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들으니, 올적합(兀狄哈)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 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성종실록 275권, 성종 24년(1493년) 3월 14일 기묘 3번째기사
-이는 성종조때 일어난 이는바 고산리 전투(정벌)의 성과입니다. 위의 은탄 웹툰의 장면에서 첫 번째 컷, 두 번째 컷과 비슷한 언급이 나오죠. 그런데, 은탄 웹툰에선 여진족들이 조선군을 다소 비하하는 언사를 내뱉은 것에 비해 이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에선 야인여진(동해여진 곧 제성 올적합)이 조선국이 비록 강대국이긴 하나, 어떻게 울지현을 넘겠냐고 언급하는 것을 봐서 조선국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 경외하는 걸 기본으로 깔고 전황을 파악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지요. 물론, 조선군은 깊숙히 공격해 들어가서 올적합을 크게 격파하였고, 타 여진 부족들이 이를 보거나 듣고선, 올적합도 저렇게 조선군에게 당하는데, 자신들이 어떻게 조선군을 당해내겠냐며 서로 모여서 제단을 만든 뒤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다시는 조선과 흔단을 만들지 앟고, 조선국에 영구히 신복하겠다고 약조할 정도였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신은 말하기를, ‘대인의 말이 옳소. 그러나 역시 믿을 수 없으니 내가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은데 대인이 싫어하지 않겠소? 지금으로부터 화와 복이 전적으로 대인에게 달려 있소. 지금 나를 따라온 군졸(軍卒)이 자못 많아 그 도로의 험하고 평단한 것을 모두 역력히 알았으니, 국가에서 만약 공격을 하려면 그 형세가 매우 용이하오. 대금(大金, 금나라)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 대인(大人)도 일찍이 듣지 못했소?’ 하니, 달한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그런 강한 자도 오히려 토벌하기를 이와 같이 쉽게 하였는데, 하물며 이 땅은 우리 나라에서 거리가 험한 길로 와도 사흘 길이며 평탄한 길로 오면 겨우 이틀 길밖에 아니 되니, 대인이 만약 귀순한다면 영원한 세대를 편안히 업에 종사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자손이 씨가 없을 것이오. 내 말이 일면으로는 대인에게 공갈치는 것 같지만 일면으로는 대인을 보호하는 것이니, 이 말을 잊지 마오.’ 하니, 달한은 좌우를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도 이 말을 체념(體念)하라.! 이 땅의 도로가 확실히 올적합(兀狄哈)의 사는 곳보다 평이하니, 만약 장난을 하면 와서 토벌하기가 진실로 쉬울 것이다. 올적합은 대금(大金)으로도 능히 제어하지 못했는데 지금 고려(조선)는 능히 깨뜨렸으니 하물며 우리들이겠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고려에서 만약 도로를 다 알고 있다면, 장난하는 자가 스스로 굴복할 것이니, 사신은 모름지기 도로를 소상히 알고 가라.’ 고 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 28권, 연산 3년(1497년) 10월 7일 을해 2번째기사
-이는 성종조때 일어난 신해북정의 성과입니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웠던 시절땐 더할 나위 없이 강성하여서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송나라까지 공격하여서 송나라의 수도(도성, 도읍)인 개봉(카이펑)성까지 함락하고 송나라가 정강지변을 당하게 했으며, 송나라를 장강(양자강, 양쯔 강) 이남으로 몰아냈을 정도였지요. 그나마 고려국만이 물리적인 충돌 곧 전쟁 없이 금나라와 역상하관계를 체결했을 정도이니까요(이는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에도 언급되어 있다시피, 고려국의 제 16대 임금인 예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100년대 초반때 윤관 장군으로 하여금 총 17만여명의 대군으로 여진족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였는데, 여진족들이 이 때에 고려군에 의해 크게 격파되어 금나라를 세운 이후에도 고려국과만은 물리적인 충돌을 피하였지요.). 그런데 이 금나라조차 만주대륙의 동북부 방면인 동북만주 곧 연해주에 거주하는 올적합(야인여진, 동해여진, 제성 올적합)을 정벌하려 하였지만 마침내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국은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491년경에 허종 장군으로 하여금 총 4만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올적합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여 크게 성공하였고, 올적합들은 근거지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타 여진 부족들의 종이 되고 말았다고 해요. 