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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한국인들의 이상향, 지향점이 완벽하게 이뤄졌었던 시대는 조선 시대 그 중에서도 조선 제 9대 임금인 성종 재위 연간이네요.
 -대한민국파워 2025-01-27 23:29   조회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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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히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14년 되는 해 1월에 우리 전하께서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대개 정조(正朝)는 천하의 모든 나라가 회동(會同)하는 때이고, 사신으로 가는 것은 현능한 대부의 일인데, 화천 권공이 여기에 뽑혔다. 권공이 길을 떠날 때에 조정에 몸담고 있는 군자들이 시를 지어 이로써 송별하면서 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내가 생각건대, 명나라가 천하를 통치하자 세계 안팎이 신하로 복종하지 않음이 없어 산 넘고 물 건너 조공(朝貢)하는 나라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대대로 조공을 바쳐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예의를 다한 것으로는 우리 조선이 으뜸이며, 황조(皇朝)의 대우 또한 융숭하여 중국 내지(內地)의 제후에 비견될 정도이니, 번방(藩邦)의 여러 나라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우리 동방은 은 태사(殷太師)가 조선을 봉지(封地)로 받은 이래 예속(禮俗)의 아름다움이 중국에 알려졌으나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이 솥발처럼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8, 9백 년 동안은 천하가 분열되고 남조(南朝)와 북조(北朝)가 정권을 달리하였으므로 도로는 통했다 막혔다 하였고 조공은 바치다 말다 하였다. 그러다가 고려조에 이르러 송(宋)나라를 섬겼으나 요금(遼金)과 원호(元胡)가 번갈아 흥성하였으므로 역시나 순수하게 송나라만을 섬기지는 못하였다.

공경히 생각건대, 태조 고황제(高皇帝)가 천하를 평정하니, 우리 강헌대왕(康獻大王)이 고려를 대신하여 나라를 세우고 가장 먼저 귀순하였다. 이에 특별히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하사하고 대대로 동쪽의 번방으로 삼았으며,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면서 보살피기를 부지런히 하고 하사품을 내리기를 많이 하여 더함은 있을지언정 쇠하지는 않았으니, 실로 망극한 황은(皇恩)이다. 이것이야말로 천하가 혼연일체가 되고 문자와 수레바퀴가 같아져 천하가 통일이 되는 때이니, 열국의 대부가 사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서 상국의 문물을 관광하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지난해 우리 전하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에 공이 표문을 받들고 가서 승습(承襲)을 주청하였는데, 부주(敷奏)하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여 능히 윤허를 받았다. 그런데 올해 다시 표문을 받들고 가서 큰 명절을 하례하게 되었으니, 예의를 주선함이 자연스럽고 법도에 맞아 중국의 사대부들이 반드시 훌륭한 사신이라는 칭송을 할 것이고 우리나라에 훌륭한 인재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옛날 춘추 시대에도 열국의 대부인 안영(晏嬰), 자산(子産), 숙향(叔向) 같은 무리는 사명(辭命)과 외교에 뛰어난 능력이 있어 당시에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당당한 천조(天朝)는 예악과 문물의 성대함이 그 옛날을 능가하니, 공이 전후로 사명을 받들고 가서 황제의 조정에 아름다움을 드날리면 그 받을 칭송이 어떠할지 알겠다. 공은 떠날지어다.

정유년(1477, 성종8)에 쓰다.


-사가집(四佳集) 사가문집 제5권 서(序) 하정사(賀正使)로 떠나는 권 화천(權花川)을 보내는 시의 서

 

현 한국인들의 이상향, 지향점이 완벽하게 이뤄진 시대는 과연 우리나라 역사상 어느 시대였을까요? 바로 조선 시대 그 중에서도 조선 제 9대 임금인 성종 재위 연간입니다. 이에 대해선 아래를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1. 우리나라가 통일(일통)된 시대였는가?

 

1. 신(臣)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을 때에 운남(雲南) 향공 진사(鄕貢進士) 최헌(崔瓛)과 서로 통어(通語)하였는데, 하루는 경사(經史)를 담론하다가 최헌이 신에게 이르기를, ‘새 천자(天子)는 심히 엄명(嚴明)하여 온 천하가 모두 심복(心腹)하고 있으며, 또 기순(祁順)·동월(董越) 등의 사신들이 돌아와서 모두 그대의 전하(殿下)는 현명하다고 하고 칭송하여 중국(中國)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대의 전하는 과연 어떠한 임금입니까?’고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성명인서(聖明仁恕)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시며, 재예(才藝)에 이르러서도 그 정묘함이 극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시어, 온 나라 사람들이 떠받들기를 부모와 같이 하며, 두려워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니, 참으로 성주(聖主)입니다. 또 우리 나라 옛날의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백제(百濟)·동옥저(東沃沮)·북옥저(北沃沮)·예맥(穢貊) 등지를 모두 하나로 합하여 땅은 수천리(數千里)를 보유하고 갑병(甲兵)이 수십만이며, 나라는 부(富)하고 병정은 강하며,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무릇 진공(進貢)하는 토산물은 모두 친히 감동(監董)하고 선택하며, 배표(拜表)하는 날에는 새벽에 교외(郊外)까지 나와 전송하고, 성절(聖節)과 정조(正祖)에는 백관을 거느리고 배하(拜賀)하십니다.’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습니다. 참으로 현군(賢君)이십니다. 그러나 그대의 말로 성(聖)이라 함은 지나치거니와, 황제는 참으로 성명(聖明)이십니다. 성(聖)자를 번왕(蕃王)에게 붙이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순(舜)임금은 동이(東夷)의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의 사람입니다. 현인(賢人)·성인(聖人)이 나는 바를 어찌 화이(華夷)로 구분하겠습니까? 공자(孔子)도 또한 필부(匹夫)이면서 성인이시거늘, 어찌 우리 전하께서 해외(海外)에 거(居)한다 해서 성인이 되지 못한단 말입니까?’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정말 옳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종실록 219권, 성종 19년(1488년) 8월 24일 을묘 3번째기사


이는 조선국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488년경때 조선국 사신단이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있을 때, 당시 조선국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이 현군인 것에 대한 얘기를 중국의 명나라 조정의 관리가 먼저 꺼내었으며, 이에 조선 사신단원이 조선의 강성, 성대함이 당시의 조선 제 9대 임금인 성종이 현군인 덕이라며 요새로 치자면 조선은 '성종 보유국' 인 덕택에 성대함을 이루어낸 국가라며 크게 자랑하기를 마지않았으며, 이를 들은 중국의 명나라 관리 최헌은 큰 반론 없이 수긍을 해주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롭고 또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현 시대에도 대외적으로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는 XXX 대통령 보유국' 이러진 않는데, 조선 시대엔 당당하게 그러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울 따름이지요.

 

보시다시피, 조선 시대는 우리나라가 통일되었던 시대들 중 하나이지요.

 

2. 우리나라의 역사상 더 나아가 전세계의 역사상에 길이 남을 성군, 명군이 재위하였는가?

 

5일 동안 철시(輟市)하였다. 여염(閭閻)의 세민(細民)들도 애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고, 눈물을 흘리며, 왜 내 몸으로 임금의 몸을 대신하여 죽지 못하나 하는 이까지 있었다. 동평관(東平館)에 다다른 왜인(倭人)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대답하였더니, 왜인들이 서로 울며 성군(聖君)이 돌아가신 때에 어찌하여 마침 우리가 왔는가.’ 하고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권, 연산 즉위년(1494년) 12월 28일 계미 8번째기사      

인경 등이 대전에게 아뢰기를,

"권도를 따르신다는 말씀을 듣고 조정이 감격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세종(世宗)께서 태종(太宗)의 초상에 권도를 따르셨으며, 세조(世祖)께서 대군으로서 세종의 초상에 역시 권도를 따르셨으며, 정희 왕후(貞熹王后)께서 승하하셨을 때에도 성종(成宗)께서는 겨우 1개월 2일 만에 권도를 따르셨으니, 이는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고 조종조로부터 그러했습니다. 이미 권도를 따른다 해도 마음으로 미안해 하신다면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세종 성종께서는 동방 성인이신데도 그렇게 하셨으니 미안하게 여기지 마소서. 외방에서 봉진하지 못하게 하는 일은 하교대로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인경 등에게 답하기를,

"조종조 때의 사례는 비록 이와 같으나 이번에는 상을 당한 것이 한 번이 아니고 지금 빈전에 계신 달수도 얼마되지 않으므로 매우 미안하다. 자전과 조정의 뜻을 따라 마지못해 이와 같이 하나 미안한 뜻은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하였다.
 
-명종실록 1권, 명종 즉위년(1545년) 8월 18일 무신 6번째기사

상이 석강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박민헌(朴民獻)이 아뢰었다.
 
"신이 일찍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았더니, 성종(成宗)이 즉위한 원년(元年)에는 춘추가 아직 어렸는데도 학문에 매우 부지런하였습니다.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이르기를 ‘혹 성체(聖體)가 피로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성종이 대답하기를 ‘마음에 참으로 즐기는데 어찌 피로함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세종(世宗) 모화관(慕華館)에 행행(行幸)하여 강무(講武)를 하고 나서도 경연(經筵)에 나아가《강목(綱目)》을 백 번까지 읽었습니다. 세종은 만기(萬機)의 여가에 이렇게까지 부지런히 글을 읽었기에, 지금 세종을 일컫는 사람은 반드시 ‘해동(海東)의 요순(堯舜)’이라고 하는데, 성종 세종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고어(古語)에 ‘조종을 본받는 것이 곧 성인(聖人)을 본받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세종 성종은 바로 오늘날 더욱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명종실록 7권, 명종 3년(1548년) 3월 14일 기축 3번째기사

신이 듣건대 세종대왕께서 인재를 배양함에 있어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요순(堯舜)이라고 일컬었고, 성종께서는 일체 세종의 고사를 따라 간언을 받아들이고 선비를 사랑하신 때문에 당시의 사대부 중에는 죄를 입은 사람이 없었는가 하면, 살리기 좋아하는 덕이 민심(民心)속에 흠씬 젖어 있어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칭송하고 있습니다.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1561년) 4월 19일 무신 1번째기사

 

여러분들께서도 위의 기록들을 잘 보시다시피, 조선국 제 13대 임금인 명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561년경때 한 대신이 고금의 예를 언급하면서, 조선국 제 4대 임금인 세종이 해동의 요순으로 칭송했으며, 조선국 제 9대 임금인 성종은 일체 세종의 예를 따라서 대소신료들의 간언을 받아들이고, 선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성종조 당시의 사대부들 중에서는 어떠한 이유로든 죄를 입은 사람이 없었는가 하면, 매우 성군인지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성종을 변함없이 칭송하고 있다는 언급입니다. 조선 시대 당시 제 4대 성군으로는 세종, 성종, 영조, 정조를 꼽을 수 있겠는데요(조선 전기 곧 제 1차 전성기는 세종, 성종이 이뤄내었고, 조선 후기 곧 중흥기, 부흥기, 제 2차 전성기는 제 21대 임금인 영조, 제 22대 임금인 정조가 이뤄낸 것으로 봐야지요.). 여기에서 성종이 제일로 여겨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성군의 상징으로 세종과 맞먹으면서도 구체적으로는 세종보다도 더 성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지요. 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군하면 세종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정작 조선 시대 당시에는 오히려 성종이 세종과 맞먹거나 내지 세종을 초월하는 성군의 상징으로 여겨온 듯 합니다. 성종을 임금으로써의 이상향 이렇게 간주한 듯 해보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성종이 붕어(사망)하였을 때에도, 국내외를 불문하고 애도하는 수준이 남달랐다는 기록도 대단히 주목될 만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기록들을 통틀어서 보면, 국내외 기준으로도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을 두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칭송을 많이 했다고 파악해도 무방하다고 보여집니다. 나아가, 우리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이 될 사람들도 세종보다는 성종을 국가원수로써 추구해야 할 최종 지향점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고 생각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아가, 조선의 제 5대 임금인 문종의 단명, 제 6대 임금인 단종의 폐위에 대해 크게 연연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바로 반정인 계유정난으로 집권하긴 하였지만, 명군에 해당될 정도의 치세를 보여온 제 7대 임금인 세조(진양대군, 수양대군)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의 제 1차 최전성기를 이룩해낸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치세 때문이죠. 설사 문종이 장수하고 단종이 폐위당하지 않은 채 보위를 정상적으로 유지해나갔다고 해도 세조, 예종, 성종 치세보다 나았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고 보여지기도 하니까요. 동시기 중국의 명나라도 제 3대 임금인 성조(태종, 영락제)가 정난의 변이라는 반정을 통해 집권했지만, 이를 시작으로 하여서 제 4대 임금인 인종(홍희제), 제 5대 임금인 선종(선덕제), 제 9대 임금인 효종(홍치제)이라는 성군, 명군들이 명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것과 유사하죠. 유익한 참조가 되어드렸으면 합니다.

