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에서는 전세계 역사상에서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전세계 역사상에서 영원한 제국은 있어왔습니다. 정확히 표현을 하자면, 역사(문명) 시대가 시작된 이래 기원후 1800년대 중반(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이죠.)에 이르는 반만년의 시기 동안 변함이 없었던 전세계의 압도적인 양대 최강대국, 최선진국이여온 중국, 한국 때문인데요. 이에 대해선 아래의 관련 기록들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이문등록(吏文謄錄)》을 강(講)하다가 중국[中朝]에서 ‘외국인(外國人)의 출입(出入)을 수검(搜檢)하는 방문(榜文)’에 이르러서, 임금이 시강관(侍講官) 이명숭(李命崇)에게 묻기를,
"지금 우리 나라 사람이 출입할 때에도 수검을 하는가?"
하니, 이명숭이 대답하기를,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하여, 예(禮)로써 대우합니다. 신이 전일에 북경[京師]에 갔을 때 수검한다는 방문이 궐문(闕門)에 걸려 있었는데, 2, 3일 뒤에 곧 철거(撤去)하였으므로, 외랑(外郞)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예부 상서(禮部尙書) 추간(鄒幹)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조선은 예의의 나라로서 이것을 보면 반드시 우리에게 마음이 좁다고 할 것이니, 청컨대 보이지 말게 하소서.」하였기 때문에 철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영 신 등이 돌아올 때에도 수검한다는 영(令)이 없었습니다."
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 권건(權健)이 아뢰기를,
"신이 한명회(韓明澮)와 더불어 경사에 갔다 돌아올 때에는 수검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였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145권, 성종 13년(1482년) 윤8월 13일 기묘 3번째기사
이는 여러분들께서도 잘 보시다시피,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서 자국의 조정(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와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우리나라 곧 조선국이 예의지국(전근대 곧 전근현대[근현대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대 곧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들에 대한 통칭입니다.] 내내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에서 동양문명권 정확힌 동아시아[동북아시아]문명권이 가장 선진적인 문명권이여왔는데요. 동아시아문명권에서는 고급문화, 고급철학을 두고서 예의, 인의 이렇게 언급해왔죠. 이 동아시아문명권에서는 중국, 한국이 양대 최선진국이여왔지요.)이라고 하여, 예로써 대우한다는 뜻으로 전세계의 모든 나라의 사람들 중에서 오직 조선인들에게만 출입국을 할 때 수검(검사)을 시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의 사람들이 중국의 명나라에서 출입국을 할 때 오직 조선인들에게만 수검(검사)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지요. 이는 그만큼 조선국이 번영, 융성한 나라여왔기에 가능한 혜택들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현 우리 대한민국도 외국에 가서 우리 대한민국의 여권을 보여주면, 외국의 출입국심사대에서 프리패스를 시켜준다고는 하지만, 검사를 안 하지는 않는데(프리패스한 뒤에도 세관검사라는 과정이 국적을 상관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행해지게 되어있습니다. 보안검사도 마찬가지이지요.), 조선국은 오직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출입국을 할 때에 수검(검사)을 받지 않았으니, 현 우리 대한민국에게도 시시하는 바가 크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아가, 기원후 1800년대 중반(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한 시점이지요.)~1900년대 중반의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인 영국,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인 기원후 1900년대 중반 이후의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인 미국도 다른 국가들에게 해주지 않아오는 대접(미국도 자국과 더불어서 영미권의 국가들인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에게 해주지 않은 대접으로 보입니다.)을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조선국은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 동안 변함이 없이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이여온 중국에게 받아왔던 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이 상마연에서 천사에게 이르기를,
"어제 듣건대, 대인(大人)들께서 과인(寡人)을 주공(周孔)에게 비유하셨는데,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독서(讀書)는 반드시 의리(義理)의 정미한 속뜻을 알게 된 다음에야 겨우 학문에 통했다고 할 수 있는 법인데, 과인은 배웠다는 것이 고루하고 노무(魯莽)한 학문이니, 비록 독서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대인들을 만나게 되어 천번 만번이나 희한하고 다행한 일이라 하겠으니, 바라건대 두 분께서 아름다운 말과 좋은 교훈을 가지고 분명하게 나를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또한 차분히 교훈을 받기가 소원입니다."