이로 인해 조선국은 여진계 조선인 관리인 동청례를 삼위(건주삼위) 경차관, 선유관으로 삼아 건주삼위에 사신단으로 파견했을 때, 신해북정의 성과를 예시로 들며 건주삼위가 조선국을 보다 잘 섬기도록 종용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고, 건주삼위 역시 이에 수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국의 군사력이 금나라의 군사력보다 강성하다고 평가받게 할 정도로 성종조때 단행된 신해북정의 성과가 굉장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고산리 정벌과 신해북정의 결실에 관해선 아래에 첨부한 기록들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조로 말씀드리자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최전성기 당시에는 거란족의 요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멸망시켰고, 중국의 송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정강지변을 일으켰고, 송나라의 수도(도성, 도읍)인 개봉(카이펑)성까지 함락하고, 송나라를 장강(양자강, 양쯔 강) 이남으로 밀어냈을 정도였지요. 이러한 금나라가 침공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국가가 바로 우리나라 곧 고려국이였지요. 이는 고려국의 제 16대 임금인 예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100년대 전반에 예종의 어명을 받든 윤관 장군이 이끄는 총 17만명의 고려국 대군이 여진 정벌에 성공한 영향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죠. 금나라는 고려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 상호간 대외적 관계에서 역상하관계를 체결하는 것에 만족하였지요. 이는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에도 언급되있을 정도죠.
이는 조선국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신해북정, 고산리 정벌(좀 더 넓게 보면 조선국의 제 7대 임금인 세조의 정해서정까지 포함) 이후 나온 기록인데요(성종조의 신해북정, 고산리 정벌 이전 시기땐 나오지 않는 기록입니다.). 건주여진을 이루는 건주위(건주본위, 건주중위), 건주좌위, 건주우위 세 부족장(추장)들이 조선국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을 두고서 황제, 대황제로 섬기었으며, 조선국을 두고서 대도(대국, 대방)로 섬기는 것은 물론, 금나라의 황제 곧 금황제 존함을 진상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금황제는 곧 만주황제 그러니까 여진족 자신들의 국가원수, 황제로써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성종이 여진족(좀 더 정확히 말해선 건주여진)에게 만주황제로 불리어진 건데, 이건 매우 대단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금황제인 완안 아골타, 초대 후금황제인 애신각라 누르하치도 정작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황제임을 자칭하는데 그쳤었지만(이는 후대 임금들이 금황제, 후금[청]황제의 타칭화를 해내는 것에 성공해내지요.), 성종은 그 반대였으니까요. 자칭보다 타칭이 어려운 건 다들 알 것이구요. 심지어 당시, 중국의 명나라는 여진족에게 이런 호칭에 추존되지는 못하였지요. 나아가, 조선 시대 이전의 우리나라 역대 왕조(고조선~고려)들이 만주대륙의 모든 여진족들에게 섬김을 받아왔지만, 이는 여진족들이 자신들보다 상대적으로 강성한 다른 나라의 임금으로써 섬겨온 것이였다면,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이 건주여진에게 금황제 존함을 진상받은 것은 여진족들이 조선국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을 여진족들이 자신들의 임금으로써 섬기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고, 또, 조선국이 옛 여진족의 금나라의 강성함에 비견되었거나 초월한 존재로 여겨졌기에 가능한 일이였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당나라 제 2대 임금인 태종, 제 3대 임금인 고종이 각각 자신의 재위시기인 기원후 630년경, 657년경에 몽골초원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쳐있는 동돌궐, 서돌궐을 정벌해내었고, 이들로부터 '천가한' 이라는 존함을 진상받은 것과 유사한 사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조선국 제 9대 임금인 성종이 여진족들로부터 금황제 존함을 진상받은 것은 조선 성종이 동방의 천가한이 된 것과 진배 다를 것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것은 세간에서 대체역사의 개념으로 언급해오고 있는 만반도(만주대륙+한반도), 고구려국 중심의 삼국통일, 신라국과 발해국의 통일이 이미 실제한 역사임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지요. 더군다나, 조선이 만주대륙(모든 여진족들의 거주지죠.)을 직접적으로 통치, 지배한 것은 아니였었지만, 여진족들이 조선국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을 자신들보다 강성한 다른 나라의 임금으로써 섬기는 차원을 넘어서 여진족 자신들의 임금 곧 금황제(금나라 황제, 만주황제)로써 섬긴다는 뜻을 표방한 것이니만큼, 의의가 남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상당히 흥미롭죠.