 

이를 보면,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이 제 4대 임금인 세종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성군, 명군으로써 조선의 제 1차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 반만년 동안 한국과 더불어 전세계의 압도적인 양대 최강대국, 최선진국이여온 중국이 통일되있음은 물론, 성군, 명군이 보위에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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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명나라가 통일된 중국이였던 것은 당연하겠구요. 조선이 제 4대 임금인 세종과 동급 내지 그 이상의 성군, 명군으로 추앙되온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 연간 동안 제 1차 최고 전성기를 구가할 동안, 동시기의 명나라 역시 제 9대 임금인 효종의 재위 연간으로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상황이였지요. 또, 이 게시글의 맨 위에 첨부한 기록을 보시다시피, 명나라는 중국의 역사상 최고 전성기로 명성을 떨쳤지요.

 

4. 전세계의 최강대국, 최선진국과 극도로 친선한 관계임은 물론,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최고급의 의전 예우를 변함이 없이 받아왔는가?

 

원접사(遠接使) 허종(許琮)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안관(新安館)에서 중국 사신의 위연(慰宴)을 베풀었을 때에 기악(妓樂)을 올렸더니, 두 사신이 물리치게 하며 말하기를, ‘선황제(先皇帝)의 상(喪) 3년 이내이므로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고, 선위사(宣慰使) 이계남(李季男)이 인정 예물(人情禮物)의 단자(單子)를 올렸더니, 두 사신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를, ‘우리들은 이미 강상(江上)에서도 받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받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또 중국 사신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관찰사(觀察使) 성현(成俔)과 선위사(宣慰使) 이극돈(李克墩)이 영조(迎詔)하고, 채붕(彩棚)을 베풀어 잡희(雜戲)를 올렸더니, 두 사신이 주목(注目)하여 보았으며, 선위사(宣慰使) 이하가 배조례(拜詔禮)를 의식과 같이 행하고, 또 선위례(宣慰禮)를 행하였습니다. 예(禮)를 마치자, 선위사(宣慰使)가 식물 단자(食物單子)를 바쳤더니, 모두 받지 아니하고, 두 사신이 통사(通事)에게 이르기를, ‘이 선위 재상(宣慰宰相)은 예(禮)가 하나도 잘못됨이 없으니, 이 분은 예(禮)를 아는 재상이다.’고 하였습니다.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기자(箕子)의 분묘[墳]와 사당[廟]이 있습니까? 우리가 배알하려고 합니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분묘는 멀리 성밖에 있어 지금 도달할 수는 없으나, 사당은 성안에 있습니다.’ 하니,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알묘(謁廟)하겠습니다.’ 하고, 즉시 기자묘(箕子廟)에 나아가 배례(拜禮)를 행하였습니다. 묘문(廟門)을 나와 단군묘(檀君廟)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무슨 사당입니까?’ 하므로 말하기를, ‘단군묘(檀君廟)입니다.’ 하니, 말하기를, ‘단군(檀君)이란 누구입니까?’ 하기에 ‘동국(東國)에 세전(世傳)하기를, 「당요(唐堯)가 즉위(卽位)한 해인 갑진세(甲辰歲)에 신인(神人)이 있어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니, 중인(衆人)이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았는데 그 뒤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니, 말하기를, ‘내 알고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걸어서 사당에 이르러 배례(拜禮)를 행하였습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동명왕(東明王)의 신주(神主)를 보고 이르기를, ‘이 분은 또 누구입니까?’고 하기에, 말하기를, ‘이 분은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 고주몽(高朱蒙)입니다.’고 하니, 이르기를, ‘단군(檀君) 뒤에 어떤 사람이 대(代)를 이어 섰습니까?’ 하기에, 말하기를, ‘단군의 뒤는 바로 기자(箕子)인데, 전(傳)하여 기준(箕準)에 이르러 한(漢)나라 때를 당하여 연인(燕人) 위만(衛滿) 준(準)을 쫓아내고 대신 섰으며, 기준(箕準)은 도망하여 마한(馬韓) 땅에 들어가 다시 나라를 세웠는데 도읍(都邑)하던 터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단군(檀君)·기자(箕子)·위만(衛滿) 삼조선(三朝鮮)이라고 이릅니다.’ 하니, 이르기를, ‘위만(衛滿)의 후(後)는 한(漢) 무제(武帝)가 장수를 보내어 멸망시킨 것이 한사(漢史)에 있습니다.’ 하고, 즉시 태평관(太平館)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214권, 성종 19년(1488년) 3월 3일 정묘 2번째기사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조선의 관원들과 단군, 기자의 묘를 보면서 문답을 한 기록입니다. 단군은 중국의 역사상 첫 임금인 요 임금(위의 기록에 언급된 '당요' 가 곧 '요 임금' 입니다.)과 같은 시기에 고조선을 수립한 임금으로 기록되어온 임금인데요.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조선의 관원에게 이(단군묘)에 대한 설명을 듣고선 납득을 하면서 반론을 가하지 않은 점이 정말 흥미로운 부분이지요. 기자야 은(상)나라의 제 31대 임금 및 마지막 임금인 주왕의 태사(전담 스승)이자, 은나라 왕실의 왕자였던 기자가 은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무왕에 의해 수립되자, 고조선으로 망명해 고조선의 임금이 되어 고조선인들을 위해 교화를 가감없이 펼쳐 기자조선을 시작시킨 임금으로써 국내외에 공통되게 기록되온 임금이라서 놀랄 것도 없지만 말이지요. 이를 보면, 우리나라가 중국과 역사(문명)의 시작이 같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이에 대해선 아래의 기록들을 더 참조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오니...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년) 8월 11일 경신 2번째기사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단군은 (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신 분이고, 기자는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명을 받아 조선에 봉(封)하게 된 분이니, 역사의 햇수를 따지면 요임금에서 무왕까지가 무려 1천 2백 30여 년입니다.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1425년) 9월 25일 신유 4번째기사

중국이 황하 문명, 양자강(양쯔 강, 장강) 문명, 이리두(얼리터우) 유적지 등을 토대로 한 요 임금 시대, 순 임금 시대, 하나라 시대 이렇게 역사를 시작했다면, 한국은 요하 문명(발해연안문명, 홍산문명. 이 문명 유적지의 위치를 보면, 고조선의 중심지와 같은 위치이기도 하고, 요하 문명의 중심지에서 출토되는 요하 문명 시기에 살았던 민족 집단의 유골의 유전자에 대해서는 현 한국인들이 가장 유사한 유전자를 지닌 것을 넘어서 완전히 같은 유전자를 지녔다고 연구가 되니 더더욱이죠.), 강원도 춘천시 중도 청동기 유적지 등을 토대로 한 단군조선, 기자조선 이렇게 이어진다고 할 수 있지요. 기자조선에 관련해서도 기자가 고조선으로 넘어와 임금이 된 시기가 기원전 1040년대 즈음인데, 실제로도 중국의 은(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수립되는 시점에 해당되는 은나라 출신 집단의 각종 유적들이 고조선의 중심지에서 대거 발굴되는 중에 있기도 하지요. 조선 시대의 조정에서도 이것과 유사하게 인식해왔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모든 조공(朝貢)하는 오랑캐들이 관문에 이르면, 일일이 〈행장을〉 수검(搜檢)하여, 조그마한 칼도 가지지 못하게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 이르러서는 이를 금하지 않았고, 돌아올 때에도 동팔참(東八站) 일로(一路)에서 특별히 관군(官軍)을 발하여 호송하게 하시어, 그 대우하심이 모든 번국(藩國)보다 특이하였습니다. 신은 항상 감격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다시 무슨 바랄 것이 있어서, 성은(聖恩)을 다시 바라겠습니까?


-성종실록 83권, 성종 8년(1477년) 8월 26일 경신 3번째기사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이문등록(吏文謄錄)》을 강(講)하다가 중국[中朝]에서 ‘외국인(外國人)의 출입(出入)을 수검(搜檢)하는 방문(榜文)’에 이르러서, 임금이 시강관(侍講官) 이명숭(李命崇)에게 묻기를,

 

"지금 우리 나라 사람이 출입할 때에도 수검을 하는가?"


하니, 이명숭이 대답하기를,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하여, ()로써 대우합니다. 신이 전일에 북경[京師]에 갔을 때 수검한다는 방문이 궐문(闕門)에 걸려 있었는데, 2, 3일 뒤에 곧 철거(撤去)하였으므로, 외랑(外郞)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예부 상서(禮部尙書) 추간(鄒幹)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조선 예의의 나라로서 이것을 보면 반드시 우리에게 마음이 좁다고 할 것이니, 청컨대 보이지 말게 하소서.」하였기 때문에 철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영 신 등이 돌아올 때에도 수검한다는 영(令)이 없었습니다."


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 권건(權健)이 아뢰기를,


"신이 한명회(韓明澮)와 더불어 경사에 갔다 돌아올 때에는 수검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였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145권, 성종 13년(1482년) 윤8월 13일 기묘 3번째기사

 
이는 여러분들께서도 잘 보시다시피,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서 자국의 조정(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와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우리나라 곧 조선국이 예의지국(전근대 곧 전근현대[근현대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대 곧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들에 대한 통칭입니다.] 내내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에서 동양문명권 정확힌 동아시아[동북아시아]문명권이 가장 선진적인 문명권이여왔는데요. 동아시아문명권에서는 고급문화, 고급철학을 두고서 예의, 인의 이렇게 언급해왔죠. 이 동아시아문명권에서는 중국, 한국이 양대 최선진국이여왔지요.)이라고 하여, 예로써 대우한다는 뜻으로 전세계의 모든 나라의 사람들 중에서 오직 조선인들에게만 출입국을 할 때 수검(검사)을 시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의 사람들이 중국의 명나라에서 출입국을 할 때 오직 조선인들에게만 수검(검사)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지요. 이는 그만큼 조선국이 번영, 융성한 나라여왔기에 가능한 혜택들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현 우리 대한민국도 외국에 가서 우리 대한민국의 여권을 보여주면, 외국의 출입국심사대에서 프리패스를 시켜준다고는 하지만, 검사를 안 하지는 않는데(프리패스한 뒤에도 세관검사라는 과정이 국적을 상관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행해지게 되어있습니다. 보안검사도 마찬가지이지요.), 조선국은 오직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출입국을 할 때에 수검(검사)을 받지 않았으니, 현 우리 대한민국에게도 시시하는 바가 크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아가, 기원후 1800년대 중반(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한 시점이지요.)~1900년대 중반의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인 영국,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인 기원후 1900년대 중반 이후의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인 미국도 다른 국가들에게 해주지 않아오는 대접(미국도 자국과 더불어서 영미권의 국가들인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에게 해주지 않은 대접으로 보입니다.)을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조선국은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 동안 변함이 없이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이여온 중국에게 받아왔던 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리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고 잔치가 시작되자, 정사(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술잔을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왕의 나라는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중국 조정과 다름이 없으나, 다만 어음(語音)이 같지 아니하여 우리 두 사람이 뜻을 다 전달할 수 없으니, 한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성품이 본래 노둔(魯鈍)하여 비록 중국의 어음을 배우기는 하지만, 두 대인(大人)이 말한 것을 어떻게 다 전할 수 있겠습니까? 과인(寡人) 역시 뜻을 다할 수 없음은 진실로 대인이 말한 것과 같소."
 
하였다.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일찍이 국왕께서 독서(讀書)를 좋아하고 예의(禮義)에 밝으며 중국 조정을 공경하고 현덕(賢德)이 있다고 들은 것이 오래였는데, 이번에 직접 목도(目覩)하니, 모든 시위(施爲)가 모두 들은 것과 부합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을 공경하는 것은 과인이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독서를 좋아하고 예의에 밝고 현덕이 있다는 등의 말은 다만 대인께서 잘못 들은 것이지요."
 
하니, 정사가 말하기를,
 
"그것도 현왕다운 말씀입니다."
 
하였다. 

 

-성종실록265권, 성종 23년(1492년) 5월 29일 무술 1번째기사

 

이 역시 마찬가지인 기록이지요.

 

상이 상마연에서 천사에게 이르기를,

 

"어제 듣건대, 대인(大人)들께서 과인(寡人)을 주공(周孔)에게 비유하셨는데,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독서(讀書)는 반드시 의리(義理)의 정미한 속뜻을 알게 된 다음에야 겨우 학문에 통했다고 할 수 있는 법인데, 과인은 배웠다는 것이 고루하고 노무(魯莽)한 학문이니, 비록 독서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대인들을 만나게 되어 천번 만번이나 희한하고 다행한 일이라 하겠으니, 바라건대 두 분께서 아름다운 말과 좋은 교훈을 가지고 분명하게 나를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또한 차분히 교훈을 받기가 소원입니다."

