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상에서 주변국 대비 역량, 대외 영향력이 가장 강성한 시대(현 남북한도 포함입니다.)는 바로 기원후 1800년대 중반(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인 것과 동시에 영국에 의해서 기원후 1700년대 중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입니다.) 이전의 조선 시대(건국자, 초대 임금인 태조~제 25대 임금인 철종의 재위 연간에 해당이 됩니다. 제 26대 임금이 고종, 마지막 임금 및 제 27대 임금이 순종이지요.) 그 중에서도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 연간이라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인데요(조선은 제 1차 최정점이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 연간이였으며, 제 2차 최정점이 제 22대 임금인 정조~제 23대 임금인 순조의 재위 연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아래의 관련 기록들을 참조해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지금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대마도(對馬島) 종성직(宗成職)의 사자 우면로(亐面老)·삼보라 도로(三甫羅都老)가 말하기를, 「웅천 절제사(熊川節制使) 김을손(金乙孫)이 서계(書契)와 진상(進上)하는 환도(環刀)를 발로 찼다.」 하였고, 오라이라(吾羅而羅)는 말하기를, 「웅천 절제사가 우리 진상하는 화살 대[箭竹]를 차면서 이런 물건은 우리 나라에 많이 있다. 개똥과 무엇이 다르냐고 하므로, 내가 다투고 힐난하려 하다가 오면로가 불가하다 하여 그만두었다.」 하였고, 사직(司直) 간지사야문(看知沙也文)은 말하기를, 「관령 사자(管領使者)가 회환(回還)할 때에 웅천 절제사가 포(浦)에 머무르며 바다를 건너는 양식을 주지 않고 꾸짖어서 내쳤다는데, 이것은 전하여 들은 것이고 내가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제포(薺浦)에 항상 살고 있는 왜인(倭人) 신사야문(信沙也文)의 말에, 지난번에 웅천 절제사가 우리와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이제부터 이후로는 너희 무리와 끊고 교통(交通)하지 않을 터이니, 너희들은 너희 땅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하였다 하였고, 원교직(源敎直)의 사자 사부근인(舍富近仁)은 말하기를, 웅천 절제사가 우리의 진상하는 환도를 보고 땅에 던지며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가 무슨 얼굴로 이것을 가지고 진헌하느냐고 하므로, 내가 대단히 부끄러웠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뢴 것이 이와 같으니, 경은 비밀히 웅천 절제사에게 물어서 아뢰라. 또 들으니, 근래에 항상 거주하고 있는 왜인의 방금(防禁)이 해이하여져서 자유로 출입한다 하니, 아울러 비밀히 듣고 보아서 계달(啓達)하라."
하였다.
-세조실록5권, 세조 2년(1456년) 9월 19일 병술 2번째기사
이는 조선의 지방관인 웅천 절제사 김을손이 일본(왜)의 입공사에게 갖은 행패를 부려왔다는 기록입니다. 물론, 행패(갑질)는 국가간 열위를 떠나서 합리적인 행위는 아니지만, 결국엔 행패를 부리는 쪽이 일반적으로는 갑이고 행패를 당하는 쪽이 일반적으로는 을인 것 그리고 위의 기록이 국가간 갑을 관계에 기인한 사례들이라는 것을 보면, 우리의 입장에 있어서 흥미로운 기록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국가에서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을 후하게 대우하여 회유(懷柔)하기를 곡진하게 하는데, 지나온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들은 이류(異類)라고 생각하여 지대(支待)하는 여러 가지의 일에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으니,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또 일본 국왕(日本國王)과 대내전(大內殿)의 사자(使者)는 이미 지나온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한 차례 친히 위연(慰宴)을 베풀도록 했는데도, 관찰사(觀察使)는 이 일을 차사원(差使員)에게 맡겨서 소홀하고 간략하게 하였으니, 이웃 나라와 교제하고 먼 지방을 회유(懷柔)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관찰사(觀察使)가 사고(事故)가 있어서 접대할 수가 없으면 사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하도록 하고, 만약 지대(支待)하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수령(守令)이 있으면 본조(本曹)에서 검속(檢束)하고 핵실(覈實)하여 계문(啓聞)하여서 파출(罷黜)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실록7권, 세조 3년(1457년) 5월 22일 갑신 1번째기사
이 역시, 조선의 지방관들이 대체적으로 여진족, 일본(왜)의 입공 사신단들에 대해 오랑캐라는 이유를 들며 천대해왔다는 기록입니다. 일본의 중앙정부인 막부, 일본의 최강의 명문가, 대영주(다이묘)인 오우치 가문(대내전, 대내 가문, 다다량 가문. 백제계 그것도 백제의 왕자인 임성태자를 시조로 삼는 가문이지요.)의 입공 사신단들에 대해서도 역시 오랑캐라는 이유로 천대해오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조정의 입장과는 다르지만, 전국의 지방관들의 여진, 일본의 입공 사신단들에 대한 보편적인 태도를 알 수 있는 기록인 셈이지요.
임금이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전날 야인(野人)과 왜인(倭人)의 사객(使客)이 함께 아회(衙會)에 참예하면, 그 반열의 서차(序次, 순서)는 야인이 앞에 있고 왜인의 사객이 뒤에 있었다."
하니, 찬성 허조(許稠)가 대답하기를,
"왜의 사객이 뒤에 있게 되면 반드시 분노를 품을 것이요, 중국이 이를 들으면 왜인과 외교(外交)를 벌이고 있다는 혐의를 가지게 될 것이오니, 일시에 같이 참예하지 말도록 하옵소서."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왜인이 우리 나라에 왕래하는 것을 명나라가 어찌 모르는가. 또 본국의 화자(火者)가 중국으로 뽑혀 간 자가 꽤 많은데, 그들이 우리 나라가 왜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으며, 더욱이 왜인들도 말하기를, ‘황제께서 일찍이 이르기를, 「조선의 국왕이 능히 왜객을 열복(悅服)시켜 왕정(王庭)에 오게 했다.」고 하였다.’ 하였으니, 이 말을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야인과 왜객을 동서로 나누어서 들어오게 하는 것이 편하겠다."
하니,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아뢰기를,
"동·서로 나누어 세우라고 이미 하교를 받자왔으니, 중국에서 비록 이 사실을 듣더라도 반드시 마지못해 억지로 화친한 것이지, 진정 서로 우호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리라고 할 것이오니, 일시에 함께 참예하게 한다 해서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옳도다."