이를 보면, 이 게시글의 가장 상단에 첨부된 은탄 웹툰에서 조선군의 여진 정벌 및 만주대륙에 대한 장악이 어떤 의미로든 실제했고, 이렇게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을 보면, 오히려 실제 조선의 여진 정벌 및 만주대륙의 모든 여진족들에 대한 장악력, 권위 등이 은탄 웹툰에서 묘사한 조선의 그것보다 더 강성한 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평안도 관찰사 신상(申鏛)이 치계하기를,
"주청사(奏請使)의 지로 갑사(指路甲士)가 와서 말하기를 ‘탕참(湯站) 땅에 이르러 천호(千戶) 김영수(金英壽)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지난 10월에 달자(㺚子)가 침범했을 때, 탕참 지휘(湯站指揮)가 그가 거느린 군사에게 모두 흰 옷을 입혀 싸움에 임하여 조선(朝鮮)의 용군(勇軍)으로 싸움을 도우러 왔다고 외치게 하고 편전(片箭)으로 달자를 쏘아 죽이매 달자가 그 편전을 주워 보고는 과연 조선 사람의 화살이라 하여 말을 버리고 흩어졌다.」했다.’ 합니다. 야인(野人) 등은 그들이 속은 줄 모르고 틀림없이 우리에게 혐의를 둘 것이니, 방어하는 모든 일을 더욱더 조치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탕참 지휘가 그 군사로 하여금 흰 옷을 입고 조선군이라 하며 달자와 싸우게 하매 달자가 과연 의심하고 흩어졌다 한다. 근래에 재변이 있고, 또 얼음이 얼 때에 이런 일이 있으니 변방의 전쟁의 기미가 이미 발생했다. 위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있다는 뜻을 대신이 알게 하려 한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박군효가 아비를 죽인 그 간악한 일은 오로지 교화가 밝지 못한 소치이다. 내가 스스로 깊이 자책하는 바이나, 이 뜻을 받아 교화를 베푸는 것은 대신의 직책이니 대신에게 그것을 알리도록 정부의 낭관(郞官)을 불러 말하라."
하였다.
-중종실록 31권, 중종 12년(1517년) 12월 14일 을묘 2번째기사
평안도 절도사 이장생이 치계(馳啓)하였다.
"금년 11월 25일에 건주위(建州衛)의 야인 낭로오토(浪老吾土) 등 7명이 만포(滿浦)에 와서 말하기를, ‘지난 10월 15∼16일 경에 삭시응가(朔時應可) 등이 요동(遼東)에 들어가 침략할 때, 요동의 군사가 백의(白衣)를 입고 흑초립(黑草笠)을 쓰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활쏘는 기술과 말타는 솜씨가 매우 날래고 용맹스러워 중국의 병졸과 같지 않았으므로, 혹시 조선의 군마(軍馬)가 싸움을 도와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습니다. 진장(鎭將)이 답하기를 ‘만일 천자가 우리 나라에 징병(徵兵)하였다면, 마땅히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곧장 너희 부락을 공격하였을 것이나, 징병하는 조서도 없었고 또 너희와 본래 원한을 맺은 일이 없는데, 어찌 차마 너희를 공격하겠는가?’ 하였더니, 낭로오토가 답하기를 ‘반드시 요동이 조선 사람을 가장하여 우리들을 위협하려고 한 듯하다. 원컨대 영공(令公)은 패(牌)를 만들어 우리 성명을 새긴 다음 도장을 찍어 주면, 조선의 병마가 들어올 때 그것을 보여 죽음을 면하고자 합니다.’ 했습니다."