 

하매,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학식이 천박한데, 이번에 와서 현명한 왕께서 가지고 있는 덕성(德性)과 학문에 근본한 바가 구비하지 않은 데가 없으심을 직접 보게 되어, 우리들로서는 한마디도 도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제(聖帝)께서 등극[龍飛]하신 첫머리에 두 분 대인께서 명을 받고 나오셨는데, 우리 나라[小邦]에서 반드시 잘못한 일이 많을 것이니, 두 분께서 분명하게 지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매, 상사가 말하기를,

 

"이번에 문헌(文獻)의 나라에 와보니, 위로는 현명한 왕으로부터 아래로 대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예의와 겸양(謙讓)이 풍속을 이루어 법도가 환하게 밝았는데, 우리들이 어떻게 그런 속에서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필연(筆硯)과 지묵(紙墨)은 곧 문방(文房)의 미미한 것이므로 비록 가져다 쓰신다 하더라도 염치에 손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매, 두 사신들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우리들이 사리와 법도를 준수할 것으로 알고 차출하여 나오게 된 것이니, 비록 미미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받게 된다면 이는 조정을 속이는 일입니다."


하였다.

 

-중종실록43권, 중종 16년(1521년) 12월 9일 정해 3번째기사

 

이는 조선에 파견된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의 정사가 조선의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이 굉장히 뛰어나 자국(중국의 명나라)이 교화시킬 것이 없다는 극찬을 해준 기록입니다. 이는 굉장히 의의있는 기록이 아닐 수 없는데요. 이를 뒷받침을 해주는 기록들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좌의정 최윤덕(崔閏德)과 참찬(參贊) 조계생(趙啓生)과 도승지 신인손(辛引孫)이 사신(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를 의미합니다.)을 벽제역(碧蹄驛)에서 위로하여 보내니, 사신이 인손에게 말하기를,

"전하께서 날마다 예연(禮宴)을 베풀어 주시고, 또 근신을 명하여 멀리 위로하여 주시니 감사한 것은 입으로 다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선은 본래 예의의 나라인데 지금 예악 문물(禮樂文物)을 보건대 중화(中華)와 다름이 없으니, 오로지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입니다."

하고, 감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세종실록 68권, 세종 17년(1435년) 4월 3일 갑진 2번째기사

조선국에 파견된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조선의 조정의 대신들에게 조선국은 본래 예의의 나라(예의지국, 예의지방.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에서 동아시아[동북아시아]문명권이 가장 선진적인 문명권이여왔는데, 동아시아문명권에선 고급문화, 고급철학을 두고서 예의, 인의 이렇게 언급해왔습니다.)인데, 지금 예악문물을 보건대 중화(중국)과 다름이 없다며 우리나라 곧 조선국을 또다른 중화의 나라로 극찬한 기록입니다.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명권인 동아시아문명권의 양대 최선진국이 중국, 한국이여온 걸 나타내는 기록들 중 하나인 거죠.

공용경(龔用卿) 중국 조정에 돌아가서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조선(朝鮮) 문물(文物)과 예의 법제(禮義法制)가 중국과 다름이 없다.’고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문장(文章)이 부끄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부 상서도 공천사의 말을 듣고 감탄해 마지아니하여, 우리 나라 사신을 보고 칭찬하기를 ‘그대 나라의 문물 예의 법제 중국과 다름없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하였고, 또 옥하관(玉河館)의 주사(主事)와 서반(序班) 등에게 주의시켜 조선 사람은 삼가 소홀히 대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이는 다만, 학문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매일 제술하는 것을 연습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중종실록 86권, 중종 32년(1537년) 11월 3일 무인 3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나라에서 조선국의 예의, 문물의 선진화 수준이 중국과 동급이라고 극찬해왔던 기록들 중 하나입니다.

 

장녕(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이 말하기를,

 

 

"금일의 칙서(勅書)는 중국[明] 조정에서 저 사람들을 편드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朝鮮)은 본래 ‘예의의 나라[禮義之邦, 예의지방]’이므로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명 태조 주원장) 이래 본국(本國)을 대우하는 예(禮)가 다른 나라와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 위의 항목의 사의(事意)를 일일이 회주(回奏)하신다면 중국[明] 조정에서 저 사람들을 금지시켜 다시는 원수를 갚는 짓을 행하지 못하도록 할 것인데, 실로 황제 폐하의 지극한 은혜이요, 조선(朝鮮)의 큰 복(福)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머지 사연(辭緣)은 다 회주(回奏)에 쓸 것이니, 대인(大人)은 여러 말 할 필요가 없소."


하였다.


(중략)


장녕이 대답하기를,


"이미 자세히 알았습니다. 중국[明] 조정에서도 조종(祖宗) 이래로 귀국(貴國, 조선국)을 심히 후하게 대접하였으니, 귀국(貴國)의 사신이 이르면, 중국[明] 조정에서 으레 제일 반열(班列)에 위차(位次)하게 하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그러한 일이 없으니 이것이 그 하나이요, 황제(皇帝)께서 신하들에게 연회(宴會)할 때 전상(殿上)에 시좌(侍坐)하니 이것이 그 둘째이요, 귀국(貴國)에서 자제(子弟)를 보내어 입학(入學)할 때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 주원장)께서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것이 그 세째입니다. 그 나머지 대접하기를 후하게 한 것을 일일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중국[明] 조정에서 지금 칙서(勅書)를 내린 것도 사건의 시말(始末)을 알아서 저 사람들을 경계하고 금지하여 와서 난(亂)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고자 함이니, 전하께서는 모름지기 이 뜻을 아시고 명백하게 회주(回奏)하여 주소서."


하였다.


-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1460년) 3월 2일 기묘 1번째기사

 

또 야인(野人)이나 일본(日本)이나, 삼도(三島)나 유구국(琉球國) 같은 사이(四夷)가 모두 내정(來庭)하였으며, 아름다운 징조와 이상한 상서가 모두 모이어 만물(萬物)이 흔쾌하게 보니, 운수가 형통하고 아름다운 데에 붙어서 오직 소국(小國)만이 왕을 사모할 뿐이 아니고, 중국이 우리 전하를 대접하는 데 이르러서도 그 예(禮)와 그 의(義)는 옛보다 융숭하고, 열국(列國)보다 성대하니, 우리 전하의 공덕(功德)이 성하지 않고서는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삼황(三皇)도 마땅히 도(道)를 양보하고, 이제(二帝)도 마땅히 덕(德)을 양보하며, 삼후(三后)도 마땅히 공(功)을 양보할 것입니다.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년) 3월 25일 乙酉 4번째기사

 

왕무가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조선을 한 집같이 보아 외국으로 대접하지 않습니다..."

 

-세종실록66권, 세종 16년(1434년) 10월 14일 정사 2번째기사

 

하물며 중국은 우리 나라를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 하여 대접하는 도리가 해내 제후(海內諸侯)와 다름이 없는데...

 

-성종실록46권, 성종 5년(1474년) 8월 24일 병오 4번째기사

 

신의 생각으로는,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가 봉(封)함을 받은 이래로 대대로 예의(禮義)를 지키었고, 중국도 또한 예의를 지키는 나라로 대우하기를 매우 중히 하였으며, 모든 번국(藩國)의 우두머리에 두었은즉, 이제 추봉(追封)하는 명(命)이 또 어찌 우리 나라를 낮추어서 경솔하게 근거없는 일을 하였겠습니까? 또 임금의 일은 반드시 기록하여야 하는데, 기록하고서 법이 될 게 없으면 후사(後嗣)가 무엇을 본보기로 삼겠습니까? 반드시 감히 아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종실록59권, 성종 6년(1475년) 9월 19일 을축 2번째기사

 

"... 그러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대우함에 있어 은혜로 베푸는 예절이 매우 후(厚)해서 하사품도 도타웠는데, 이번 성절(聖節)의 행차에서도 호송군이 3백이 넘는 기병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천자(天子)의 명령이 아니고서 그렇게 되겠는가? ..."

 

-성종실록112권, 성종 10년(1479년) 12월 21일 임신 4번째기사

 

이것은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서 자국의 조정(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와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우리나라 곧 조선국에게만 특례를 변함이 없이 베풀어왔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국의 사신단을 호송할 땐 300명이 넘는 기병대를 동원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 기록입니다.

 

임금이 악차(幄次)에 나아가니, 두 사신이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를 불러 사물(賜物) 주는 것을 마치고 나와 자리[次]에 나아갔다. 임금이 두 사신에게 전(殿)에 오르기를 청하니, 두 사신이 재배(再拜)하거늘 임금이 답배(答拜)하고,

 

"과인(寡人)이 삼가 칙서(勅書)를 읽으니, 이르기를, ‘성교(聖敎)가 미치는 곳은 의당 은택이 미쳐야 한다.’고 하였으니, 내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해(四海)의 밖은 무려 만국(萬國)이 되는데, 우리 나라는 대대로 충성을 돈독히 한다 하여 내려 주신 은전이 편벽되게 융성하고, 또 두 대인(大人)을 선발하여 조칙(詔勅)을 받들고 오게 하시어 황은(皇恩)이 답지(沓至)하였으니, 감격함이 망극(罔極)합니다."


하였는데, 두 사신이 말하기를,


"오늘 현왕(賢王)께서 두 번씩이나 번거롭게 거둥하시니 황공 황공(惶恐惶恐)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강을 건너온 이래로 곳곳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해 주심을 거듭 받으니, 현왕(賢王)의 두터운 예우에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의상 당연한 것인데, 어찌 감사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성종실록 214권, 성종 19년(1488년) 3월 13일 정축 11번째기사

 

중궁(中宮)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받고 이어 내외 명부(內外命婦)의 축하를 받았다. 황제의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우리 조종이 천도(天道)를 봉행하여 인(仁)이 만방을 덮으므로, 봉작(封爵)의 은혜가 멀다고 해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내자(內子)를 추봉(推封)하는 의식은 오직 예의지국(禮義之國)에만 특별히 시행하노라. 성헌(成憲)이 구존하니 잊어서는 안 된다. 너 윤씨(尹氏)는 곧 조선국(朝鮮國)의 배신(陪臣) 윤지임(尹之任)의 딸로서 내칙(內則)을 따라 어진 임금의 계배(繼配)가 되었는데, 내정(內政)에 마땅하고 치화(治化)에 도움이 있으리라. 이에 특별히 국왕의 청을 따라 조선 국왕의 계비로 봉하고 고명을 내린다. 아, 순종함으로 임무를 삼았으니 일찍이 어미의 훈계를 들었고, 경계로 서로 도우니 또한 제사가 내조를 힘입으리라. 언제나 공경하고 삼가 다 같이 아름다운 상서를 맞이하리로다."


하였다. 하사한 관복과 물건은, 주관(珠冠) 1정(頂), 대홍저사협대삼(大紅紵絲夾大衫) 1건(件), 청저사채수권금적계협배자(靑紵絲綵繡圈金翟鷄夾褙子) 1건, 청선라채수권금적계하피(靑線羅綵繡圈金翟鷄霞帔) 1건, 녹세화저사철채수적계단삼(綠細花紵絲綴綵繡翟鷄團衫) 1건, 홍암화저사협오아(紅暗花紵絲夾襖兒) 1건, 청암화저사협군(靑暗花紵絲夾裙) 1건, 아홀(牙笏) 1부(部), 금추두(金墜頭) 1개, 잡색저사(雜色紵絲) 4필, 잡색라(雜色羅) 4필, 서양포(西洋布) 10필 등이다.

 

-중종실록 32권, 중종 13년(1518년) 4월 21일 기축 2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 조정에서 자국(중국의 명나라)의 조정에 입조해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조선국에게만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에 해당되는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오는 것은 물론, 아예 조선국의 또다른 국호(국명)로 예의지국 곧 최선진국 이라고 언급했을 정도입니다. 요새로 치면, 현 우리 대한민국을 두고 대한민국이 아닌 최선진국 이렇게 호칭한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이를 보면, 현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전성기가 아니라, 그 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 북한이 우리나라 역사상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최약체고, 그 다음이 현 우리 대한민국이라고나 할까요? 이는 현 중국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만큼, 중국과 한국의 역대 왕조들이 지녀온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이 굉장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현 중국과 한국은 근래에 본격적인 약진을 하면서 이를 본격적으로 복구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즉,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역사(문명) 시대가 시작된 이래 기원후 1800년대 전반(기원후 1800년대 중반 시점부터는 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이지요.) 시점에 이르는 반만년의 시기 동안 자신들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조선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에게만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에 해당되는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온 것은 물론, 규모가 자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을 뿐,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은 자신들과 동급이며 전세계의 모든 타국들이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칭송해온 것이죠.