하였다.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1431년) 1월 21일 병술 2번째기사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이 와서 숙배(肅拜)하였는데, 화라온 올적합(火剌溫兀狄哈)으로 당상직(堂上職)에 있는 자가 왜인(倭人)보다 상석(上席)에 앉으니, 왜인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어찌 올적합의 아래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하고는, 장차 돌아가려고 하면서 기꺼이 자리에 나아가지 아니하니, 임금이 주서(注書) 김인후(金麟厚)로 하여금 위로해 타이르게 하고 다른 대청에 따로 자리를 베풀어 대접하게 하였다.
-성종실록 262권, 성종 23년(1492년) 2월 21일 임술 5번째기사
위의 두 기록들을 잘 보시다시피, 우리나라 곧 조선국의 조정은 일본국(왜국)을 야인(만주대륙의 모든 여진족)보다 전반적으로 아래의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을 지닌 존재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진족이 일본국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을 지녀온 것으로 간주된 거라고 볼 수 있는 것이겠지요. 조선국 포함 우리나라 역대 왕조들의 여진족들에 대한 인식 그리고 중국의 역대 왕조들의 여진(말갈.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 이렇게 명칭이 바뀌어 왔죠.)족들에 대한 인식이 대체적으로 많이 천시(멸시)해왔었던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이고, 이러한 여진족들보다도 낮게 대접받을 정도면 일본국의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이 국제사회, 국제질서에서 굉장히 낮게 인준되어왔음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인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 시대 동안의 일본국은 현대사로 치면 대략 나쁘게 보면 필리핀, 좋게 보면 인도네시아 정도의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이였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즉, 인구는 많은 편임은 물론, 긍정적인 부분들이 더러 보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행정 체계, 학문 체계 등의 질적 수준(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이 굉장히 낙후되어 있는 후진국 좋게 보면 중진국(개발도상국) 느낌이였다고 파악하시면 될 것인데요. 위에 첨부된 기록들을 보시다시피, 일본국 입장에서 자국의 고대사보다도 더 부끄럽게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보여지는데요. 고대 시대 정확힌 야요이 시대, 고분 시대, 아스카 시대 당시에 현 일본인들의 직접적인 근원, 조상이 된 도래인(외래인, 진출자, 개척자. 곧 야요이인, 고분인, 아스카인)들의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는 한국계 이주민 집단에 의해 문명의 개념이 이식되어서 역사가 시작된 지 약 10세기 곧 1,000여년이 흐른 시점이였는데도 불구하고 국제사회(국제질서)에서 여진(말갈)족보다도 낮은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으로 인준을 받는 신세에 불과해왔으니 말이지요.
이를 보면, 일본국(왜국)의 자체적인 역사가 시작된 나라 시대(일본국[왜국]의 고대사인 야요이 시대, 고분 시대, 아스카 시대는 고대 한국의 이주민[야요이인, 도래인]들이 일본열도의 원주민인 조몬인[일본의 NHK가 최근에 방송한 일본인의 연원에 대한 유전자 조사를 보면, 조몬인의 근원은 태국의 소수민족인 마니족으로 밝혀졌는데, 마니족은 네그리토[동남아시아~남태평양권에 거주하는 흑인종]의 일원이지요.]들을 정벌해 멸절시키면서 이뤄낸 시대들이지요. 여기에 말레이계, 오스트로네시안계, 폴라네시안계도 혼재되어 있었을 것이구요. 야요이 시대는 고조선계~마한, 진한, 변한계 이주민들이, 고분 시대는 가야계 이주민들이, 아스카 시대는 백제계 이주민들이 이뤄낸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고대사는 고대 한국 정치 세력의 터전 범위가 일본열도로 확장된 시대, 일본열도가 고대 한국 정치 세력의 터전 범위에 포함되었던 시대 이렇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국만의 자체적인 역사가 시작이 된 시점은 기원후 700년대 중반 곧 나라 시대 중반 시점부터라고 생각됩니다.)를 시작으로 해서 일본국의 국제적 위상(총체적 역량)에 관련된 기록들을 최대한 수집해 파악해보면, 일본국은 여진(말갈)족보다도 낮게 인준되어온 것이 일반적이였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간에서 인식하는 옛 일본국의 국제적 위상보다 실제 기록들에 나타나는 옛 일본국의 국제적 위상이 상당히 낮아왔던 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구요.
일본 국왕(日本國王)의 서계(書契) 【*】 와 흥양장(興陽場)의 둔전(屯田)을 경작하는 것이 온편한지를 정부와 해조에 의논하였다.