하매,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학식이 천박한데, 이번에 와서 현명한 왕께서 가지고 있는 덕성(德性)과 학문에 근본한 바가 구비하지 않은 데가 없으심을 직접 보게 되어, 우리들로서는 한마디도 도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제(聖帝)께서 등극[龍飛]하신 첫머리에 두 분 대인께서 명을 받고 나오셨는데, 우리 나라[小邦]에서 반드시 잘못한 일이 많을 것이니, 두 분께서 분명하게 지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매, 상사가 말하기를,
"이번에 문헌(文獻)의 나라에 와보니, 위로는 현명한 왕으로부터 아래로 대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예의와 겸양(謙讓)이 풍속을 이루어 법도가 환하게 밝았는데, 우리들이 어떻게 그런 속에서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필연(筆硯)과 지묵(紙墨)은 곧 문방(文房)의 미미한 것이므로 비록 가져다 쓰신다 하더라도 염치에 손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매, 두 사신들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우리들이 사리와 법도를 준수할 것으로 알고 차출하여 나오게 된 것이니, 비록 미미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받게 된다면 이는 조정을 속이는 일입니다."
하였다.
-중종실록43권, 중종 16년(1521년) 12월 9일 정해 3번째기사
이는 조선에 파견된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의 정사가 조선의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이 굉장히 뛰어나 자국(중국의 명나라)이 교화시킬 것이 없다는 극찬을 해준 기록입니다. 이는 굉장히 의의있는 기록이 아닐 수 없는데요. 이를 뒷받침을 해주는 기록들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종실록265권, 성종 23년(1492년) 5월 29일 무술 1번째기사
이 역시 마찬가지인 기록이지요.
공용경(龔用卿)이 중국 조정에 돌아가서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문물(文物)과 예의 법제(禮義法制)가 중국과 다름이 없다.’고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문장(文章)이 부끄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부 상서도 공천사의 말을 듣고 감탄해 마지아니하여, 우리 나라 사신을 보고 칭찬하기를 ‘그대 나라의 문물과 예의 법제가 중국과 다름없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하였고, 또 옥하관(玉河館)의 주사(主事)와 서반(序班) 등에게 주의시켜 조선 사람은 삼가 소홀히 대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이는 다만, 학문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매일 제술하는 것을 연습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중종실록 86권, 중종 32년(1537년) 11월 3일 무인 3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나라에서 조선국의 예의, 문물의 선진화 수준이 중국과 동급이라고 극찬해왔던 기록들 중 하나입니다.
장녕(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이 말하기를,
"금일의 칙서(勅書)는 중국[明] 조정에서 저 사람들을 편드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朝鮮)은 본래 ‘예의의 나라[禮義之邦, 예의지방]’이므로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명 태조 주원장) 이래 본국(本國)을 대우하는 예(禮)가 다른 나라와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 위의 항목의 사의(事意)를 일일이 회주(回奏)하신다면 중국[明] 조정에서 저 사람들을 금지시켜 다시는 원수를 갚는 짓을 행하지 못하도록 할 것인데, 실로 황제 폐하의 지극한 은혜이요, 조선(朝鮮)의 큰 복(福)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머지 사연(辭緣)은 다 회주(回奏)에 쓸 것이니, 대인(大人)은 여러 말 할 필요가 없소."
하였다.