 

또 야인(野人)이나 일본(日本)이나, 삼도(三島)나 유구국(琉球國) 같은 사이(四夷)가 모두 내정(來庭)하였으며, 아름다운 징조와 이상한 상서가 모두 모이어 만물(萬物)이 흔쾌하게 보니, 운수가 형통하고 아름다운 데에 붙어서 오직 소국(小國)만이 왕을 사모할 뿐이 아니고, 중국이 우리 전하를 대접하는 데 이르러서도 그 예(禮)와 그 의(義)는 옛보다 융숭하고, 열국(列國)보다 성대하니, 우리 전하의 공덕(功德)이 성하지 않고서는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삼황(三皇)도 마땅히 도(道)를 양보하고, 이제(二帝)도 마땅히 덕(德)을 양보하며, 삼후(三后)도 마땅히 공(功)을 양보할 것입니다.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년) 3월 25일 乙酉 4번째기사

 

보시다시피, 조선 시대에 이르러 중국의 역대 왕조들로부터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들을 위시한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의 역대 왕조들 중 역대 최고의 대접을 받는 것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등극사(登極使)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 부사(副使)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 정조사(正朝使) 연원군(延原君) 이숭원(李崇元) 등이 돌아오다가 요동(遼東)에 이르러 치계(馳啓)하기를,


"신 등이 북경(北京)에 있을 적인 정월 19일에 통사(通事) 박효순(朴孝順)이 예부(禮部)에 이르자, 마침 한림 원외랑(翰林院外郞) 마태(馬泰)를 보았는데, 말하기를, ‘나는 시독관(侍讀官) 동월(董越)의 배리(陪吏)입니다. 〈동월은〉 이제 반조 정사(頒詔正使)로 차임되어 그대 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대 나라 사람을 만나 도로의 멀고 가까움을 자세히 묻고자 하니, 그대는 마땅히 가서 만나보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하기에, 이튿날 신 등이 박효순으로 하여금 가서 보고 말하게 하기를, ‘본국 재상(宰相)은 등극(登極)을 하례하는 일로써 입조(入朝)하여 내일은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인데, 대인(大人)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본국에 사신으로 온다는 것을 들었으니, 길을 떠나는 시일을 감히 묻겠습니다.’ 하니, 동월(董越)이 대답하기를, ‘윤정월(閏正月) 11일이나 19일 중에 길을 떠날 것이나, 다만 요새(遼塞)의 추위가 심하여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서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라고 하고는, 인해 묻기를, ‘전하의 춘추(春秋)가 얼마입니까?’라고 하기에, 박효순이 대답하기를, ‘나는 미천(微賤)한 신하이므로 감히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도로의 원근을 묻기에, 대답하기를, ‘요동에서 의주(義州)까지 8참(站)이고 의주에서 왕성(王城)까지 28참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대 나라의 참마(站馬)의 좋고 나쁨과 교자(轎子)의 사정이 어떻습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본국의 참로(站路)는 일체 중국과 같아서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는 것은 오직 대인의 편리한 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동월이 말하기를, ‘나는 바로 지금 황제가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의 시강(侍講)입니다. 이전에는 그대 나라 사신을 모두 행인사원(行人司員)으로 차임(差任)하고 당상원(堂上員)을 차임해 보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조정에서 그대 나라가 사대(事大)하는 정성이 지극함으로써 특별히 나와 같은 늙은 사람을 사신으로 선발했으니, 이 뜻을 재상에게 말로 전하시오.’라고 하자, 편수관(編修官)이라고 일컫는 이가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주인(主人)은 동궁의 옛 시강(侍講)으로서 당상관으로 승진되었으니, 그대의 나라에서는 마땅히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212권, 성종 19년(1488년) 윤1월 15일 경진 2번째기사


신시(申時)에 중국 사신이 조서와 칙서를 받들고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니,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나아가 맞이하였다. 중국 사신이 조서와 칙서를 받들어 각각 용정(龍亭)에 안치하였는데 그 칙서(勅書)는 장전(帳殿)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임금이 조서(詔書)를 인도하여 연(輦)을 타고 앞서가고 중국 사신은 말을 타고 조서를 따라서 갔다. 경복궁(景福宮)에 이르러 반조(頒詔)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는데, 그 조서에 말하기를,


"천명(天命)을 받들고 천운(天運)을 계승한 황제(皇帝)는 조서(詔書)하노라. 생각하건대 우리 조종(祖宗)은 성성(聖聖)이 서로 이으시고 밝은 천명(天命)을 순응하여 중화(中華)와 사이(四夷)의 임금[王]이 되었도다. 그 창업(創業)하고 수성(守成)하신 신공(神功)과 성덕(聖德)은 진실로 왕고(往古)에 도월(度越)하셨도다. 우리 황고(皇考) 대행 황제(大行皇帝)께서 통서(統緖)를 이으심에 미쳐서는 심인(深仁)과 후택(厚澤)이 해우(海隅)까지 덮은 지 이에 2기(紀)가 되었는데 부지런히 노력하여 잘 다스리려고 했던 마음은 오히려 밤낮을 겨를하지 못하셨는데 병환으로 인하여 갑자기 철의(綴衣)를 내보내니 참으며 빙궤(憑几)의 말씀을 듣고 외람(猥濫)되게 신기(神器)의 부탁을 받았는데, 슬픔이 바야흐로 성하여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당시에 친왕(親王)·문무 군신(文武群臣)과 아래로는 기로(耆老)·군민(軍民)에 미치기까지 합사(合詞)하여 대궐에 엎드려 권진(權進)한 것이 재삼(再三)에 이르렀도다. 사양하고 거절하였으되 얻지 못하여 이에 유명(遺命)을 좇아서 9월 초 6일에 삼가 천지(天地)·종묘(宗廟)·사직(社稷)에 고(告)하고 황제(皇帝)의 위(位)에 나아갔도다. 이에 부비(付畀)하신 중(重)함을 돌아보건대, 자견(仔肩)의 어려움을 깊이 두려워하여 힘써 널리 구제하기를 도모하고 한결같이 치도(治道)를 널리 베풀기를 생각하며, 은혜를 백성에게 드리워서 성하게 이루게 하고 백성이 화락하게 잘 지내는 데에 올라서, 황명(皇明)이 억만년(億萬年)까지 무강(無彊)한 복[祚]을 넘치게 하기를 바라고, 그 명년(明年)을 홍치(弘治) 원년(元年)이라 하였도다. 대저 체원(體元)하여 거정(居正)하는 처음을 당하여, 의당 백성을 사랑하는 전법을 경신(更新)하여 반포해야 하겠으므로 마땅히 시행해야 할 일의 조목을 다음에 개시(開示)한다. 아아, 조종(祖宗)과 황고(皇考)의 대경 대법(大經大法)이 우리 후인(後人)을 계우(啓佑)한 것이 상세하게 갖추어졌으니, 그 정신을 이어받아 행하는 것은 묘궁(眇躬)에 있으나 그래도 멀고 가까운 종친(宗親)과 내외(內外)의 충량(忠良)이 덕(德)을 같이 하여 일심(一心)으로 맡은 바 일을 충실히 이행해서 나의 미치지 못함을 보필(輔弼)하라. 크게 여러 나라에 고하노니 모두 알도록 하노라."

 

하였다. 중국 사신이 도로 나와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니,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돈의문(敦義門)으로 해서 나아가 칙서를 맞이하는 위치에 나아갔다. 칙서(勅書)를 인도하여 말을 타고 먼저 행하여 경복궁(景福宮)에 이르러 칙서를 받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는데, 그 칙서에 말하기를,


"황제(皇帝)는 조선 국왕(朝鮮國王) 모(某)에게 칙유(勅諭)하노라. 짐(朕)은 조종(祖宗)의 홍업(鴻業)을 사수(嗣守)하여 만방(萬方)을 통어(統御)하니, 성교(聲敎)가 미치는 곳은 의당 은택(恩澤)이 미치거늘, 하물며 그대 국왕(國王)은 대대로 충성(忠誠)을 돈독히 하였으니, 내려 주는 은전은 더욱 후(厚)하여야 한다. 특별히 정사(正使) 우춘방 우세자 겸 한림원 시강(右春坊右世子兼翰林院侍講) 동월(董越)과 부사(副使) 공과 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창(王敞)을 보내어 조칙(詔勅)을 가지고 왕(王)을 효유하고 아울러 왕(王)과 비(妃)에게 폐백 문금(幣帛文錦)을 내려 주니, 이르거든 수령(收領)토록 하라. 그리하여 그 짐(朕)의 권회(眷懷)함을 본받아 예(禮)를 잡고 의(義)를 지켜 더욱 번방(蕃邦)의 보익(輔益)을 융성히 하여 한가지로 태평(太平)의 복(福)을 누려야 하겠기에 유시하노라."


하였다. 임금이 악차(幄次)에 나아가니, 두 사신이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를 불러 사물(賜物) 주는 것을 마치고 나와 자리[次]에 나아갔다. 임금이 두 사신에게 전(殿)에 오르기를 청하니, 두 사신이 재배(再拜)하거늘 임금이 답배(答拜)하고,


"과인(寡人)이 삼가 칙서(勅書)를 읽으니, 이르기를, ‘성교(聖敎)가 미치는 곳은 의당 은택이 미쳐야 한다.’고 하였으니, 내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해(四海)의 밖은 무려 만국(萬國)이 되는데, 우리 나라는 대대로 충성을 돈독히 한다 하여 내려 주신 은전이 편벽되게 융성하고, 또 두 대인(大人)을 선발하여 조칙(詔勅)을 받들고 오게 하시어 황은(皇恩)이 답지(沓至)하였으니, 감격함이 망극(罔極)합니다."


하였는데, 두 사신이 말하기를,


"오늘 현왕(賢王)께서 두 번씩이나 번거롭게 거둥하시니 황공 황공(惶恐惶恐)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강을 건너온 이래로 곳곳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해 주심을 거듭 받으니, 현왕(賢王)의 두터운 예우에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의상 당연한 것인데, 어찌 감사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드디어 자리에 나아가 잠깐 동안 다례(茶禮)를 행하고, 두 사신이 드디어 나가니, 임금이 근정문(勤政門) 밖에까지 전송하였는데, 두 사신은 조서(詔書)를 받들고 나갔다. 원접사(遠接使) 허종(許琮)이 복명(復命)하니, 전교하기를,


"지금의 중국 사신은 예도(禮度)가 엄명(嚴明)한데 경(卿)은 대접함에 실수가 없었으니, 내가 심히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어서 단의(段衣) 2령(領)을 내려 주었다. 밤 2고(鼓)에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거둥하여 하마연(下馬宴)을 행하고 5고(鼓)에 환궁(還宮)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송영(宋瑛)에게 명하여 인정물(仁情物)을 유증(留贈)하니, 상사(上使)가 물목 단자(物目單子)를 보고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송영이 굳이 청하니, 상사가 단자(單子)를 내버려 두면서 말하기를,


"이 단자(單子)를 받으면 이것은 주시는 물건을 받음입니다. 전하께서 조정을 존경하시어 대접함이 이와 같으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주심은 예(禮)이고 내가 받지 아니함은 조정을 두려워함이니, 각각 그 도(道)를 다함이 가(可)합니다."


하였다. 송영이 또 인정 단자(人情單子)를 부사(副使)에게 주니, 부사가 말하기를,

 

"전하의 성의(誠意)는 감사하고 감사하오나, 그러나 조정(朝廷)의 법제(法制)를 두려워하여 감히 받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법을 집행하는 관리(官吏)로서 사람의 잘잘못[得失]을 말하는 자이니 어찌 이를 받겠습니까?"


하고, 굳이 사용하며 받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214권, 성종 19년(1488년) 3월 13일 정축 11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나라의 제 9대 임금인 효종(홍치제. 본명은 주우탱)이 황태자(태자)였던 시절때 자신의 시강(스승)을 맡았고, 현재 당상원(당상관) 겸 한림원 시강을 역임하고 있는 동월을 사신단 정사로 삼아 조선국에 파견한 기록입니다. 이는 보시다시피, 조선국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488년경때의 일이였는데요. 이전엔 이러한 일이 없었는데, 이 때(성종조)에 이르러 조선국에 대한 특별 배려를 해준 것이라고 합니다. 또,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 중국의 명나라 조정을 섬겨오는 만국 곧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오직 조선국에게만 편벽(편향)되게 귀중한 하사품들을 막대한 양으로 준 것만 보아도 당시 조선국의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을 알 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동월은 조선국에 사신단으로 파견되면서 겪은 경험들을 토대로 '조선부' 라는 저서를 저술하게 되었지요.

 

5. 우리나라가 무비에 관해서도 전세계 최강에 해당되는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 인해 대외적으로 칭송을 받아왔는가? 나아가, 만주대륙과 한반도를 하나로 묶은 만반도를 이루어냈는가?