【*일본 국왕의 서계는 대략 다음과 같다. " 계미년에 일이 있어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다가 바람을 따라 귀국에 표류한 짐의 신하 몇 명을 억지로 간사한 도둑이라 하여 죽이거나 묶어서 명나라에 바치고 우리 나라에 돌려보내지 않았으니, 아! 군자도 당(黨)을 합니까. 표류한 유구국(琉球國)의 백성이 전에 귀국에 있었는데 다 후하게 상주고 어루만져 길러서 명나라를 거쳐 돌려보내기도 하고 우리 나라에 부탁하여 돌려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대저 유구국은 일본과 떨어진 것이 몇 만리인지 모르는데, 더구나 귀국에서이겠습니까. 만리나 떨어진 나라를 간담(肝膽)으로 삼고 이웃 나라를 초월(楚越)로 삼는 것은 규약을 어긴 데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북륙도(北陸道)에 금산(金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근년에 여기에서 참 은(銀)이 나니, 참으로 계세(季世)의 큰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이것을 명나라에 바치니 명나라가 아릅답게 여기고 기뻐하였습니다. 이제 귀국에 바치는 것을 별폭(別幅)에 갖추어 두었습니다. 표류한 명나라 백성 80여 명이 바람을 타고 일본의 풍주포(豐州浦)에 흘러왔으므로 그 성명을 묻게 하였더니,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나 다 명나라 안의 경도(京都)에서 1만 리나 떨어진 남쪽 지경의 장사꾼들이었습니다. 이에 사선(使船)에 붙여 귀국에 길을 빌어 돌려보내려고 그들의 뜻을 물었더니, 저들 80여 명이 귀국을 꺼려서 머리를 저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를 조선을 거쳐서 돌려보낸다면 반드시 스스로 몸을 굴려 구덩이에 떨어질 것이다. 유구국을 거쳐서 돌아 가기만을 바란다.’하므로, 마침내 바라는 뜻대로 유구국을 거쳐서 돌려보냈습니다."】
영의정 윤은보 등이 의논드리기를,
"일본 국왕의 서계 안의 다른 말은 사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해야 마땅하겠으나, 상물 안에 은이 많아서 8만 냥에 이르는데, 모두 다 공무(公貿)한다면 다른 상물을 아울러 그 값이 매우 많습니다. 경상도에 지금 저축된 면포의 수로는 그 값을 채워 주기가 어려울 듯하고, 서울에 저축된 것으로 채워 준다면 나르는 데에 폐단이 매우 많겠으니, 호조를 시켜 그 값을 헤아려서 공무를 작정하고 그 나머지는 민간에서 사무(私貿)하도록 허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흥양(興陽)의 둔전(屯田)은 당초에 대신이 군자(軍資)에 보태기 위하여 해조와 함께 의논하여 설치하고서 각 포(浦)의 수군(水軍)을 시켜 번갈아 경작하게 한 것이니 그 계책이 원대하였습니다. 세월이 오래되자 폐단이 생기어 수군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잇달아 유망(流亡)하는 것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므로, 둔전 안에서 메마른 곳을 버려서 가난한 백성에게 주고, 기름진 곳을 가려서 많지 않은 수를 예전대로 경작하게 한 것은, 농군(農軍)을 줄여서 수군의 폐해를 더는 방도였습니다. 이제 전윤양(全允讓)의 상소를 보면 폐단이 오히려 예전과 같으니, 다시 의논하여 백성의 병폐를 없애야 할 듯합니다. 다만 백성이 떼어 받는 것을 허가하여 그 세(稅)를 거두자면 먼저 세력이 센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백성에게 주어 병작(幷作)하여 거기에서 나는 섬수를 살피자면 백성들이 모두 바라지 않을 것이니, 역시 목장(牧場)을 고쳐서 둔전을 둔 뜻에 어그러집니다. 또, 여러 도의 각 고을의 국둔전(國屯田)으로서 수군·육군을 시켜 경작하는 곳이 한둘이 아니니, 한 사람의 정소(呈訴)에 따라 갑자기 고칠 수 없습니다.
일본 국왕의 서계 안에 ‘중국 사람 80여 명이 유구국을 거쳐서 들어갔다.’고 한 것은 문세(文勢)를 다시 보면 이미 들어간 일입니다. 상물이 매우 많아 은이 8만냥이므로 다른 물건의 값까지 아울러 마련하면 관목(官木) 9천여 동(同)이 됩니다. 경상도에 저축되어 있는 목면으로는 그 수를 채워 줄 수 없는 형편이니, 어쩔 수 없이 사섬시(司贍寺)의 관목을 많이 보태어 사야 합니다. 국가에서 다 사자면 국가의 저축이 넉넉하지 않아서 모두 다 살 수 없을 것이니, 공무역(公貿易)을 작정하고 그 나머지는 민간에서 사무(私貿)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중종실록98권, 중종 37년(1542년) 4월 20일 경오 1번째기사
이후에는 여진족보다는 물론, 유구국(류큐국, 현 오키나와)보다도 낮은 대접을 받는 것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대한 항의를 일본의 중앙정부인 막부에서 조선에 조공품들과 함께 진상한 서계(국서)에 적어놓았을 정도였지요. 일본(왜)의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이 생각보다 굉장히 낮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동시기의 우리나라 곧 조선의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은 어떠하였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조께서 천운을 타고 흥기하심으로부터 태종·세종께서 서로 이으시니 동린(東隣)의 헌침(獻琛)과 북국(北國)의 관색(款塞)으로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어 아악(雅樂)·속악(俗樂)이 모두 바르게 되었으나 홀로 번악(蕃樂)은 아직 의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성상께서 용비(龍飛)하여 대위(大位)에 새로 등극하시어 일본(日本)·여진(女眞)의 사자가 와서 즉위를 하례하는 자가 항상 수백 인이 궐정(闕庭)에서 절하고 뵈오니, 해동(海東)의 문물(文物)이 이때보다 성함이 있지 않았습니다.
-세조실록3권, 세조 2년(1456년) 3월 28일 정유 3번째기사
또 야인(野人)이나 일본(日本)이나, 삼도(三島)나 유구국(琉球國) 같은 사이(四夷)가 모두 내정(來庭)하였으며, 아름다운 징조와 이상한 상서가 모두 모이어 만물(萬物)이 흔쾌하게 보니, 운수가 형통하고 아름다운 데에 붙어서 오직 소국(小國)만이 왕을 사모할 뿐이 아니고, 중국이 우리 전하를 대접하는 데 이르러서도 그 예(禮)와 그 의(義)는 옛보다 융숭하고, 열국(列國)보다 성대하니, 우리 전하의 공덕(功德)이 성하지 않고서는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삼황(三皇)도 마땅히 도(道)를 양보하고, 이제(二帝)도 마땅히 덕(德)을 양보하며, 삼후(三后)도 마땅히 공(功)을 양보할 것입니다.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년) 3월 25일 乙酉 4번째기사
이는 잘 보시다시피, 야인(만주대륙의 모든 여진족들에 대한 통칭이자 멸칭. 일본인들을 왜인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것과 같지요.), 일본(왜), 유구국(류큐국, 현 오키나와)이 모두 조선의 조정에 입공해와서 조선의 조정을 섬기는 형식을 취해왔으며, 이러한 소국들만이 조선의 조정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당시로썬 명나라 시대였지요.)에서 조선의 조정을 대접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그 예, 의는 옛(고조선~고려)보다 융숭하고, 조선을 제외한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보다 성대해온다는 언급입니다. 이를 잘 보면, 기원후 1800년대 중반(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이지요.) 시점 이전의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이 누려온 국제적 위상을 축약해서 가장 잘 설명한 기록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여진족의 시조 더 정확힌 여진족의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신라-고려인 집단이라는 기록들이 많고, 일본(왜)의 경우는 한국으로부터 분파된 국가일 정도이기도 하니까요(특히, 백제가 일본이 국가로써 건설이 되는 것에 대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곽연성(郭連城)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야인(野人)과 왜인(倭人)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藩籬)이고, 모두 우리의 신민(臣民)이니, 왕(王)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 하여 혹은 무력(武力)을 사용기도 하고, 혹은 성식(聲息)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작은 폐단 때문에 그들의 내부(來附)하는 마음을 거절하여 물리칠 수가 없다. 내가 즉위(卽位)한 이후에 남만(南蠻)·북적(北狄)으로서 내부(來附)하는 자가 심히 많은데, 모두 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니,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 아니다. 다만 역로(驛路)를 내왕(來往)하는 데 폐단이 있고, 국가에서 이들의 지대(支待)를 잇대기가 어려워서 시의(時宜)를 경(卿)에게 주니, 그 방략(方略)은 다음과 같다.