(중략)
장녕이 대답하기를,
"이미 자세히 알았습니다. 중국[明] 조정에서도 조종(祖宗) 이래로 귀국(貴國, 조선국)을 심히 후하게 대접하였으니, 귀국(貴國)의 사신이 이르면, 중국[明] 조정에서 으레 제일의 반열(班列)에 위차(位次)하게 하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그러한 일이 없으니 이것이 그 하나이요, 황제(皇帝)께서 신하들에게 연회(宴會)할 때 전상(殿上)에 시좌(侍坐)하니 이것이 그 둘째이요, 귀국(貴國)에서 자제(子弟)를 보내어 입학(入學)할 때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 주원장)께서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것이 그 세째입니다. 그 나머지 대접하기를 후하게 한 것을 일일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중국[明] 조정에서 지금 칙서(勅書)를 내린 것도 사건의 시말(始末)을 알아서 저 사람들을 경계하고 금지하여 와서 난(亂)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고자 함이니, 전하께서는 모름지기 이 뜻을 아시고 명백하게 회주(回奏)하여 주소서."
하였다.
-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1460년) 3월 2일 기묘 1번째기사
또 야인(野人)이나 일본(日本)이나, 삼도(三島)나 유구국(琉球國) 같은 사이(四夷)가 모두 내정(來庭)하였으며, 아름다운 징조와 이상한 상서가 모두 모이어 만물(萬物)이 흔쾌하게 보니, 운수가 형통하고 아름다운 데에 붙어서 오직 소국(小國)만이 왕을 사모할 뿐이 아니고, 중국이 우리 전하를 대접하는 데 이르러서도 그 예(禮)와 그 의(義)는 옛보다 융숭하고, 열국(列國)보다 성대하니, 우리 전하의 공덕(功德)이 성하지 않고서는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삼황(三皇)도 마땅히 도(道)를 양보하고, 이제(二帝)도 마땅히 덕(德)을 양보하며, 삼후(三后)도 마땅히 공(功)을 양보할 것입니다.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년) 3월 25일 乙酉 4번째기사
왕무가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조선을 한 집같이 보아 외국으로 대접하지 않습니다..."
-세종실록66권, 세종 16년(1434년) 10월 14일 정사 2번째기사
하물며 중국은 우리 나라를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 하여 대접하는 도리가 해내 제후(海內諸侯)와 다름이 없는데...
-성종실록46권, 성종 5년(1474년) 8월 24일 병오 4번째기사
신의 생각으로는,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가 봉(封)함을 받은 이래로 대대로 예의(禮義)를 지키었고, 중국도 또한 예의를 지키는 나라로 대우하기를 매우 중히 하였으며, 모든 번국(藩國)의 우두머리에 두었은즉, 이제 추봉(追封)하는 명(命)이 또 어찌 우리 나라를 낮추어서 경솔하게 근거없는 일을 하였겠습니까? 또 임금의 일은 반드시 기록하여야 하는데, 기록하고서 법이 될 게 없으면 후사(後嗣)가 무엇을 본보기로 삼겠습니까? 반드시 감히 아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종실록59권, 성종 6년(1475년) 9월 19일 을축 2번째기사
"... 그러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대우함에 있어 은혜로 베푸는 예절이 매우 후(厚)해서 하사품도 도타웠는데, 이번 성절(聖節)의 행차에서도 호송군이 3백이 넘는 기병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천자(天子)의 명령이 아니고서 그렇게 되겠는가? ..."
-성종실록112권, 성종 10년(1479년) 12월 21일 임신 4번째기사
이것은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서 자국의 조정(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와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우리나라 곧 조선국에게만 특례를 변함이 없이 베풀어왔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국의 사신단을 호송할 땐 300명이 넘는 기병대를 동원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 기록입니다.