 

달한이 말하기를, ‘우리 조상 때부터 대국에 귀순(歸順)하였는데, 교서에서도 조종(祖宗)으로부터 대대로 은택을 입혔다 하니, 이 말이 지당합니다. 옛날 세종조(世宗朝)에 삼위 등지에 한재가 극심하여[天火焦地] 곡식이 다 말라 죽어 우리들이 거의 죽게 되었는데, 대국에서 이 소식을 듣고 만포진(滿浦鎭)의 군량으로 한 사람에게 쌀 두 되, 소금 한 되씩을 나누어 주어 구제하니, 삼위 사람들이 늙은이를 부축하며 어린이를 이끌고 가서 시량을 받아 오는 자가 줄을 이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힘입어 생활하였으니 대국의 은혜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왕년에는 화라온(火剌溫)·올적개(兀狄介)·이모독(李毛獨)이 변방에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여자 64명을 잡아가지고 돌아 오는 것을 우리 할아버지 이만주(李滿住)가 지켜 있다가 34명을 빼앗아 가지고 대국으로 나가니, 대국에서 그 공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하사하면서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대국에서 군사를 일으켜 할아버지의 집을 둘러 쌌는데 할아버지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은 범한 일이 없다하여 피하지 않았다가 몸에 아홉 군데나 상처를 입고, 그런 후에야 산으로 올라가서 겨우 피신했으며, 할머니는 칼날에 죽으니 할아버지는 이로 인하여 노하시고 원한이 골수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갑자기 회개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조선이 화라온의 죄를 토벌하다가 내게 잘못 미친 것이라고 하며 곧 원한을 풀고 자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찍이 대국의 은혜를 많이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후 조선에서 또 뜻밖에 군사를 일으켜서 우리 할아버지와 아우를 베고 우리 처자 가속들을 합쳐 50여 인을 잡아가니, 내가 이 때문에 원한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재차 대국 변방에 도적질하여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그 후에 다시 생각하니 도적질이라는 것이 차마 할 일이 아니므로 단연코 다시 도적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대국에서 조공(朝貢)할 것을 허락하여, 후한 은혜 입기를 옛날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중간에 있는 야인(野人)이 자주 변방에 도적질하므로 우리들이 금지하려 하지만 법령이 없으며, 부하들이 죄가 있어 죽이고자 하지만 그 사람이 반드시 나를 해치려고 하므로, 죽이고 살리는 형벌을 내가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제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의 추장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금지하여 다시는 그런 일을 영영 없이 하겠으며, 이제부터라도 부하 중에 도적질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마땅히 비장(裨將)·이장(里將)을 시켜 수탐케 하고 금우당개(金亐唐介)·이가을두(李加乙豆) 등을 시켜 달려가 보고하게 하겠사오니, 지체없이 곧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십시오. 군사가 많지는 못하지만 나도 병력을 돕겠습니다.

-연산군일기 19권, 연산 2년(1496년) 11월 1일 갑진 2번째기사

이는 여진족들이 조선의 제 4대 임금인 세종의 여진족들에 대한 정벌전인 파저강 정벌, 제 7대 임금인 세조의 여진족들에 대한 정벌전인 정해서정에 대해 언급한 기록입니다.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들으니, 올적합(兀狄哈)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 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성종실록 275권, 성종 24년(1493년) 3월 14일 기묘 3번째기사


-이는 성종조때 일어난 이른바 고산리 전투(정벌)의 성과입니다. 야인여진(동해여진 곧 제성 올적합)이 조선국이 비록 강대국이긴 하나, 어떻게 울지현을 넘겠냐고 언급했고, 올적합의 예측과는 달리 조선군은 깊숙히 공격해 들어가서 올적합을 크게 격파했고, 타 여진 부족들이 이를 보거나 듣고선, 올적합도 저렇게 조선군에게 당하는데, 자신들이 어떻게 조선군을 당해내겠냐며 서로 모여서 제단을 만든 뒤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시는 조선과 흔단을 만들지 않고, 조선국에 영구히 신복하겠다고 약조할 정도였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말하기를, ‘대인의 말이 옳소. 그러나 역시 믿을 수 없으니 내가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은데 대인이 싫어하지 않겠소? 지금으로부터 화와 복이 전적으로 대인에게 달려 있소. 지금 나를 따라온 군졸(軍卒)이 자못 많아 그 도로의 험하고 평단한 것을 모두 역력히 알았으니, 국가에서 만약 공격을 하려면 그 형세가 매우 용이하오. 대금(大金, 금나라)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 대인(大人)도 일찍이 듣지 못했소?’ 하니, 달한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그런 강한 자도 오히려 토벌하기를 이와 같이 쉽게 하였는데, 하물며 이 땅은 우리 나라에서 거리가 험한 길로 와도 사흘 길이며 평탄한 길로 오면 겨우 이틀 길밖에 아니 되니, 대인이 만약 귀순한다면 영원한 세대를 편안히 업에 종사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자손이 씨가 없을 것이오. 내 말이 일면으로는 대인에게 공갈치는 것 같지만 일면으로는 대인을 보호하는 것이니, 이 말을 잊지 마오.’ 하니, 달한은 좌우를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도 이 말을 체념(體念)하라.! 이 땅의 도로가 확실히 올적합(兀狄哈)의 사는 곳보다 평이하니, 만약 장난을 하면 와서 토벌하기가 진실로 쉬울 것이다. 올적합 대금(大金)으로도 능히 제어하지 못했는데 지금 고려(조선)는 능히 깨뜨렸으니 하물며 우리들이겠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고려에서 만약 도로를 다 알고 있다면, 장난하는 자가 스스로 굴복할 것이니, 사신은 모름지기 도로를 소상히 알고 가라.’ 고 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 28권, 연산 3년(1497년) 10월 7일 을해 2번째기사


-이는 성종조때 일어난 신해북정의 성과입니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웠던 시절땐 더할 나위 없이 강성하여서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송나라까지 공격하여서 송나라의 수도(도성, 도읍)인 개봉(카이펑)성까지 함락하고 송나라가 정강지변을 당하게 했으며, 송나라를 장강(양자강, 양쯔 강) 이남으로 몰아냈을 정도였지요. 그나마 고려국만이 물리적인 충돌 곧 전쟁 없이 금나라와 역상하관계를 체결했을 정도이니까요(이는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에도 언급되어 있다시피, 고려국의 제 16대 임금인 예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100년대 초반때 윤관 장군으로 하여금 총 17만여명의 대군으로 여진족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였는데, 여진족들이 이 때에 고려군에 의해 크게 격파되어 금나라를 세운 이후에도 고려국과만은 물리적인 충돌을 피하였지요.). 그런데 이 금나라조차 만주대륙의 동북부 방면인 동북만주 곧 연해주에 거주하는 올적합(야인여진, 동해여진, 제성 올적합)을 정벌하려 하였지만 마침내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국은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491년경에 허종 장군으로 하여금 총 4만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올적합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여 크게 성공하였고, 올적합들은 근거지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타 여진 부족들의 종이 되고 말았다고 해요. 이로 인해 조선국은 여진계 조선인 관리인 동청례를 삼위(건주삼위) 경차관, 선유관으로 삼아 건주삼위에 사신단으로 파견했을 때, 신해북정의 성과를 예시로 들며 건주삼위가 조선을 보다 잘 섬기도록 종용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고, 건주삼위 역시 이에 수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군사력이 금나라의 군사력보다 강성하다고 평가받게 할 정도로 성종조때 단행된 신해북정의 성과가 실로 굉장했던 것이지요.


보시다시피, 조선, 여진족 둘 다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시기에 있었던 고산리 전투, 신해북정이 조선의 제 4대 임금인 세종의 재위시기에 있었던 파저강 정벌, 제 7대 임금인 세조의 재위시기에 있었던 정해서정보다 더 큰 위력을 선보였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 신해북정은 다음과 같은 영향을 낳는데요.


평안도 관찰사 신상(申鏛)이 치계하기를,


"주청사(奏請使)의 지로 갑사(指路甲士)가 와서 말하기를 ‘탕참(湯站) 땅에 이르러 천호(千戶) 김영수(金英壽)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지난 10월에 달자(㺚子)가 침범했을 때, 탕참 지휘(湯站指揮)가 그가 거느린 군사에게 모두 흰 옷을 입혀 싸움에 임하여 조선(朝鮮) 용군(勇軍)으로 싸움을 도우러 왔다고 외치게 하고 편전(片箭)으로 달자를 쏘아 죽이매 달자가 그 편전을 주워 보고는 과연 조선 사람의 화살이라 하여 말을 버리고 흩어졌다.」했다.’ 합니다. 야인(野人) 등은 그들이 속은 줄 모르고 틀림없이 우리에게 혐의를 둘 것이니, 방어하는 모든 일을 더욱더 조치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탕참 지휘가 그 군사로 하여금 흰 옷을 입고 조선이라 하며 달자와 싸우게 하매 달자가 과연 의심하고 흩어졌다 한다. 근래에 재변이 있고, 또 얼음이 얼 때에 이런 일이 있으니 변방의 전쟁의 기미가 이미 발생했다. 위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있다는 뜻을 대신이 알게 하려 한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박군효가 아비를 죽인 그 간악한 일은 오로지 교화가 밝지 못한 소치이다. 내가 스스로 깊이 자책하는 바이나, 이 뜻을 받아 교화를 베푸는 것은 대신의 직책이니 대신에게 그것을 알리도록 정부의 낭관(郞官)을 불러 말하라."


하였다.


-중종실록 31권, 중종 12년(1517년) 12월 14일 을묘 2번째기사


평안도 절도사 이장생이 치계(馳啓)하였다.


"금년 11월 25일에 건주위(建州衛)의 야인 낭로오토(浪老吾土) 등 7명이 만포(滿浦)에 와서 말하기를, ‘지난 10월 15∼16일 경에 삭시응가(朔時應可) 등이 요동(遼東)에 들어가 침략할 때, 요동의 군사가 백의(白衣)를 입고 흑초립(黑草笠)을 쓰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활쏘는 기술과 말타는 솜씨가 매우 날래고 용맹스러워 중국 병졸과 같지 않았으므로, 혹시 조선 군마(軍馬)가 싸움을 도와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습니다. 진장(鎭將)이 답하기를 ‘만일 천자가 우리 나라에 징병(徵兵)하였다면, 마땅히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곧장 너희 부락을 공격하였을 것이나, 징병하는 조서도 없었고 또 너희와 본래 원한을 맺은 일이 없는데, 어찌 차마 너희를 공격하겠는가?’ 하였더니, 낭로오토가 답하기를 ‘반드시 요동 조선 사람을 가장하여 우리들을 위협하려고 한 듯하다. 원컨대 영공(令公)은 패(牌)를 만들어 우리 성명을 새긴 다음 도장을 찍어 주면, 조선의 병마가 들어올 때 그것을 보여 죽음을 면하고자 합니다.’ 했습니다."


-중종실록 31권, 중종 12년(1517년) 12월 24일 을축 2번째기사


이는 조선국의 제 11대 임금인 중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517년경의 일인데요. 중국의 명나라군이 조선군으로 위장하여 건주여진을 대파해낸 것 그리고 건주여진측에서도 자신들이 당시에 목격한 중국의 명나라군이 백의를 입고 흑초립을 쓰기도 하였는데, 이들이 활쏘는 기술과 말타는 솜씨가 매우 날래고 용맹스러워 중국(명나라) 병졸과 같지 않아서 조선군이 중국의 명나라군을 도와준 것이 아니냐고 오해했을 정도였지요. 이는 중국의 명나라군, 건주여진 둘 다 모두 조선국의 군사력이 중국 곧 명나라의 군사력보다 강성하다고 인식한 것이지요. 중국의 명나라군은 조선국의 강성한 군사력의 위세를 빌린 거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나아가, 중국군이 외국군의 존재, 군복, 병장기로 위장한 채 대외 전투에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사례를 조선군이 제공해준 것이기도 하지요. 즉, 조선군은 과거의 여진족의 금나라군보다 강성함은 물론, 당시 중국의 명나라군보다 강성한 전세계 제일의 군사력을 지녀왔다고 볼 수 있겠죠. 위의 기록들을 잘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기록들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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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여러분들께서도 잘 보시다시피,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이 자신의 재위시기때인 기원후 1493년경때, 건주여진(건주삼위)에서 조선국을 대도(대국, 대방)라고 언급하는 것은 물론, 성종을 두고서 황제, 대황제라고 부르는 것을 넘어 금황제(금나라 황제) 존함을 성종에게 진상한 기록입니다. 세간에서 대체역사의 개념으로 만반도(만주대륙+한반도)를 언급하고는 하는데요. 알고보면, 이미 실제했던 역사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물론, 만주대륙을 조선의 행정 구역에 포함시키진 않았지만, 조선의 조정이 금황제라는 국제적 권위를 여진족들에게 진상받은 특수한 상황이였으니까요. 나아가, 중국의 당나라 제 2대 임금인 태종이 자신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630년경에 동돌궐국에게 천가한 존함을 진상받았고, 제 3대 임금인 고종이 서돌궐국으로부터 천가한 존함을 진상받은 것과도 유사해, 성종-금황제를 동방의 천가한 이렇게 볼 수도 있겠고, 동시기의 중국의 명나라는 명실록, 명사 외국열전, 동양고전종합 DB를 통틀어서 보아도, 조선국처럼 여진족들에게 금황제 존함을 진상받지 못하였으며, 여진족의 금나라 건국자, 초대 임금인 태조 완안 아골타, 청나라(후금국)의 건국자, 초대 임금인 태조 애신각라 누르하치는 각각 금황제, 후금(청)황제를 자처만 했을 뿐, 대외적으로 공인받지는 못했었는데(이는 후대의 임금들이 타칭화를 해내지요.), 성종은 타칭으로 금황제에 추대(추존)된 것임은 물론, 이 역시, 신해북정 이후에 나오는 기록이기도 해서 그 의의가 상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조선(한국)이 명(중국)보다 북방에 대한 영향력을 잘 발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을 보면 더욱 그러하지요.