"1. 만약 낭 발아한(浪孛兒罕)·속로 첩목아(速魯帖木兒)·이귀야(李貴也) 등의 제추(諸酋)가 입조(入朝)하기를 청(請)하거든 답(答)하기를, ‘교지가 있기를 「근일에 내조(來朝)한 지가 오래 되지 않았으니, 금년에는 보내지 말라.」 하셨다.’ 하라. 만약 송골(松鶻)을 잡아와서 별례(別例)로 친히 아뢰겠다는 일이거든 올려 보내라.
1. 흑룡강(黑龍江)·속평강(速平江)의 올적합(兀狄哈)과 화라온(火剌溫)·건주위(建州衛) 올량합(兀良哈) 이만주(李滿住)·동창(童倉) 등 심처야인(深處野人)과 삼위 달자(三衛㺚子)가 관문(關門)을 두드리고 입조(入朝)하기를 청(請)하거든, 그 종인(從人)을 줄여서 후대(厚待)하여 올려 보내라.
1. 야인(野人)으로서 예(禮)를 더할 것이 없는 그 나머지 종인(從人)일 것 같으면, 관(館)에서 후(厚)하게 대우하라."
하였다.
-세조실록8권, 세조 3년(1457년) 7월 29일 경인 2번째기사
보시다시피, 조선의 제 7대 임금인 세조가 야인(만주대륙의 모든 여진족들에 대한 별칭이자 멸칭입니다.), 왜인(일본인들에 대한 별칭이자 멸칭이죠.)들은 모두 조선국에 입공해와서 조선국을 섬기는 신민, 번리(번복, 번국)라고 언급함은 물론, 조선의 북방에 대한 영향력이 흑룡강(흑수, 아무르 강, 헤이룽 강) 유역 곧 만주대륙의 최북단까지이며, 서북방으로는 삼위 달자까지 곧 몽골초원의 동부 방면인 동몽골까지라고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명나라의 영토에 포함되있었던 요동반도 곧 요동 방면을 제외한 만주대륙의 전체와 동몽골이 조선국의 영향권내에 포함되왔음을 알 수 있지요.
인도네시아의 마자파힛(마자파히트) 왕조에서 조선의 조정에 입공해온 기록들 중 하나입니다.
보시다시피, 몽골초원의 동부 방면(동몽골)인 삼위 달자, 만주대륙의 모든 여진족, 일본(왜), 유구(류큐, 현 오키나와), 섬라곡국(현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 조와국(조왜국, 자바국. 현 인도네시아의 마자파힛[마자파히트] 왕조)이 조선의 조정에 입공해온 기록들입니다.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들으니, 올적합(兀狄哈)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 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성종실록 275권, 성종 24년(1493년) 3월 14일 기묘 3번째기사
-이는 성종조때 일어난 이른바 고산리 전투(정벌)의 성과입니다. 야인여진(동해여진 곧 제성 올적합)이 조선국이 비록 강대국이긴 하나, 어떻게 울지현을 넘겠냐고 언급했고, 올적합의 예측과는 달리 조선군은 깊숙히 공격해 들어가서 올적합을 크게 격파했고, 타 여진 부족들이 이를 보거나 듣고선, 올적합도 저렇게 조선군에게 당하는데, 자신들이 어떻게 조선군을 당해내겠냐며 서로 모여서 제단을 만든 뒤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시는 조선과 흔단을 만들지 않고, 조선국에 영구히 신복하겠다고 약조할 정도였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말하기를, ‘대인의 말이 옳소. 그러나 역시 믿을 수 없으니 내가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은데 대인이 싫어하지 않겠소? 지금으로부터 화와 복이 전적으로 대인에게 달려 있소. 지금 나를 따라온 군졸(軍卒)이 자못 많아 그 도로의 험하고 평단한 것을 모두 역력히 알았으니, 국가에서 만약 공격을 하려면 그 형세가 매우 용이하오. 대금(大金, 금나라)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 대인(大人)도 일찍이 듣지 못했소?’ 하니, 달한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그런 강한 자도 오히려 토벌하기를 이와 같이 쉽게 하였는데, 하물며 이 땅은 우리 나라에서 거리가 험한 길로 와도 사흘 길이며 평탄한 길로 오면 겨우 이틀 길밖에 아니 되니, 대인이 만약 귀순한다면 영원한 세대를 편안히 업에 종사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자손이 씨가 없을 것이오. 내 말이 일면으로는 대인에게 공갈치는 것 같지만 일면으로는 대인을 보호하는 것이니, 이 말을 잊지 마오.’ 하니, 달한은 좌우를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도 이 말을 체념(體念)하라.! 이 땅의 도로가 확실히 올적합(兀狄哈)의 사는 곳보다 평이하니, 만약 장난을 하면 와서 토벌하기가 진실로 쉬울 것이다. 올적합은 대금(大金)으로도 능히 제어하지 못했는데 지금 고려(조선)는 능히 깨뜨렸으니 하물며 우리들이겠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고려에서 만약 도로를 다 알고 있다면, 장난하는 자가 스스로 굴복할 것이니, 사신은 모름지기 도로를 소상히 알고 가라.’ 고 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 28권, 연산 3년(1497년) 10월 7일 을해 2번째기사
-이는 성종조때 일어난 신해북정의 성과입니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웠던 시절땐 더할 나위 없이 강성하여서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송나라까지 공격하여서 송나라의 수도(도성, 도읍)인 개봉(카이펑)성까지 함락하고 송나라가 정강지변을 당하게 했으며, 송나라를 장강(양자강, 양쯔 강) 이남으로 몰아냈을 정도였지요. 그나마 고려국만이 물리적인 충돌 곧 전쟁 없이 금나라와 역상하관계를 체결했을 정도이니까요(이는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에도 언급되어 있다시피, 고려국의 제 16대 임금인 예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100년대 초반때 윤관 장군으로 하여금 총 17만여명의 대군으로 여진족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였는데, 여진족들이 이 때에 고려군에 의해 크게 격파되어 금나라를 세운 이후에도 고려국과만은 물리적인 충돌을 피하였지요.). 그런데 이 금나라조차 만주대륙의 동북부 방면인 동북만주 곧 연해주에 거주하는 올적합(야인여진, 동해여진, 제성 올적합)을 정벌하려 하였지만 마침내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국은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491년경에 허종 장군으로 하여금 총 4만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올적합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여 크게 성공하였고, 올적합들은 근거지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타 여진 부족들의 종이 되고 말았다고 해요. 이로 인해 조선국은 여진계 조선인 관리인 동청례를 삼위(건주삼위) 경차관, 선유관으로 삼아 건주삼위에 사신단으로 파견했을 때, 신해북정의 성과를 예시로 들며 건주삼위가 조선을 보다 잘 섬기도록 종용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고, 건주삼위 역시 이에 수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군사력이 금나라의 군사력보다 강성하다고 평가받게 할 정도로 성종조때 단행된 신해북정의 성과가 실로 굉장했던 것이지요.