임금이 악차(幄次)에 나아가니, 두 사신이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를 불러 사물(賜物) 주는 것을 마치고 나와 자리[次]에 나아갔다. 임금이 두 사신에게 전(殿)에 오르기를 청하니, 두 사신이 재배(再拜)하거늘 임금이 답배(答拜)하고,
"과인(寡人)이 삼가 칙서(勅書)를 읽으니, 이르기를, ‘성교(聖敎)가 미치는 곳은 의당 은택이 미쳐야 한다.’고 하였으니, 내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해(四海)의 밖은 무려 만국(萬國)이 되는데, 우리 나라는 대대로 충성을 돈독히 한다 하여 내려 주신 은전이 편벽되게 융성하고, 또 두 대인(大人)을 선발하여 조칙(詔勅)을 받들고 오게 하시어 황은(皇恩)이 답지(沓至)하였으니, 감격함이 망극(罔極)합니다."
하였는데, 두 사신이 말하기를,
"오늘 현왕(賢王)께서 두 번씩이나 번거롭게 거둥하시니 황공 황공(惶恐惶恐)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강을 건너온 이래로 곳곳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해 주심을 거듭 받으니, 현왕(賢王)의 두터운 예우에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의상 당연한 것인데, 어찌 감사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성종실록 214권, 성종 19년(1488년) 3월 13일 정축 11번째기사
중궁(中宮)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받고 이어 내외 명부(內外命婦)의 축하를 받았다. 황제의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우리 조종이 천도(天道)를 봉행하여 인(仁)이 만방을 덮으므로, 봉작(封爵)의 은혜가 멀다고 해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내자(內子)를 추봉(推封)하는 의식은 오직 예의지국(禮義之國)에만 특별히 시행하노라. 성헌(成憲)이 구존하니 잊어서는 안 된다. 너 윤씨(尹氏)는 곧 조선국(朝鮮國)의 배신(陪臣) 윤지임(尹之任)의 딸로서 내칙(內則)을 따라 어진 임금의 계배(繼配)가 되었는데, 내정(內政)에 마땅하고 치화(治化)에 도움이 있으리라. 이에 특별히 국왕의 청을 따라 조선 국왕의 계비로 봉하고 고명을 내린다. 아, 순종함으로 임무를 삼았으니 일찍이 어미의 훈계를 들었고, 경계로 서로 도우니 또한 제사가 내조를 힘입으리라. 언제나 공경하고 삼가 다 같이 아름다운 상서를 맞이하리로다."
하였다. 하사한 관복과 물건은, 주관(珠冠) 1정(頂), 대홍저사협대삼(大紅紵絲夾大衫) 1건(件), 청저사채수권금적계협배자(靑紵絲綵繡圈金翟鷄夾褙子) 1건, 청선라채수권금적계하피(靑線羅綵繡圈金翟鷄霞帔) 1건, 녹세화저사철채수적계단삼(綠細花紵絲綴綵繡翟鷄團衫) 1건, 홍암화저사협오아(紅暗花紵絲夾襖兒) 1건, 청암화저사협군(靑暗花紵絲夾裙) 1건, 아홀(牙笏) 1부(部), 금추두(金墜頭) 1개, 잡색저사(雜色紵絲) 4필, 잡색라(雜色羅) 4필, 서양포(西洋布) 10필 등이다.