정부와 육조에 의논하기를,


"정조의 화붕(火棚) 놀이를 연전(年前)에 김만(金滿)이 이미 이를 보았는데, 지금 사신(중국의 명나라 사신)이 만약 머무른다면 또한 이를 보일 것인가."


하니, 정연·신장·최사강·정흠지·신상·안순 등이 아뢰기를,


"사신이 보기를 청하면 이를 보일 것이요, 청하지 않으면 이를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허조는 아뢰기를,


"화약이 한정이 있는데 한 붕에 허비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더구나, 본국의 을 쏘는 것의 맹렬함이 중국보다도 나으니 사신에게 이를 보여서는 안됩니다. 저들이 비록 청하더라도 마땅히 이를 보이지 마십시오."


하였다.


-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1431년) 10월 15일 병오 4번째기사


부사(副使, 유구국 사신단의 부사)가 후원(後苑)에서 인견(引見)하던 날에 말하기를, ‘내가 중국(中國)과 외국(外國)에 두루 가보지 않는 데가 없는데, 지금 귀국(貴國, 조선국)에 이르니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중화(中華)와 같습니다. 모든 조신(朝臣)들의 거동(擧動)이 복건(福建)의 장락현(長樂縣)의 풍속과 비슷한데 다른 외국(外國)이 미칠 바가 못되며, 임금의 활쏘는 능력도 또한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부사(副使, 유구국 사신단의 부사)가 후원(後苑)에서 관화(觀火)하던 날에 말하기를, ‘화포(火砲)가 맹렬(猛烈)하여 천하(天下)에 비(比)할 데가 없으나, 다만 불꽃의 빛깔이 붉을 뿐인데, 만약 동말(銅末) 장목(樟木)의 기름을 합하여 사용하면 불꽃의 빛깔이 희여질 것입니다.’고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불꽃의 빛깔이 본래 붉은데 어찌 흰 것을 쓰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보통의 것을 변(變)하게 하는 것이 귀(貴)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세조실록 27권, 세조 8년(1462년) 2월 28일 계사 4번째기사 


윤효손이 또 아뢰기를,


"신이 중국 황제(皇帝)의 도성에 있을 때 도성 안의 여염(閭閻)에 모두 화포(火砲)를 설치하였는데, 소리는 비록 크나 심하게 진동(震動)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자(牙子) 왕능(王凌)이 신(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우연히 그대 나라의 후지(厚紙)를 얻어 포(砲)를 만들어서 화포를 쏘았는데 소리가 매우 굉장하였다. 황제가 놀라서 묻고, 도성 안에 명령을 내려 화포를 쏜 자를 크게 찾았으므로, 내가 도망하여 숨어서 면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로 보면, 후지(厚紙)를 경솔하게 중국 사람들에게 줄 수 없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비록 청하는 자가 있어도 후지가 아닌 것으로써 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238권, 성종 21년(1490년) 3월 4일 병진 1번째기사


이는 우리나라 곧 조선국의 총포의 화력이 중국의 명나라의 그것보다도 나은 천하(전세계) 제일의 총포 국가로 명성을 떨쳐왔다는 기록들입니다. 대단히 흥미로울 따름이죠.


여러분들께서도 이를 잘 보시다시피, 세간에서 조선국의 군사력을 고구려의 군사력 더 나아가 고조선~고려와 비교하며 비판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실제로는 조선의 군사력이 상대적 개념, 시대 보정 개념으로 보아도 고조선~고려의 특히 고구려의 군사력에게 전혀 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죠. 조선의 518년 역사에서 군사적으로 일시 곤란을 겪은 적은 있지만, 이는 동서고금을 불문한 사례이지요(군사적 일시 곤란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일시 곤란의 사례를 살펴 보면, 현 우리 대한민국만 해도, 정부가 수립된 지 50여년 만에 국가 경제 부도인 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져 이를 조기 극복해내는데 심혈을 기울였죠. 이를 조기 극복해내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요. 이 5년 동안은 경제 주권이 IMF에게 넘어가 있었을 정도였지요. 이 시기를 두고서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 관리 능력은 본질적으로 엉망이였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처럼, 조선이 518년 동안의 역사에서 군사적으로 일시 곤란을 겪은 것을 두고 조선국의 군사력은 본질적으로 빈약했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조선 조정이 수립된 지 50여년이 될 때에는 조선의 제 4대 임금인 세종의 재위 말년이였었던 것을 보면, 오히려 우리 대한민국이 조선 조정에게 비교되며 비판받을 점이 상당히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현 우리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도 조선국의 군사력에 대해 반면교사가 아니라 그 반대의 관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를 보면, 고려, 조선의 군사력이 고구려, 신라, 발해의 군사력에 비해 결코 꿀리지 않아왔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조선의 제 4대 임금인 세종의 파저강 정벌, 제 7대 임금인 세조의 정해서정보다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고산리 전투, 신해북정의 대외 파급력이 더 강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울 따름입니다. 위에 있는 조선국의 군공들은 모두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고산리 전투, 신해북정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니 말이지요. 나아가, 중국 역사상 문무를 겸비한 왕조(진나라, 수나라는 무비에만 치중하고 문치에는 소홀하였으며, 송나라는 문치에만 치중하고 무비에는 소홀하여서 셋 다 큰 곤경에 처해왔었죠.)였음은 물론, 중국의 역사상 최고 전성기를 구가해온 중국의 명나라조차 조선군의 복식, 병장기로 위장해 조선군의 위세를 빌려서 군공을 이루어냈을 정도이니 더더욱이지요.

 

6. 일본내에서도 한국계가 최강의 명문가, 대영주(다이묘)로 자리잡은 뒤, 한국과 일본간 친선 관계를 역사상 최고의 수준으로 구현해내는 것에 가장 큰 기여를 끼쳐왔는가?


처음에 일본의 대내의홍(大內義弘)이 조상이 백제(百濟)에서 나와서 〈고려를〉 자기의 종국(宗國)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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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국(日本國) 대내전(大內殿) 다다량교홍(多多良敎弘)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단종실록 6권, 단종 1년(1453년) 5월 29일 을유 1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대내전(大內殿) 사자(使者) 유영(有榮)이 예조(禮曹)에 글을 올리기를,

     

    "다다량씨(多多良氏)가 일본국(日本國)에 들어갔는데, 그 까닭은 일본에서 일찍이 대련(大連) 등이 군사를 일으켜 불법(佛法)을 멸(滅)하고자 하였고, 우리 나라 왕자 성덕 태자(聖德太子)는 불법(佛法)을 높히고 공경하였기 때문에 교전(交戰)하였으므로 이때 백제국왕(百濟國王)이 태자 임성(琳聖)에게 명하여, 대련(大連) 등을 치게 하였으니, 임성(琳聖)은 대내공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덕 태자(聖德太子)께서 그 공을 가상히 여겨서 주군(州郡)을 하사한 이래로 그 거주(居住)하는 땅은 ‘대내공 조선(大內公朝鮮)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대내 후손(後孫)의 부정(否定)이 있지만 기로(耆老) 가운데 박식하고 통달한 군자가 있어서 그 계보(系譜)가 상세합니다. 대련 등이 군사를 일으킨 때가 일본국 경당(鏡當) 4년인데 수(隋)나라 개황(開皇) 원년(581년)에 해당하니, 경당(鏡當) 4년에서 경태(景泰) 4년 까지가 모두 8백 73년입니다. 귀국(貴國)에는 반드시 임성 태자(琳聖太子)가 일본에 들어간 기록(記錄)이 있을 것입니다. 대내공의 식읍(食邑)의 땅은 대대로 병화(兵火)로 인하여 본기(本記)를 잃어버리었고, 지금 기록한 것은 우리 나라의 남은 늙은이들이 구술(口述)로써 서로 전하여 왔을 뿐입니다."

    하니, 즉시 춘추관(春秋館)과 집현전(集賢殿)에 명하여 옛 사적(史籍)을 상고하여 이에게 주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옛 글에 이르기를, ‘일본 육주목(六州牧) 좌경 대부(左京大夫)는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고씨(高氏)의 후손인데, 그 선조가 난(亂)을 피하여 일본에서 벼슬살이하여 대대로 서로 계승하여 육주목(六州牧)에 이르렀다.’ 하니, 더욱 귀현(貴顯)이 되는데, 근년 이래로 대마도(對馬島) 등 삼도(三島)에서 흉도(兇徒)를 불러 모아서 우리의 변방을 침입하여 어지럽히고 인민들을 노략(虜掠)질하여서 이웃 나라간의 통호(通好)하는 것을 막았었다. 지난번에 대상국(大相國)이 의(義)로써 군사를 일으키고 육주목(六州牧) 자신이 독전(督戰)하여 그 무리들을 진멸(殄滅)하였다. 이 때문에 변경(邊境)이 평안하고 생민들이 생업에 안정(安定)하고 양국(兩國)이 통호(通好)를 수교하게 되었다."

    하였다.

    -단종실록 6권, 단종 1년(1453년) 6월 24일 기유 1번째기사

    일본국(왜국)이 아스카 시대일 때, 백제국의 조정으로부터 불교를 전수(전래, 전파)받자는 계파(소가 가문)와 이를 반대하는 계파(모노노베 가문)가 내전을 벌일 때, 오우치 가문의 시조가 되는 백제국 왕실의 임성태자가 백제군을 이끌고 가서 소가 가문을 도와서 승리해냈다는 기록입니다.

    "대마도는 잔열 미약한 무리들이라 비록 보내지 않더라도 관계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일본 대내전(大內殿)은 자칭 백제(百濟) 온조(溫祚)의 후손이라 이르고, 본국 사신이 그 나라에 가면 재봉할 줄 아는 자를 청하여 단령의(團領衣)를 만들기도 하고, 일본국에 본래 창고 역참(驛站)이 없던 것을 대내전 창고를 짓고 역참을 설치하였사오며, 비록 국왕이라 할지라도 군사를 쓰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빌리곤 하옵는데, 대내전은 천 또는 만의 병력을 징발할 수 있으니, 이는 우리 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하는 것입니다. 구주(九州)·일기(一岐) 등 여러 섬을 영유하여 그 병력이 매우 강대하온데, 대마주도 그 장악 속에 들어 있어 만약 한번 노하여 침입하게 되면 본국이 응당 그 폐해를 받을 것이니, 어찌 잔열 미약하다 해서 이를 멸시하겠습니까."

    하고...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1438년) 6월 10일 임술 1번째기사

    이는 일본국(왜국)의 오우치 가문(대내전, 대내 가문, 다다량 가문)이 백제국 왕실의 후손된 가문으로써, 일본국에 본래 창고, 역참이 없던 것을 오우치 가문이 일본국에 자리잡은 뒤에 창고를 짓고 역참을 설치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앙정부인 막부라고 할지라도 오우치 가문에게 반드시 사람을 빌리고는 하는데, 오우치 가문은 1000명 또는 10000명의 병력을 징발할 수 있으니, 이는 우리나라 곧 조선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하는 것이라고 언급된 기록입니다.

    대내전(大內殿) : 다다량씨(多多良氏)니, 대대로 주의 대내현(大內縣) 산구(山口)왜말로는 야마구치[也望九知] 에 거주하여 주방(周防)ㆍ장문(長門)ㆍ풍전(豐前)ㆍ축전(筑前) 4주의 땅을 총관하며, 군사가 제일 강성하다. 일본사람의 말에 백제왕 온조(溫祚)의 후손이 일본에 들어와서 처음에 주방주(周防州)의 다다량포(多多良浦)에 도착하여 그 지명으로 성씨를 삼았으며, 지금까지 8백여 년에 대내 지세(大內持世)까지 23대가 되었는데, 세상에서 칭호를 대내전(大內殿)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세는 아들이 없어 조카 교홍(敎弘)을 아들로 삼았다. 교홍이 죽자, 그의 아들 정홍(政弘)이 작위를 이었다. 대내(大內)의 군사가 강성해지자, 구주(九州) 이하가 감히 그 명령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 세계(世系)가 백제에서 나왔다 하여 우리나라와 가장 친선하였다. 산명 종전(山名宗全)이 세천 승원(細川勝元)과 서로 적이 되고부터 정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산명을 원조하여 지금까지 6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소이(少貳)가 이 틈을 타서 다시 박다재부(博多宰府) 등 예전 영지를 탈취하였다. 상세한 것은 축전주 소이전(筑前州少貳殿)에 나타나 있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기록 중.