보시다시피, 조선, 여진족 둘 다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시기에 있었던 고산리 전투, 신해북정이 조선의 제 4대 임금인 세종의 재위시기에 있었던 파저강 정벌, 제 7대 임금인 세조의 재위시기에 있었던 정해서정보다 더 큰 위력을 선보였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 신해북정은 다음과 같은 영향을 낳는데요.
평안도 관찰사 신상(申鏛)이 치계하기를,
"주청사(奏請使)의 지로 갑사(指路甲士)가 와서 말하기를 ‘탕참(湯站) 땅에 이르러 천호(千戶) 김영수(金英壽)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지난 10월에 달자(㺚子)가 침범했을 때, 탕참 지휘(湯站指揮)가 그가 거느린 군사에게 모두 흰 옷을 입혀 싸움에 임하여 조선(朝鮮)의 용군(勇軍)으로 싸움을 도우러 왔다고 외치게 하고 편전(片箭)으로 달자를 쏘아 죽이매 달자가 그 편전을 주워 보고는 과연 조선 사람의 화살이라 하여 말을 버리고 흩어졌다.」했다.’ 합니다. 야인(野人) 등은 그들이 속은 줄 모르고 틀림없이 우리에게 혐의를 둘 것이니, 방어하는 모든 일을 더욱더 조치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탕참 지휘가 그 군사로 하여금 흰 옷을 입고 조선군이라 하며 달자와 싸우게 하매 달자가 과연 의심하고 흩어졌다 한다. 근래에 재변이 있고, 또 얼음이 얼 때에 이런 일이 있으니 변방의 전쟁의 기미가 이미 발생했다. 위에서 방어에 전념하고 있다는 뜻을 대신이 알게 하려 한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박군효가 아비를 죽인 그 간악한 일은 오로지 교화가 밝지 못한 소치이다. 내가 스스로 깊이 자책하는 바이나, 이 뜻을 받아 교화를 베푸는 것은 대신의 직책이니 대신에게 그것을 알리도록 정부의 낭관(郞官)을 불러 말하라."
하였다.
-중종실록 31권, 중종 12년(1517년) 12월 14일 을묘 2번째기사
평안도 절도사 이장생이 치계(馳啓)하였다.
"금년 11월 25일에 건주위(建州衛)의 야인 낭로오토(浪老吾土) 등 7명이 만포(滿浦)에 와서 말하기를, ‘지난 10월 15∼16일 경에 삭시응가(朔時應可) 등이 요동(遼東)에 들어가 침략할 때, 요동의 군사가 백의(白衣)를 입고 흑초립(黑草笠)을 쓰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활쏘는 기술과 말타는 솜씨가 매우 날래고 용맹스러워 중국의 병졸과 같지 않았으므로, 혹시 조선의 군마(軍馬)가 싸움을 도와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습니다. 진장(鎭將)이 답하기를 ‘만일 천자가 우리 나라에 징병(徵兵)하였다면, 마땅히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가서 곧장 너희 부락을 공격하였을 것이나, 징병하는 조서도 없었고 또 너희와 본래 원한을 맺은 일이 없는데, 어찌 차마 너희를 공격하겠는가?’ 하였더니, 낭로오토가 답하기를 ‘반드시 요동이 조선 사람을 가장하여 우리들을 위협하려고 한 듯하다. 원컨대 영공(令公)은 패(牌)를 만들어 우리 성명을 새긴 다음 도장을 찍어 주면, 조선의 병마가 들어올 때 그것을 보여 죽음을 면하고자 합니다.’ 했습니다."
-중종실록 31권, 중종 12년(1517년) 12월 24일 을축 2번째기사
이는 조선국의 제 11대 임금인 중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517년경의 일인데요. 중국의 명나라군이 조선군으로 위장하여 건주여진을 대파해낸 것 그리고 건주여진측에서도 자신들이 당시에 목격한 중국의 명나라군이 백의를 입고 흑초립을 쓰기도 하였는데, 이들이 활쏘는 기술과 말타는 솜씨가 매우 날래고 용맹스러워 중국(명나라) 병졸과 같지 않아서 조선군이 중국의 명나라군을 도와준 것이 아니냐고 오해했을 정도였지요. 이는 중국의 명나라군, 건주여진 둘 다 모두 조선국의 군사력이 중국 곧 명나라의 군사력보다 강성하다고 인식한 것이지요. 중국의 명나라군은 조선국의 강성한 군사력의 위세를 빌린 거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나아가, 중국군이 외국군의 존재, 군복, 병장기로 위장한 채 대외 전투에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사례를 조선군이 제공해준 것이기도 하지요. 즉, 조선군은 과거의 여진족의 금나라군보다 강성함은 물론, 당시 중국의 명나라군보다 강성한 전세계 제일의 군사력을 지녀왔다고 볼 수 있겠죠. 위의 기록들을 잘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기록들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정부와 육조에 의논하기를,
"정조의 화붕(火棚) 놀이를 연전(年前)에 김만(金滿)이 이미 이를 보았는데, 지금 사신(중국의 명나라 사신)이 만약 머무른다면 또한 이를 보일 것인가."
