니요, 지금 내 가방은 어디 있냐고요
현우가 세 번이나 물었을 때에야 직원은 무언가를 적던 펜을 책상에 내려두고 고개를 들었다.
이봐요, 아프리카에서 지연은 오지 않는다는 말과 같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요?
현우는 그제야 가방이 어디 있냐고 묻지 않았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현우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지 않는 걸 기다리는 일, 그건 현우가 오랫동안 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환전소에 줄을 서 있던 가족이 떠오른다. 줄어들지 않는 줄에 서서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할 순록 인형을 만지고 있던 아이를. 현우도 가끔 그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 아이는 금발이었다가 갈색 머리이기를 반복했는데, 정작 우리는 서로에게 그날 도착하지 않은 수화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또다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걸.
이 장면 속에서 현우는 계속해서 오지 않는 걸 기다리고 있다. 그건 수화물을 넘어 지나간 사랑, 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둘이 놓치고 있는 건 가방이 사라졌던 그 순간 말하지 못한 감정이나 나누지 못한 이해, 또는 전하지 못한 위로다. 주나영 작가는 이 상실을 구체적인 경험으로 그려낸다. 그날 도착하지 않은 수화물에 대해 둘은 입을 열지 않는다. 상실은 말해지지 않지만, 그 상실이 만들어낸 균열은 분명하게 감지된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나와 현우 두 사람뿐이며, 현우는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독자는 현우의 말, 눈빛,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현우의 상실과 고독에 동화된다. 현우는 어떤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이며, 그 상처는 현우가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안고 가야 할 무언가로 그려진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면, 이 소설이 단순히 그때의 감정을 기억하려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공유하지 못했던 시간을 애도하고, 그 시간을 다시 건드려 보고자 하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그 잃어버린 것을 우리는 지금 이 산책을 통해 되짚고 있는 거다. 마치 오지 않을 걸 기다리는 일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이.
여기에 더해 아이보리코스트에서 잃어버린 수화물이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왔다는 걸 상기하면 이 소설의 짜임새에 감탄하게 된다.
<우리의 산책>은 제목처럼 소박하고 조용한 작품이다. 짧은 산책 속에서 둘은 말하지 못한 슬픔을 나눈다. 이 잔잔한 산책에 독자도 함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정말 탁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