    대내전(大內殿)이 구청(求請)한 《대장경(大藏經)》에 대한 일을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게 하였는데, 정창손(鄭昌孫)은 의논하기를,

    "우리 전하(殿下)께서 부처[佛]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이단(異端)의 책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족히 보전(寶典)이 못됩니다. 그러나 《대장경(大藏經)》은 그 수량이 많지 않으니, 권사(權辭)로 허락하지 않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고, 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이극배(李克培)·윤호(尹壕)·정괄(鄭佸)은 의논하기를,

    "대내전(大內殿) 다른 도이(島夷)와 비교할 수 없으며, 국가(國家)에서 후대(厚待)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그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대장경》은 이단(異端)의 책이므로, 비록 태워버린다 하더라도 가(可)합니다. 더욱이 인접(隣接)한 국가에서 구하니, 마땅히 아끼지 말고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장경》 1건(件)을 만들려면 그 경비(經費)가 매우 많이 들어서 쉽사리 판비(辦備)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는 국가에 무익(無益)하였기 때문에 왜인(倭人)들이 와서 구하면 문득 아끼지 않고 주었으니, 그 까닭은 공사(公私)간에 《대장경》을 만드는 바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모르기는 하지만 지금 몇 건쯤 있습니까? 얼마 있지 아니하다면 쉽사리 그 청을 따를 수가 없을 듯합니다. 대내전(大內殿)이 비록 우리 나라에서 특별한 예로 후대하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에 있어서 해도(海島)가 요원하고 성세(聲勢)가 접해 있지 아니하여, 비록 뜻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우리에게 노심(怒心)을 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 섬에서 우리 나라에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이 한둘이 아니고, 저 나라 사람들은 부처를 좋아하므로, 《대장경》을 얻었다면 금(金)·옥(玉)같이 여길 뿐만 아니라, 대내전 《대장경》 하사받은 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이를 본받아 벌떼같이 일어나서 주기를 바랄 것인데, 현재 있는 《대장경》이 부족하여 주려고 해도 주지 못한다면 저들이 누구는 후대(厚待)하고 누구는 박대(薄待)한다고 일컬으며 실망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를 당하여 어떻게 민력(民力)을 아끼지 않고 또 인쇄하여 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그 사인(使人)에게 말하기를, ‘전일(前日)에 너희 나라에서 《대장경》을 청구한 것이 한 번이 아니었지만, 국가에서 인쇄한 것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그 청을 따랐었는데, 지금은 모두 쓰고 남은 것이 없어서 청을 따를 수가 없다.’라고 답하여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고, 이파는 의논하기를,

    "대내전은 특별한 예로 후대하는 사람이지만, 이보다 전에 비록 여러 번 《대장경》을 청하였는데도 곧 따를 수 없었던 것은 운반하는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는데, 더욱이 올해는 크게 흉년이 든 것이겠습니다. 이와 같이 사세(事勢)를 인편에 잘 유시(諭示)하고, 그 밖에 접대(接待)하는 절차에서 극진히 후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정난종(鄭蘭宗)은 의논하기를,

    "대내전이 스스로 말하기를, 선대(先代)의 세계(世系)가 우리 나라로부터 나왔으므로, 이미 예전부터의 우호 관계가 있어, 후대하는 것이 여러 추장(酋長)과 달랐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온 사인도 다른 것은 구하는 것이 없고 단지 이 《대장경》만을 청하니, 청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단지 이 《대장경》은 비록 글자는 찼다고 하나, 쓸모 없는 질(帙)인데, 1건에 드는 경비가 실로 많으며, 지금 우연히 찾는 것으로 인연하여 특별한 공로(功勞)도 없이 갑자기 그 청을 따른다면 여러 추장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청할 것이니, 형편상 모두 들어주기가 어렵습니다. 단지 1부(部) 가운데 정요(精要)한 내전(內典)으로 《능엄경(楞嚴經)》·《법화경(法華經)》·《금강경(金剛經)》·《능가경(楞伽經)》 등과 같은 것 약간의 질(帙)을 뽑아서 주고, 예조(禮曹)에서 답서하기를, ‘돌아보건대, 이 《대장경》은 전자에 귀국(貴國)의 여러 사인이 청하여 가지고 갔으므로, 거의 다하여 남은 것이 많지 않다. 지금 정요한 내전(內典) 약간의 질(帙)을 가지고 간절한 요구에 응한다.’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저들이 청하는 것을 막는 실수가 없을 것이고 저들 또한 얻는 것이 있으니, 거의 양쪽이 모두 편할 것입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183권, 성종 16년(1485년) 9월 16일 갑자 6번째기사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오늘 대내전(大內殿) 사송(使送)을 전별하는 잔치에서 원숙(元叔) 등이 소매 속에서 서계(書契)를 내어 놓았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크게 비호(庇護)하는 은혜가 멀리 미치고 화하고 밝은 교화가 치우침이 없어서 신(臣) 등이 입조(入朝)하여 관치(館置) 정실(庭實) 풍영(豊盈)하지 아니함이 없고, 특히 청한 바를 모두 너그럽게 허락함을 입었습니다. 오직 주홍(朱紅)만은 호령(號令)이 이미 나온 뒤에 두세 번 변경하였으므로 불만(不滿)한 뜻이 앙앙(怏怏)합니다. 멀리서 가지고 왔다가 헛되게 가지고 돌아가게 합니까? 이른바 「시집가기를 자랑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신 등이 부끄러움이 있는데 하물며 돌아가면 국주(國主)의 명령을 어긴 것이겠습니까? 부(富)는 하늘 아래의 것을 차지하여 돈과 비단이 창고에 넘치고 금과 은이 땅에 널렸는데, 어찌하여 그 넘치고 널린 것을 베풀어서 우리의 요구하는 바를 구제하지 아니하십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의 약속을 회복하시면 만 번 다행이겠습니다. 또 정홍(政弘)의 서계(書啓) 가운데 이른바 동전(銅錢)·목면(木綿) 등의 제급(題給)을 아직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삼가 명령을 기다립니다. 대내전(大內殿)은 귀국(貴國)과 동계(同系)이고 일본의 명장(名將)입니다. 사국 태수(四國太守)가 되어 이웃 나라가 거의 지호간(指呼間)에 속하였는데, 태평 무사(太平無事)할 때이면 어찌 이런 요구가 있겠습니까? 국주(國主)가 된 자는 창생(蒼生)을 사랑하기를 아들과 같이 하는데, 하물며 적자(嫡子)인 신개(新介)는 천리(千里)를 격하여 군루(軍壘)에 있으니, 어찌 가엾지 아니하겠습니까? 이제 의(義)를 생각하고 힘을 다하여 신개가 백전 백승(百戰百勝)하여 공훈(功勳)을 세워 세상에 뛰어났고 대내전(大內殿)은 귀국과 서로 어깨를 가지런히 하면서 영구히 대려(帶礪)의 맹약을 굳게 합니다. 엄동(嚴冬)이 가까이 닥쳐올 것이니, 방물(方物)의 값을 제급(題給)하여 빨리 귀로에 오를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번거로운 글로 존람(尊覽)을 모독하였으니, 용서해 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관인(副官人) 신우위문위(新右衛門尉)가 또 서계를 내었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엎드려 청하건대 성중(城中)의 귀국 사찰인 원각사(圓覺寺)를 두루 관람하기를 요구하고, 돌아가는 길에는 안동로(安東路)로 내려가기를 요청하며, 통사(通事)인 첨정(僉正) 고공(高公)을 통하여 도움을 받기로 한 목면(木綿)을 그대로 요구하니, 빨리 제급(題給)해 주시면 빨리 귀국하는 닻줄을 풀 수 있겠습니다. 차사원(差使員)인 동래 현감(東萊縣監) 한공(韓公)에게 서간(書簡)을 보내어 독촉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귀국의 흰 거위[白鵝] 암수 한 쌍을 못 위에 놓고 구경하기를 소망하니,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자질구레하게 청하는 일은 모두 들어주라."

    하였다.

    -성종실록 283권, 성종 24년(1493년) 10월 3일 갑자 1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 원주덕(源周德)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었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근래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상국(上國)에 조공(朝貢)하고 돌아온 자는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모두 축하하며 말하기를, ‘폐하의 용봉(龍鳳)과 같은 자태는 천일(天日)의 표상이라 성스러운 덕이 계속 일고, 인자한 교화(敎化)가 바야흐로 풍성하여 역시 중흥(中興)을 선광(宣光)할 것 같습니다.’ 하였으니, 누군들 서쪽을 향해 기꺼워하지 않을 자 있겠습니까? 항차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은 남소(南巢)의 북시(北嘶)에 있는 사사로운 자로서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적읍(敵邑)에 우환이 많아 선인(先人)들의 구호(舊好)를 닦지 못해 왔습니다. 《시경(詩經)》 상서편(相鼠篇)의 ‘예의가 없으면 빨리 죽는다.’라는 뜻에 감복되어 지금 오로지 원주덕(源周德)·심 통사(沈通事) 등을 파견하여 예를 폐지한 죄를 사례(謝禮)하고, 이어 고(告)합니다.
    이 땅의 서울[洛] 동쪽에 절이 있어 청수사(淸水寺)라고 하는데, 원통 대사(圓通大士) 화현(化現)한 곳입니다. 불각(佛閣)과 경전(經殿)은 공중을 가로질러 날아갈 듯하며, 승방(僧房)과 빈관(賓館)은 산골 물가에 닿아 물을 퍼 마실 수 있을 듯하고, 전대(前臺)와 후대(後臺)에는 갖가지 꽃이 피어 있고 상계(上界)와 하계(下界)는 종소리가 서로 화답(和答)하고 있으며, 그 나머지에는 약간의 집들이 들어서 있어 으리으리하게 날아갈 듯하고, 비늘처럼 죽 늘어서 있어 장대(壯大)하고 아름답기가 극도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수년 전 병화(兵火)가 거듭되어 모두 재가 되었으나, 유독 대사(大士)의 전존상(栴尊像)은 세찬 불길 속에서도 남아 있어 경탄한 나머지 마음속으로 절을 다시 일으킬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장마와 가뭄으로 농사때를 잃어 매년 흉년이 들자 군자(軍資)도 오히려 부족한 형편이었으므로, 진작시키려 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그럭저럭 지금까지 끌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고하기를, ‘너는 일찍이 법문(法門)을 위하였으니, 밖에서 보호하여 청수 정사(淸水精舍)의 터를 다시 닦도록 하라.’ 하였고, 다시 대원륜(大願輪)을 타고 나타나서, ‘장군이 몸소 옛 터에다 절을 세워보려 하니, 그대의 일찍이 세웠던 뜻에 중(重)하게 보상하겠거니와, 대사(大士)가 훤히 보고 있으니 감히 원곡(願轂)을 물릴 수가 없다.’ 하였으므로, 이에 감탄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대전(大殿) 한 채를 영조(營造)하여 대사(大士)의 유상(遺像)을 안치하려 하는데, 무릇 대전(大殿)을 안치하려 하는데, 무릇 대전(大殿)이라는 것은 사찰의 근본으로, 근본이 온전하면 지엽은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므로, 곧 양장(良匠)들을 불러 계획하였더니 4만 민전(緡錢)이 필요하였습니다. 상국(上國)을 여러 번 조알(朝謁)하니, 만기(萬機)를 처리하는 여가에 임금께서 불사(佛事)에도 마음을 기울여 인자함을 널리 베푸셨으니, 간절히 바라건대 대전(大殿)의 영조(營造) 자금을 하사하시어 인자함을 흠앙하게 하소서. 오로지 동전(銅錢)을 청구합니다만, 면주(綿紬)와 면포(綿布) 등도 소용됨은 한가지이며, 아울러 비로 대장(毗盧大藏)과 법보 인시(法寶印施)도 간절히 원하는 바입니다. 처음으로 빙례(聘禮)를 닦음에 있어 시재(施財)를 요구하는 것은 예의상 너무나 옳지 못하나, 너그러이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잘것 없는 토산물의 이름을 다음에 주기(注記)하니, 대도(大刀) 2파(把), 부채[扇子] 10파, 거울[鏡奩] 10개, 나갑(螺甲) 2, 벼루[碩] 10면(面), 술병[樽] 1쌍, 치자(梔子) 1백 근, 우피(牛皮) 50매(枚), 후다(厚茶) 1백 근입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33권, 성종 4년(1473년) 8월 9일 무진 2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전(大內殿) 별가(別駕)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의 사자(使者) 원주덕(源周德)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술을 마련해 놓고 인견(引見)하였으며, 상관인(上官人)·부관인(副官人)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였다. 신숙주(申叔舟)를 시켜서 원주덕(源周德)에게 말하기를,
     
    "너희 대내전(大內殿)은 족계(族係)가 우리 나라에서 나갔으므로 서로 교호(交好)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듣건대 편안하다고 하니 기쁘고 위로되나, 다만 너희 나라 전쟁이 어떠하냐?"