-중종실록 32권, 중종 13년(1518년) 4월 21일 기축 2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 조정에서 자국(중국의 명나라)의 조정에 입조해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조선국에게만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에 해당되는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오는 것은 물론, 아예 조선국의 또다른 국호(국명)로 예의지국 곧 최선진국 이라고 언급했을 정도입니다. 요새로 치면, 현 우리 대한민국을 두고 대한민국이 아닌 최선진국 이렇게 호칭한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이를 보면, 현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전성기가 아니라, 그 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 북한이 우리나라 역사상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최약체고, 그 다음이 현 우리 대한민국이라고나 할까요? 이는 현 중국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만큼, 중국과 한국의 역대 왕조들이 지녀온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이 굉장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현 중국과 한국은 근래에 본격적인 약진을 하면서 이를 본격적으로 복구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참조:전세계 문명사에서 중국, 한국의 앞에선 그 어떤 국가라도 근본을 내세울 수 없음을 보다 분명하게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근현대사가 시작되기 이전인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에서 종합적으로 보았을 땐 중국, 한국을 양대 최선진국으로 하는 동아시아(동북아시아)문명권이 가장 선진적인 문명권이여왔던 것이 괜한 것이 아니죠(동아시아문명권은 유교[유학, 성리학]문명권, 한자[한문]문명권으로도 볼 수 있지요. 즉, 국가 운영 사상은 유교, 국가 공용 문자는 한자인 문명권, 문화권인 것이죠. 여기에 기인해서 보면, 예로부터 대대로 안남국, 월남국, 교지국 이렇게 불려온 베트남도 지리적으로는 동남아시아~남태평양권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동아시아문명권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지요. 베트남인의 외모도 베트남의 본류인 북베트남의 사람들은 동아시아인 형태의 외모인 것과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명백한 동아시아문명권이지요. 동아시아문명권은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서방으로는 티베트고원과 위구르고원 그리고 서북방~북방으로는 몽골초원, 만주대륙 그리고 남시베리아권까지라고 할 수 있죠.).
https://m.ppomppu.co.kr/new/bbs_vie...
https://m.ppomppu.co.kr/new/bbs_vie...
https://m.ppomppu.co.kr/new/bbs_vie...
https://m.ppomppu.co.kr/new/bbs_vie...
https://m.ppomppu.co.kr/new/bbs_vie...
https://m.ppomppu.co.kr/new/bbs_vie...
https://m.ppomppu.co.kr/new/bbs_vie...
https://m.ppomppu.co.kr/new/bbs_vie...
https://m.ppomppu.co.kr/new/bbs_vie...
https://m.ppomppu.co.kr/new/bbs_vie...
https://m.ppomppu.co.kr/new/bbs_vie...
https://m.ppomppu.co.kr/new/bbs_vie...
세간에서는 우리나라 곧 조선이 중국의 명나라를 짝사랑했지만, 중국의 명나라는 조선국을 본질적으로는 멸시해왔다면서 조선의 우둔한 대외 정책이라고 언급해오는 경우가 아직도 많은 편입니다. 이는 영화, 드라마, 웹툰 등의 매체에서도 흔하게 묘사되고는 하지요. 그러나, 이는 굉장한 오해입니다. 오히려, 상호간 쌍사랑하는 관계였지요. 중국의 명 조정도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조선에게만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에 해당되는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왔으며, 규모가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작을 뿐이지,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은 중국과 동급이며 이것은 전세계의 모든 타국들이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일관되게 언급해왔을 정도니까요. 나아가, 이는 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인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 시대 동안 변하지 않았던 중국의 역대 왕조들과 우리나라 곧 한국의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과의 관계 곧 한중 관계이기도 하지요. 이게 조선 시대에 들어서 최정점에 도달했던 것이지요. 이를 통해, 세간에서의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들 그 중에서도 조선의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 총체적 역량, 국제적 위상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해소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유익한 참조가 됐으면 해요.