-중종실록 31권, 중종 12년(1517년) 12월 24일 을축 2번째기사
이는 조선국의 제 11대 임금인 중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517년경의 일인데요. 중국의 명나라군이 조선군으로 위장하여 건주여진을 대파해낸 것 그리고 건주여진측에서도 자신들이 당시에 목격한 중국의 명나라군이 백의를 입고 흑초립을 쓰기도 하였는데, 이들이 활쏘는 기술과 말타는 솜씨가 매우 날래고 용맹스러워 중국(명나라) 병졸과 같지 않아서 조선군이 중국의 명나라군을 도와준 것이 아니냐고 오해했을 정도였지요. 이는 중국의 명나라군, 건주여진 둘 다 모두 조선국의 군사력이 중국 곧 명나라의 군사력보다 강성하다고 인식한 것이지요. 중국의 명나라군은 조선국의 강성한 군사력의 위세를 빌린 거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즉, 조선군은 과거의 여진족의 금나라군보다 강성함은 물론, 당시 중국의 명나라군보다 강성한 전세계 제일의 군사력을 지녀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기록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대단히 흥미롭지요.
이 역시 은탄 웹툰에서 묘사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여진족을 대파하고 만주대륙을 장악한 성과를 보여낸 조선군의 무기를 수입하길 원하는 대체역사가 묘사되는데요. 이걸 두고서 '경복궁 샷타 내려~' 라는 말로 개그스럽게 묘사했지요. 그러나, 이 역시 실제 기록들을 살펴서 보면, 실제 조선보다 못하다면 못한 모습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중종실록을 보시다시피, 중국의 명나라군의 요동을 관리하는 탕참 지휘가 명나라군을 복식, 무기 모두 조선군으로 위장하였고, 조선의 용군이 명나라군을 도우러 왔다고 외치게 하고, 조선군의 무기인 편전으로 여진족을 사살하였고, 여진족이 이를 보고선 명나라군을 조선군으로 오인해 말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구요. 이 일로 인해 여진족 자신들이 당시에 목격한 중국의 명나라군이 백의를 입고 흑초립을 쓰기도 하였는데, 이들이 활쏘는 기술과 말타는 솜씨가 매우 날래고 용맹스러워 중국(명나라) 병졸과 같지 않아서 조선군이 중국의 명나라군을 도와준 것이 아니냐고 오해했을 정도였지요. 이는 중국의 명나라군, 건주여진 둘 다 모두 조선국의 군사력이 중국 곧 명나라의 군사력보다 강성하다고 인식한 것이지요. 중국의 명나라군은 조선국의 강성한 군사력의 위세를 빌린 거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즉, 조선군은 과거의 여진족의 금나라군보다 강성함은 물론, 당시 중국의 명나라군보다 강성한 전세계 제일의 군사력을 지녀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국의 명나라 조정은 전세계 최강대국이였고, 여진족의 금나라군도 그러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유럽권에서도 낙후된 곳인 동유럽권에 한정된 맹주였던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은탄 웹툰의 조선군 묘사보다, 실제 기록의 조선군에 대한 묘사가 오히려 더 강성하게 언급되었음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장녕(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이 말하기를,
"금일의 칙서(勅書)는 중국[明] 조정에서 저 사람들을 편드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朝鮮) 은 본래 ‘예의의 나라[ 禮義之邦, 예의지방 ]’ 이므로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명 태조 주원장) 이래 본국(本國, 조선국)을 대우하는 예(禮)가 다른 나라와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 위의 항목의 사의(事意)를 일일이 회주(回奏)하신다면 중국[明] 조정에서 저 사람들을 금지시켜 다시는 원수를 갚는 짓을 행하지 못하도록 할 것인데, 실로 황제 폐하의 지극한 은혜이요, 조선(朝鮮)의 큰 복(福)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머지 사연(辭緣)은 다 회주(回奏)에 쓸 것이니, 대인(大人)은 여러 말 할 필요가 없소."
하였다.