    하니 원주덕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연(那衍)은 특별히 성상의 은덕을 입어 무양(無恙)합니다. 본국은 전란이 그치지 아니하기 때문에 상국(上國)에 오래 통신(通信)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란이 평정될 기한이 없어서 특별히 신(臣)을 보내어 성심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물건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고, 예조(禮曹)에서 답서(答書)하게 하기를,

    "요즈음 길이 막히고 음문(音問)이 두절되어 기미(氣味)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여서 궁금하던 중에 글을 받아 평안함을 갖추 알았으니 기쁘고 위로됩니다. 바친 예물은 삼가 이미 계달해 받았습니다. 요구하는 동전(銅錢)은 본국에서 쓰는 바가 아니고 대장경(大藏經)도 여러 고을에서 구해 감으로 인하여 다 없어졌으니, 부탁을 따르지 못합니다. 특별히 중화고(中畫鼓) 1면(面), 중요발(中鐃鈸) 1사(事), 중경(中磬) 1사, 백면포(白綿布) 5필, 인삼(人蔘) 10근, 채화석(彩花席) 5장, 표피(豹皮) 1장, 호피(虎皮) 1장, 유둔(油芚) 2장, 해송자(海松子) 15두(斗)를 하사하여 돌아가는 사신(使臣)편에 부치니, 영수해 받기를 바랍니다. 족하(足下)는 족계(族係)가 우리 나라에서 나가서 강호(講好)하여 대대로 내려오면서 정성을 돈독히 하였는데, 이제 듣건대 군사의 일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니, 오직 밝고 어짐으로써 몸을 보중(保重)하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34권, 성종 4년(1473년) 9월 10일 무술 2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삼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명덕(明德)이 일월(日月)보다 빛나고 성수(聖壽)가 장래에 장구(長久)하시기를 빌고 빕니다. 상국(上國)과 우리 선조(先祖)가 통호(通好)한 지 정홍(政弘)까지 26대째입니다. 상국과 대주(對州)와 아직 동맹(同盟)하기 전에 자주 전쟁하였는데, 그 때에 신(臣)의 선인(先人)이 상국을 위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사졸이 죄다 전사하고 한 사람도 귀국하지 못한 것이 이제 8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게다가 존명(尊命)을 받들어 수우(水牛) 암수를 바치기도 하였으니, 그렇다면 선인의 상국에 대한 충성이 적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정홍은 그 후사(後嗣)로서 임진년에 처음 사자(使者)를 보내어 선인이 맺어 온 구호(舊好)를 닦았는데, 그때 구례(舊例)에 어그러지는 일을 당하여 아껴 주시는 뜻이 매우 없었습니다. 집사(執事)가 옛 맹약(盟約)을 잊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또 사자가 변변치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존명에 따라 곧 거듭 사선(使船)을 보내어 명을 받고자 합니다. 따라서 유구국(琉球國)에서 보내 온 사향(麝香) 1필(匹)을 존명을 받들어 바칩니다. 정홍이 몇 해 전부터 산명 좌금오(山名左金吾)의 군사를 돕느라고 경사(京師)에 머문 지가 몇 해 되었는데, 지난해 3월 18일에 금오가 서거(逝去)하고 그달 28일에 세천 경조(細川京兆)도 서거함에 따라 두 집안의 자제들이 점점 화목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하(殿下)가 대명국(大明國)에 사선(使船)을 보내고자 하매, 신이 명을 받들어 배를 꾸미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그 비용이 매우 많습니다. 상국의 풍부한 재물의 나머지로 은사(恩賜)를 굽어 내리시기를 바라며 앞으로 갈수록 옛 맹약에 따라 충절(忠節)을 지키고자 합니다. 대명국과 유구국에서는 신에 대하여 은문(恩問)이 더욱 후한데, 상국만이 옛 맹약을 잊으신 듯합니다. 교맹(交盟)이 보탬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보명(報命)에 따라 그 뜻을 알아서 엎드려 진정을 아뢰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토의(土宜)나마 작은 뜻을 표합니다."

    -성종실록 45권, 성종 5년(1474년) 7월 27일 경진 3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대내 좌경조윤 중대부 겸 방장풍축주 태수(大內左京兆尹中大夫兼防長豊筑州太守)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이 중[僧] 청감(淸鑑) 등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조선국(朝鮮國) 예조 대인(禮曹大人) 족하(足下)께 올립니다. 무술년 가을에 하사하신 《대장경(大藏經)》은 이듬해 기해년 10월에 사승(使僧)이 싣고 돌아왔고, 겸하여 아름다운 물품을 받았으니, 감사하고 기쁜 뜻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통신사(通信使)로 정림사 주지(定林寺住持) 청감(淸鑑) 등을 보내어 삼가 아룁니다만, 복(僕)의 치내(治內) 축주(筑州) 승천사(承天寺)는 창건한 지가 오래 되어 날로 허물어집니다. 비록 보수할 뜻은 있어도 힘이 넉넉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도움을 귀국에게 요구하니, 이를 도와서 공을 이루게 하여 주소서. 인하여 성수(聖壽)의 만세(萬世)를 빌며, 다음으로 사직(社稷)의 천추(千秋)를 빕니다. 우러러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삼가 후하지 못한 방물(傍物)을 바치니, 별폭(別幅)에 갖추어 기재하였습니다. 애오라지 박한 정성을 표하는 마음 뿐입니다. 이제 통신사 청감(淸鑑) 등에게 명하여 대신 아뢰니, 굽어 살피소서."

    하였고, 별폭에는, 개(鎧) 1령(領), 제연구(諸緣具) 대도(大刀) 2진(振), 주칠견(朱漆鑓) 10병(柄), 주칠완(朱漆椀) 10구(具), 접첩선(摺疊扇) 50병(柄), 백련초(白練綃) 10필(匹), 병풍(屛風) 1쌍(雙), 봉아목(蓬莪木) 50근(斤), 자석문연(紫石紋硯) 10매(枚)이었다.

    -성종실록 158권, 성종 14년(1483년) 9월 13일 계묘 2번째기사
     
     
    대내전(大內殿) 사송(使送) 원숙(元肅) 등이 하직하였다. 도승지(者承旨) 권건(權健)이 명을 받고 후추[胡椒] 종자를 찾아서 보낼 일을 말하니, 원숙(元肅)이 대답하기를,

    "우리 주인은 바로 백제(百濟)의 계통을 받은 까닭으로 마음을 다하여 대국을 사모[向仰]합니다. 후추의 종자가 비록 저희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제가 마음을 다하여 구하면 얻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이니 얻으면 보내겠습니다. 제가 만약 거짓말을 하면 제 몸을 어느 땅에 두겠습니까?"

    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유순(柳洵) 대내전(大內殿)에게 치서(致書)하기를,
     
    "멀리서 동정(動靜)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고 위안이 됩니다. 특히 전하께서 신에게 명하시어 족하(足下)에게 글을 보냅니다. 후추의 씨라고 하면 서독(暑毒)을 다스리는 데 효험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일반적인 약재가 없지 않으나 반드시 여러 종류를 모아서 조제(調劑)한 연후라야 쓸 수 있으니, 궁벽한 시골과 가난한 백성이 갑자기 병이 나면 얻기가 어려우므로 좋은 종자를 얻어 널리 민간에 심게 해서 위급한 때에 자뢰하기를 생각한 것입니다. 귀전(貴殿)이 우리 나라에 파견한 모든 정성스러운 마음이 다른 고을에 비하여 한층 더 돈독하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자뢰하여 지내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좋은 종자의 심을 만한 것을 보내 준다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겠습니다. 그것이 귀하의 토지에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장삿배가 왕래하는 곳에 널리 구하여 보내는 것도 또한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184권, 성종 16년(1485년) 10월 8일 을유 2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대내(大內) 대중 대부(大中大夫) 좌경조윤(左京兆尹) 방장풍축 4주 태수(防長豐筑四州太守)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국(朝鮮國) 예조 참판 족하(禮曹參判足下)께 복계(覆啓)를 드립니다. 삼가 살피건대 〈건강이〉 청승(淸勝)하시다니 기쁘고 위안이 됩니다. 저희 〈집안은〉 계통(系統)이 귀국(貴國)에서 나왔고, 대대로 구호(舊好)를 돈독히 한 지가 오래 되어 더욱 도타왔습니다. 이 때문에 빙사(聘使)가 끊임없이 왕래(往來)하여 덕으로 다스리는 정화(政化)가 하국(下國)에까지 미쳐 남달리 융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를 계속해서 제장(諸將)이 도적[賊]을 토벌한 이래 옹희(雍熙)의 교화(敎化)에 회복됨을 얻지 못하였고, 편맹(編氓) 또한 농상(農桑)을 업(業)으로 삼음이 없으니, 절박하게 근심할 만한 바입니다. 전년[前歲]에는 공손히 양사(兩使)를 보내어 진제(賑濟)를 구(求)하였는데,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은택(恩澤)이 얕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사자[伻]가 돌아오매, 배사(拜賜)하였습니다. 다만 부족되는 것은 동철(銅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보광원(寶光院) 요신(堯信) 전개(專价)로 삼고 대조원(大照院) 종모(宗模)를 부사(副使)로 삼아, 삼가 원지(爰旨)의 흉도(凶徒)의 여얼(餘孽)을 아룁니다. 명(命)이 급히 내리니, 내년 맹동(孟冬)에는 장차 토벌할 것인데, 전포(戰袍)·기치(旗幟)의 비용(費用)인 동철(銅鐵)·면주(綿紬)·목면(木綿)을 인서(仁恕)하여 거만(鉅萬)을 상사(賞賜)하시면 진실로 다행하겠습니다.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전개(專价) 요신(堯信) 등에게 명하여 발돋움하고 우러러보는 사사로움을 빨리 아뢰게 하면서, 변변치 못한 토의(土宜)를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애오라지 양박(涼薄)의 정성을 나타내어 조빙(朝聘)하오니, 빌건대 갈마들여 통하게 해 주소서. 오직 황제 만세(皇帝萬歲)와 재신 천추(宰臣千秋)를 바랍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296권, 성종 25년(1494년) 11월 4일 기축 1번째기사
     
    보시다시피, 일본국(왜국)의 오우치 가문(대내전, 대내 가문, 다다량 가문)이 백제국 왕실의 후손(더 정확히 말하자면, 백제국 왕실의 임성태자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지요.)되는 명문가 및 대영주(다이묘)로써 일본국의 서부 방면인 서일본을 휘어잡은 일본국의 최강자로 군림하였다는 기록입니다. 중앙정부인 막부(당시 중앙정부인 막부는 무로마치 막부였었지요.)도 군사를 쓰려고 하면, 반드시 오우치 가문에게 사람을 빌려갈 정도였다고 할 정도이니까요. 위의 기록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오우치 가문이 일본국에서 최강의 가문으로 번영했었던 것에는 백제국 왕실의 후손으로써의 기반이 굉장히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일본국 자체가 한국에서 분파된 국가이지요. 명문가, 대영주[다이묘]일수록 한국계로써의 정체성이 강했으며, 오우치 가문의 경우는 아예 백제국의 왕실의 왕자를 시조로 삼는 명문가, 대영주 가문, 호족이여서 한국계로써의 정체성이 가장 강한 명문가, 대영주 가문이였었습니다.). 이전 아스카 시대때의 소가 가문(아스카 시대때의 백제계 명문가였습니다.)의 재현답지요. 동시에 조선국의 조정으로 입조해와서 조선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형식을 취한 것은 덤이구요. 또, 오우치 가문은 백제국과 당시의 조선국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간혹, 현 일본인들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한국계 이주민들을 두고선 한국계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보다는 두루뭉실하게 한반도계라고 언급하거나, 한국이 일본국의 근원된 국가가 아니라, 한국과 일본국이 공통된 조상을 지니고 있는 거라고 언급하거나, 급진적인 경우에는 한국을 경유해온 거라는 언급을 하며 기계적 중립 태도들을 나타내는 것에 대한 반론이 되어주는 사례들로써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일본이 본국인 백제의 멸망 이후 한국의 역대 왕조들을 적대시하는 감정을 내재화했다는 언급들이 있는 편인데, 오우치 가문의 예를 보면, 이 언급은 다소 무리로 보여진다는 면에서 더 큰 의의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보면, 고대 한국 이주민들이 야요이인, 도래인으로써 일본(왜)열도의 원주민인 조몬인(최근 일본국의 NHK에서 방송한 일본국의 유전학자들의 유전자 조사에 의하면, 조몬인의 근원은 태국의 소수민족인 마니족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마니족은 네그리토[동남아시아~남태평양권에 거주하는 흑인종들입니다.]의 일원이지요.)들을 정벌해 멸절시키면서 일본열도에서 야요이 시대(고조선계~마한, 진한, 변한계 이주민들이 이뤄냈지요.), 고분 시대(가야계 이주민들이 이뤄냈지요.), 아스카 시대(백제계 이주민들이 이뤄냈지요.)를 이뤄내었는데, 백제계 이주민들이 일본열도에서 아스카 시대를 이뤄내면서 일본국(왜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었음을 위의 기록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일본사에서 야요이 시대~아스카 시대는 고대 한국 정치 세력들의 터전 범위가 일본열도로 확장된 시대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일본국만의 자체적인 역사는 나라 시대 중반부인 기원후 700년대 중반 곧 기원후 750년대 즈음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단군이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고조선을 세웠다는 조선 관원의 설명에 대해 반론을 가하지 않은 기록.
    • 원접사(遠接使)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안관(新安館)에서중국&
    https://m.ppomppu.co.kr/new/bbs_vie...

     

    이를 보면, 현 한국인들의 이상향, 지향점이 완벽하게 이뤄졌었던 시대는 조선 시대 그 중에서도 조선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 연간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울 따름입니다. 유익한 참조가 되었으면 합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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