위의 기록을 잘 보시다시피, 이는 조선국의 국제적 위상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는 기록인 것이지만, 조선 뿐만이 아니라 조선을 포함한 우리나라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은 동방(해동. 만주대륙-한반도-일본[왜]열도-유구[류큐, 현 오키나와]열도)의 최강대국인 것과 동시에 전세계의 최강대국이여온 중국의 역대 조정들로부터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에 해당되는 극진한 대접을 받아왔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 역대 왕조들의 국제적 위상 더 나아가 정체성에 대해선 또다른 중화, 동방(해동)최강, 일국지하 만국지상 이렇게 세 용어로 요약하여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 보면, 한국이 일본을 여진보다도 낮게 대접할 정도로 천시했지만, 중국은 한국을 대대로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으로 대접해왔기 때문에, 이 역시 기계적 중립, 기계적 양비론이 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보면, 뭐든지 있는 그대로를 보고 이를 기본 전제로 삼고 자신만의 주장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다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중국-한국의 관계와 한국-일본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이 되는 셈이지요. 나아가,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 그 중에서도 조선에 대해 가난하고 국제사회(국제질서)에서 동네북, 비하의 대상이여온 게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것의 전제 자체를 정반대로 뒤집은 게 조선 518년 역사에서 조선이 보여온 조선의 일반적인 모습임을 잘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파악해서 보면, 기원후 1800년대 전반 시점까지의 중국의 역대 왕조들, 기원후 1800년대 중반~1900년대 중반의 영국, 기원후 1900년대 중반 이후의 미국을 제외하면, 전세계 역사상에서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이 대대로 지녀온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에 미쳤던 국가들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바이기도 하네요. 나아가, 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인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 동안의 중국, 한국의 역대 왕조들을 제외한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에 대해서 언급을 할 때,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인 국가라는 용어들을 남발하는 것은 부적합한 언사라고 생각되요. 현재로 치면, 중남미권에 한정해서 최고의 선진국인 칠레를 두고서 전세계의 최선진국인 칠레라고 표현하는 것과 유사(대동소이)한 느낌이기 때문이죠. 나아가, 기원후 1800년대 중반(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한 시점이기도 하지요.) 이전의 국제사회, 국제질서는 중국, 한국이라는 압도적인 양대 최선진국, 최강대국과 그 외 나머지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아닌 것을 알 수 있을 것입것입니다. 조선국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들이 지녀온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에 대해선 중국의 역대 왕조들의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과 동급이며, 그 외의 전세계의 다른 국가들이 비할 바가 아니라는 언급이 일반적인 것을 대동소이하게 나타내는 위의 기록들을 통틀어서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기도 하니만큼 더할 나위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나라가 중국과 더불어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 동안 변함이 없는 전세계의 압도적인 양대 최강대국, 최선진국이여온 것이 우리나라의 역사(이는 중국의 역사에도 해당되지요.)의 가장 큰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략 반만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전세계의 압도적인 양대 최강대국, 최선진국 지위(위치)를 굳건히 유지해온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근현대사(기원후 180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죠.)~현대사 초반부 시기는 중국, 한국에게 있어서 전체 역사에서 있었던 일시적 부침들 중 하나일 뿐이겠습니다. 그 중 부침의 강도가 가장 쎘지만, 현 중국, 한국이 본격적으로 원래 지위로 원복하고 있는 중이니 말이지요. 또, 맨 위에 설명을 해드린 것만큼, 전세계 역사상에서 영원한 제국은 기원후 1800년대 전반 시점까진 있었다는 것을 보다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역사(문명) 시대가 시작된 이래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시점에 이르는 반만년의 시기 동안 변함이 없는 전세계의 양대 최강대국, 최선진국이여온 중국, 한국의 역대 왕조들 때문이지요.
근현대사가 시작되는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 동안은 중국, 한국이 동아시아(동북아시아)문명권 겸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의 변함없는 그리고 철옹성과도 같은 양대 최선진국이여왔으니 더욱 그러하죠. 더군다나, 현 우리 대한민국이 명목 1인당 GDP, 명목 1인당 GNI, 구매력 1인당 GDP를 위시한 모든 핵심 경제 지표들에서 일본국을 밀어내는 것(재역전)에 성공하였고, 중국과 한국이 근래 들어서 종합 국력 지수 순위, 행정 체계의 선진화, 최첨단 산업의 기술력과 경쟁력 등에서 본격적인 약진을 해나가면서 유럽-구미권 더 정확히는 서북유럽(서유럽, 북유럽)-북미(미국, 캐나다)-영미(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권을 본격적으로 밀어내가고 있는 상황은 '사필귀정' 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현 우리 대한민국이 남북통일을 이뤄낸 통일대한민국이 된다면 더욱 크게 번성할 테니,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흥미로우니만큼, 유익한 참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ㅎ
한국 빠는 척~ 항상 중국 빠는 분~
시진핑 개새끼 모택동 학살자 이거 한번 말해주세요!!