(중략)
장녕이 대답하기를,
"이미 자세히 알았습니다. 중국[明] 조정에서도 조종(祖宗) 이래로 귀국(貴國, 조선국)을 심히 후하게 대접하였으니, 귀국(貴國)의 사신이 이르면, 중국[明] 조정에서 으레 제일의 반열(班列)에 위차(位次)하게 하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그러한 일이 없으니 이것이 그 하나이요, 황제(皇帝)께서 신하들에게 연회(宴會)할 때 전상(殿上)에 시좌(侍坐)하니 이것이 그 둘째이요, 귀국(貴國)에서 자제(子弟)를 보내어 입학(入學)할 때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 주원장)께서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것이 그 세째입니다. 그 나머지 대접하기를 후하게 한 것을 일일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중국[明] 조정에서 지금 칙서(勅書)를 내린 것도 사건의 시말(始末)을 알아서 저 사람들을 경계하고 금지하여 와서 난(亂)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고자 함이니, 전하께서는 모름지기 이 뜻을 아시고 명백하게 회주(回奏)하여 주소서."
하였다.
-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1460년) 3월 2일 기묘 1번째기사
또 야인(野人)이나 일본(日本)이나, 삼도(三島)나 유구국(琉球國) 같은 사이(四夷)가 모두 내정(來庭)하였으며, 아름다운 징조와 이상한 상서가 모두 모이어 만물(萬物)이 흔쾌하게 보니, 운수가 형통하고 아름다운 데에 붙어서 오직 소국(小國)만이 왕을 사모할 뿐이 아니고, 중국이 우리 전하를 대접하는 데 이르러서도 그 예(禮)와 그 의(義)는 옛보다 융숭하고, 열국(列國)보다 성대하니, 우리 전하의 공덕(功德)이 성하지 않고서는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삼황(三皇)도 마땅히 도(道)를 양보하고, 이제(二帝)도 마땅히 덕(德)을 양보하며, 삼후(三后)도 마땅히 공(功)을 양보할 것입니다.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년) 3월 25일 乙酉 4번째기사
중궁(中宮)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받고 이어 내외 명부(內外命婦)의 축하를 받았다. 황제의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우리 조종이 천도(天道)를 봉행하여 인(仁)이 만방을 덮으므로, 봉작(封爵)의 은혜가 멀다고 해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내자(內子)를 추봉(推封)하는 의식은 오직 예의지국(禮義之國)에만 특별히 시행하노라. 성헌(成憲)이 구존하니 잊어서는 안 된다. 너 윤씨(尹氏)는 곧 조선국(朝鮮國)의 배신(陪臣) 윤지임(尹之任)의 딸로서 내칙(內則)을 따라 어진 임금의 계배(繼配)가 되었는데, 내정(內政)에 마땅하고 치화(治化)에 도움이 있으리라. 이에 특별히 국왕의 청을 따라 조선 국왕의 계비로 봉하고 고명을 내린다. 아, 순종함으로 임무를 삼았으니 일찍이 어미의 훈계를 들었고, 경계로 서로 도우니 또한 제사가 내조를 힘입으리라. 언제나 공경하고 삼가 다 같이 아름다운 상서를 맞이하리로다."
하였다. 하사한 관복과 물건은, 주관(珠冠) 1정(頂), 대홍저사협대삼(大紅紵絲夾大衫) 1건(件), 청저사채수권금적계협배자(靑紵絲綵繡圈金翟鷄夾褙子) 1건, 청선라채수권금적계하피(靑線羅綵繡圈金翟鷄霞帔) 1건, 녹세화저사철채수적계단삼(綠細花紵絲綴綵繡翟鷄團衫) 1건, 홍암화저사협오아(紅暗花紵絲夾襖兒) 1건, 청암화저사협군(靑暗花紵絲夾裙) 1건, 아홀(牙笏) 1부(部), 금추두(金墜頭) 1개, 잡색저사(雜色紵絲) 4필, 잡색라(雜色羅) 4필, 서양포(西洋布) 10필 등이다.
-중종실록 32권, 중종 13년(1518년) 4월 21일 기축 2번째기사
중국의 명나라 조정은 자국의 조정(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와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오직 우리나라 곧 조선국에게만 일등 예우를 넘어서 특등 예우, 특별 예우를 베풀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네이버 '은탄' 웹툰에서 묘사한 국뽕 조선은 세간에서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실제 조선에 비해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이 다소 낮게 묘사된 그러니까 속된 말로 '너프' 되어 묘사된 점이 없잖아 있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유익한 참조가 됐으면 해요.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