하니, 정연·신장·최사강·정흠지·신상·안순 등이 아뢰기를,
"사신이 보기를 청하면 이를 보일 것이요, 청하지 않으면 이를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허조는 아뢰기를,
"화약이 한정이 있는데 한 붕에 허비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더구나, 본국의 불을 쏘는 것의 맹렬함이 중국보다도 나으니 사신에게 이를 보여서는 안됩니다. 저들이 비록 청하더라도 마땅히 이를 보이지 마십시오."
하였다.
-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1431년) 10월 15일 병오 4번째기사
부사(副使, 유구국 사신단의 부사)가 후원(後苑)에서 인견(引見)하던 날에 말하기를, ‘내가 중국(中國)과 외국(外國)에 두루 가보지 않는 데가 없는데, 지금 귀국(貴國, 조선국)에 이르니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중화(中華)와 같습니다. 모든 조신(朝臣)들의 거동(擧動)이 복건(福建)의 장락현(長樂縣)의 풍속과 비슷한데 다른 외국(外國)이 미칠 바가 못되며, 임금의 활쏘는 능력도 또한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부사(副使, 유구국 사신단의 부사)가 후원(後苑)에서 관화(觀火)하던 날에 말하기를, ‘화포(火砲)가 맹렬(猛烈)하여 천하(天下)에 비(比)할 데가 없으나, 다만 불꽃의 빛깔이 붉을 뿐인데, 만약 동말(銅末)과 장목(樟木)의 기름을 합하여 사용하면 불꽃의 빛깔이 희여질 것입니다.’고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불꽃의 빛깔이 본래 붉은데 어찌 흰 것을 쓰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보통의 것을 변(變)하게 하는 것이 귀(貴)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세조실록 27권, 세조 8년(1462년) 2월 28일 계사 4번째기사
윤효손이 또 아뢰기를,
"신이 중국 황제(皇帝)의 도성에 있을 때 도성 안의 여염(閭閻)에 모두 화포(火砲)를 설치하였는데, 소리는 비록 크나 심하게 진동(震動)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자(牙子) 왕능(王凌)이 신(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우연히 그대 나라의 후지(厚紙)를 얻어 포(砲)를 만들어서 화포를 쏘았는데 소리가 매우 굉장하였다. 황제가 놀라서 묻고, 도성 안에 명령을 내려 화포를 쏜 자를 크게 찾았으므로, 내가 도망하여 숨어서 면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로 보면, 후지(厚紙)를 경솔하게 중국 사람들에게 줄 수 없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비록 청하는 자가 있어도 후지가 아닌 것으로써 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238권, 성종 21년(1490년) 3월 4일 병진 1번째기사
이는 우리나라 곧 조선국의 총포의 화력이 중국의 명나라의 그것보다도 나은 천하(전세계) 제일의 총포 국가로 명성을 떨쳐왔다는 기록들입니다. 대단히 흥미로울 따름이죠.
여러분들께서도 이를 잘 보시다시피, 세간에서 조선국의 군사력을 고구려의 군사력 더 나아가 고조선~고려와 비교하며 비판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실제로는 조선의 군사력이 상대적 개념, 시대 보정 개념으로 보아도 고조선~고려의 특히 고구려의 군사력에게 전혀 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죠. 조선의 518년 역사에서 군사적으로 일시 곤란을 겪은 적은 있지만, 이는 동서고금을 불문한 사례이지요(군사적 일시 곤란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일시 곤란의 사례를 살펴 보면, 현 우리 대한민국만 해도, 정부가 수립된 지 50여년 만에 국가 경제 부도인 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져 이를 조기 극복해내는데 심혈을 기울였죠. 이를 조기 극복해내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요. 이 5년 동안은 경제 주권이 IMF에게 넘어가 있었을 정도였지요. 이 시기를 두고서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 관리 능력은 본질적으로 엉망이였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처럼, 조선이 518년 동안의 역사에서 군사적으로 일시 곤란을 겪은 것을 두고 조선국의 군사력은 본질적으로 빈약했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조선 조정이 수립된 지 50여년이 될 때에는 조선의 제 4대 임금인 세종의 재위 말년이였었던 것을 보면, 오히려 우리 대한민국이 조선 조정에게 비교되며 비판받을 점이 상당히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현 우리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도 조선국의 군사력에 대해 반면교사가 아니라 그 반대의 관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를 보면, 고려, 조선의 군사력이 고구려, 신라, 발해의 군사력에 비해 결코 꿀리지 않아왔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조선의 제 4대 임금인 세종의 파저강 정벌, 제 7대 임금인 세조의 정해서정보다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고산리 전투, 신해북정의 대외 파급력이 더 강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울 따름입니다. 위에 있는 조선국의 군공들은 모두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고산리 전투, 신해북정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니 말이지요. 더군다나, 중국의 역사상 최고 전성기, 통일된 중국, 문무가 겸비된 중국이였던 명나라조차 조선군으로 위장해 조선군의 위세를 빌려서 군공을 세웠을 정도로 조선군의 군사력이 굉장했음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겠습니다.
조선의 군사력에 대해 최대한 세밀하게 정리를 해보면, 조선이 동시기의 중국의 명나라, 옛 여진족의 금나라의 군사력보다도 강성한 군사력을 지녀온 것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이게 조선의 518년 역사에서 일반적인 모습이여왔지요. 518년 역사에서 일시 곤란이 없던 건 아니였지만, 이는 동서고금을 불문한 것이니까요. 나아가, 만반도(만주대륙+한반도)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대체역사에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 연간에 이뤄졌음을 알 수 있죠. 만주대륙이 조선의 행정 구역에 포함된 것은 아니였었지만, 여진족들이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에게 금황제(금나라의 황제)라는 존함을 진상해 조선이 우위에 있는 특수한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니 말이지요.