타국에서 복붙 작업 항상 수고 하십니다. ㅋㅋㅋㅋㅋㅋㅋ
|
중국은 동이에 지배를 받던 시기에 항상 최강대국. 한족 지배 시기에는 최강 국가라 부르기에 민망한 나라엿죠.
중국은~ 역조공 시기를 보면 항상 한족 지배 시기고. 한반도 침략 왕조들은~ 모두 동이족인게 증거죠.
ㅋㅋㅋㅋㅋㅋㅌㅋ |
@얄딱구리 북위의 제 7대 임금인 효문제가 한화 정책을 실시한 시점부턴 중국의 남북조 시대 당시 북조인 북위도 탁발선비족이 황실을 이룬 국가였지만 한족과 다를 바가 없어졌으며, 수나라~당나라 시기는 한족의 왕조라고 봄이 합당합니다. 이는 각 기록들이 일관되게 언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요, 순 시대, 하나라, 상(은)나라, 주나라, 춘추전국 시대, 진나라, 초한쟁패기, 한나라, 삼국 시대, 진나라, 5호 16국 시대 당시의 남조, 남북조 시대,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시대 당시의 면면을 보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나마 송나라가 문에 치중하고 무비 곧 군사력은 취약했던 단점이 있었던 것이지, 송나라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지녀온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을 상실하지는 않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중국 정복왕조도 군사력으로 중국을 차지했을 뿐,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이 낙후되어서 옛 한족의 왕조들이 일궈놓은 문명을 최고 핵심 기반으로 적극 활용해왔는데 말입니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 당시 북조인 북위는 황실이 탁발선비족이였지만, 제 7대 임금인 효문제의 재위시기에 이르러선 한화 정책을 실시해 한족과 다를 바가 없어졌던 것을 유념해야지요. |
@-대한민국파워 당은~ 한화 정책을 시행한~ 동이족 지류인 선비족이 세운 국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선진화 수준이 높다고 중국인이 물고 빠는 송명은~
말 그대로~ 맨날 쥐어 터지던 약소 국가~ ㅋㅋㅋㅋ |
@얄딱구리 선비족은 구지 말하자면 몽골에서도 동부 방면인 동몽골 쪽입니다. 동방 쪽의 민족이 아니였구요. 그 한화(한족화, 중국화) 정책이 결국엔 중국의 한족의 역대 왕조들이 깔아논 문명들을 최고 핵심 기반으로 활용했다는 말인데요. 북위의 경우는 아예 탁발선비족 출신의 황실이 한족이 된 경우입니다. 심지어 언어까지 한자어를 많이 차용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중국어로 바꾸기까지 하였으니 말이지요
명나라는 전혀 관련이 없구요. 송나라만이 통일왕조이기까지 한데도 문에만 치중하고 무비는 소홀히 하는 기조를 유지해서 군사적으로는 취약한 모습을 보여온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송나라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지녀온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을 상실하지는 않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대한민국파워 웃기는 소리 그만 하시고요~ 분열국,한족 지배국. 그 당시에 중국이 뭔 최강대국? ㅂㅅ 국가 엿음.
중국은 동이에 지배를 받아야 발전 합니다. 역사가 그걸 증명함.
|
@얄딱구리 근거가 무엇인지요? 탁발선비족은 북위의 황실이였다가 자발적으로 한족이 되기까지 했고, 몽골족이 수립한 중국 정복왕조인 원나라, 여진족이 수립한 중국 정복왕조인 금나라(중국의 절반을 차지하였죠.), 청나라도 한족의 송, 명이 깔아논 문명을 최고 핵심 기반으로 활용하면서 번성했던 것이지, 몽골족, 여진족이 자체적으로 이룬 문명 사회가 전혀 아니였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