이를 보시면, 여진족의 시조 더 정확힌 여진족의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신라~고려인 집단인 것보다, 조선의 군사력이 옛 여진족의 금나라, 동시기의 중국의 명나라의 군사력보다도 강성한 것으로 인해(명나라군의 경우는 조선군으로 위장, 가장한 상태로 여진족들을 격퇴시킨 일까지 있었지요. 이에 대한 효과가 지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이 여진족들에게 금황제(금나라 황제) 존함을 진상받을 정도였던 것이 상대적으로 더 와닿는 기록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겠지요. 여기에 조선의 전반적인 국제적 위상, 총체적인 역량,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에 대한 기록들을 첨부하겠으니,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14년 되는 해 1월에 우리 전하께서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대개 정조(正朝)는 천하의 모든 나라가 회동(會同)하는 때이고, 사신으로 가는 것은 현능한 대부의 일인데, 화천 권공이 여기에 뽑혔다. 권공이 길을 떠날 때에 조정에 몸담고 있는 군자들이 시를 지어 이로써 송별하면서 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내가 생각건대, 명나라가 천하를 통치하자 세계 안팎이 신하로 복종하지 않음이 없어 산 넘고 물 건너 조공(朝貢)하는 나라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대대로 조공을 바쳐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예의를 다한 것으로는 우리 조선이 으뜸이며, 황조(皇朝)의 대우 또한 융숭하여 중국 내지(內地)의 제후에 비견될 정도이니, 번방(藩邦)의 여러 나라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우리 동방은 은 태사(殷太師)가 조선을 봉지(封地)로 받은 이래 예속(禮俗)의 아름다움이 중국에 알려졌으나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이 솥발처럼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8, 9백 년 동안은 천하가 분열되고 남조(南朝)와 북조(北朝)가 정권을 달리하였으므로 도로는 통했다 막혔다 하였고 조공은 바치다 말다 하였다. 그러다가 고려조에 이르러 송(宋)나라를 섬겼으나 요금(遼金)과 원호(元胡)가 번갈아 흥성하였으므로 역시나 순수하게 송나라만을 섬기지는 못하였다.
공경히 생각건대, 태조 고황제(高皇帝)가 천하를 평정하니, 우리 강헌대왕(康獻大王)이 고려를 대신하여 나라를 세우고 가장 먼저 귀순하였다. 이에 특별히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하사하고 대대로 동쪽의 번방으로 삼았으며,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면서 보살피기를 부지런히 하고 하사품을 내리기를 많이 하여 더함은 있을지언정 쇠하지는 않았으니, 실로 망극한 황은(皇恩)이다. 이것이야말로 천하가 혼연일체가 되고 문자와 수레바퀴가 같아져 천하가 통일이 되는 때이니, 열국의 대부가 사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서 상국의 문물을 관광하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지난해 우리 전하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에 공이 표문을 받들고 가서 승습(承襲)을 주청하였는데, 부주(敷奏)하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여 능히 윤허를 받았다. 그런데 올해 다시 표문을 받들고 가서 큰 명절을 하례하게 되었으니, 예의를 주선함이 자연스럽고 법도에 맞아 중국의 사대부들이 반드시 훌륭한 사신이라는 칭송을 할 것이고 우리나라에 훌륭한 인재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옛날 춘추 시대에도 열국의 대부인 안영(晏嬰), 자산(子産), 숙향(叔向) 같은 무리는 사명(辭命)과 외교에 뛰어난 능력이 있어 당시에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당당한 천조(天朝)는 예악과 문물의 성대함이 그 옛날을 능가하니, 공이 전후로 사명을 받들고 가서 황제의 조정에 아름다움을 드날리면 그 받을 칭송이 어떠할지 알겠다. 공은 떠날지어다.
정유년(1477, 성종8)에 쓰다.
-사가집(四佳集) 사가문집 제5권 서(序) 하정사(賀正使)로 떠나는 권 화천(權花川)을 보내는 시의 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서장(李恕長)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예로부터 천하(天下)의 형세는 한 번 잘 다스려지면 한 번은 어지러워지고, 비(否)가 극(極)하면 태(泰)가 오는 것이며, 태(泰)가 극하면 다시 비(否)가 되는 것은 이치의 필연(必然)한 것입니다. 우선 우리 나라의 일로써 말한다면, 삼국(三國) 이전에는 분붕(分崩)하기도 하고 이석(離析)하기도 하여 저마다 서로 영웅되고 어른이 되려고 날로 싸움을 계속하였으므로 그 어지러움이 지극하였었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동정 서토(東征西討)하여 18년 만에 신라(新羅)가 항복하고, 또 1년 만에 후백제(後百濟)가 삭평(削平)되어 삼국의 땅이 합하여 하나로 되어서, 경내(境內)가 편안하게 다스려졌습니다. 74년을 지나면서 거란(契丹)의 병란이 있어 현종(顯宗)이 남천(南遷)하고 경성(京城)이 드디어 함락되었다가 근근히 흥복(興復)할 수 있었습니다. 또 94년에 동번(東蕃)이 변경(邊境)을 어지럽게 하므로 숙종(肅宗)·예종(睿宗)이 서로 계속하여 토벌을 이루어 비록 9성(九城)을 설치하였으나, 뒤에 다시 지키지 못하고, 전쟁의 괴로움은 수년 만에야 종식되었습니다. 또 1백 7년 만에 금산(金山)·금시(金始)의 병란이 있어서 고종(高宗)은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를 보내어 몽고(蒙古)와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공멸(攻滅)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몽고의 군사가 우리 강토(疆土)를 침범하여 남(南)으로는 상주(尙州)에 이르고, 또 남쪽으로 나주(羅州)에까지 이르러 동쪽 백성들이 미란(糜爛)하여졌으므로 감히 누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사람 없는 땅을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40여 년 동안을 나라가 나라 같지 않다가 원종(元宗)이 친조(親朝)함에 이르러서 세자(世子)를 상주(尙主)하게 된 뒤에야 차차 안정이 되었습니다. 또 91년이 되어 왜인(倭人)이 침구(侵寇)하기 시작하였고, 9년 만에 홍건적(紅巾賊)이 크게 들어오매 공민왕(恭愍王)이 또 남쪽으로 피난했다가 해가 지나서야 겨우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 군려(軍旅)가 해마다 일어나고, 도적이 날로 심하여 생민(生民)의 무리가 텅텅비어 남은 것이 없게 된 지가 무릇 33년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태조(太祖)께서 운(運)에 응(應)하여 나라를 여시니, 지난날에 경색(梗塞)되었던 추류(醜類)들이 바람을 따라 기쁘게 모여 오고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받아 태평 성대가 계속되어 80여 년 동안 방우(方宇)가 편안하고 조용하므로 생민(生民)들이 늙어 죽기까지 병혁(兵革)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가히 태평(太平)이 극(極)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태평한 때를 당하여 복황지계(復隍之戒)를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깊이 왕고(往古)를 생각하시고, 초연(超然)한 독자(獨自)의 견지(見地)에서 마음을 무비(無備)에 유의하시어 한편으로 말하면 군적(軍籍)을 정비하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 말하면 군려(軍旅)를 훈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4년 동안을 확장하고 완비하여 잘 정리하기에 유루(遺漏)함이 없었던 것인데, 전하(殿下)께서 몸소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손에 요도(瑤圖)를 잡으셨으니, 어찌 가히 구안(久安)의 풍속으로써 고식(姑息)의 정사를 행하여 음우(陰雨)의 방비를 잊고 도충(桃蟲)의 걱정을 소홀히 하겠습니까?
-성종실록48권, 성종 5년(1474년) 10월 28일 경술 4번째기사
1. 신(臣)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을 때에 운남(雲南) 향공 진사(鄕貢進士) 최헌(崔瓛)과 서로 통어(通語)하였는데, 하루는 경사(經史)를 담론하다가 최헌이 신에게 이르기를, ‘새 천자(天子)는 심히 엄명(嚴明)하여 온 천하가 모두 심복(心腹)하고 있으며, 또 기순(祁順)·동월(董越) 등의 사신들이 돌아와서 모두 그대의 전하(殿下)는 현명하다고 하고 칭송하여 중국(中國)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대의 전하는 과연 어떠한 임금입니까?’고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성명인서(聖明仁恕)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시며, 재예(才藝)에 이르러서도 그 정묘함이 극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시어, 온 나라 사람들이 떠받들기를 부모와 같이 하며, 두려워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니, 참으로 성주(聖主)입니다. 또 우리 나라 옛날의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백제(百濟)·동옥저(東沃沮)·북옥저(北沃沮)·예맥(穢貊) 등지를 모두 하나로 합하여 땅은 수천리(數千里)를 보유하고 갑병(甲兵)이 수십만이며, 나라는 부(富)하고 병정은 강하며,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무릇 진공(進貢)하는 토산물은 모두 친히 감동(監董)하고 선택하며, 배표(拜表)하는 날에는 새벽에 교외(郊外)까지 나와 전송하고, 성절(聖節)과 정조(正祖)에는 백관을 거느리고 배하(拜賀)하십니다.’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습니다. 참으로 현군(賢君)이십니다. 그러나 그대의 말로 성(聖)이라 함은 지나치거니와, 황제는 참으로 성명(聖明)이십니다. 성(聖)자를 번왕(蕃王)에게 붙이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순(舜)임금은 동이(東夷)의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의 사람입니다. 현인(賢人)·성인(聖人)이 나는 바를 어찌 화이(華夷)로 구분하겠습니까? 공자(孔子)도 또한 필부(匹夫)이면서 성인이시거늘, 어찌 우리 전하께서 해외(海外)에 거(居)한다 해서 성인이 되지 못한단 말입니까?’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정말 옳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종실록 219권, 성종 19년(1488년) 8월 24일 을묘 3번째기사
보시다시피, 우리나라의 역사상 최고 전성기는 기원후 1800년대 중반(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이지요.) 이전의 조선 시대 그 중에서도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 연간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기록들입니다. 특히, 삼국(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는 한국이 통일(일통)되있는 시대가 아니라, 세 나라로 분열되있는 시대라서 삼국이 서로 전쟁을 일삼느라 시, 서, 예, 의 문화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더딘 시대였었다고 합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시대는 워낙 시대가 멀어서 남아있는 문헌들이 극도로 적어 상고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편이였었구요. 이후의 부여를 맹주로 하는 열국(원삼국, 원삼한) 시대는 삼국 시대와 대동소이했구요. 신라에 의해서 삼국이 재통일되었고, 이후에 신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지만, 고려에 의해 60여년 만에 재통일이 되었고, 고려는 통일된 상태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것을 고려하면, 우리나라의 역사상의 모든 국가들 중 번성한 순서로는 조선, 고려, 신라(통일신라, 발해와 함께 남북국[남북조] 시대를 형성한 신라), 기자조선, 단군조선, 고구려를 맹주로 하는 삼국 시대, 부여를 중심으로 하는 열국 시대 순으로 간주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가 분열되었던 시대는 부여를 맹주로 하는 열국 시대~고구려를 맹주로 하는 삼국 시대(약 1,000여년 동안의 시기였죠.), 현 우리 대한민국을 맹주로 하는 남북분단 시대(약 80여년 정도 되었지요.) 이렇게 된다고 볼 수 있다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조선 시대의 번영 수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접사(遠接使) 허종(許琮)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안관(新安館)에서 중국 사신의 위연(慰宴)을 베풀었을 때에 기악(妓樂)을 올렸더니, 두 사신이 물리치게 하며 말하기를, ‘선황제(先皇帝)의 상(喪) 3년 이내이므로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고, 선위사(宣慰使) 이계남(李季男)이 인정 예물(人情禮物)의 단자(單子)를 올렸더니, 두 사신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를, ‘우리들은 이미 강상(江上)에서도 받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받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또 중국 사신이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관찰사(觀察使) 성현(成俔)과 선위사(宣慰使) 이극돈(李克墩)이 영조(迎詔)하고, 채붕(彩棚)을 베풀어 잡희(雜戲)를 올렸더니, 두 사신이 주목(注目)하여 보았으며, 선위사(宣慰使) 이하가 배조례(拜詔禮)를 의식과 같이 행하고, 또 선위례(宣慰禮)를 행하였습니다. 예(禮)를 마치자, 선위사(宣慰使)가 식물 단자(食物單子)를 바쳤더니, 모두 받지 아니하고, 두 사신이 통사(通事)에게 이르기를, ‘이 선위 재상(宣慰宰相)은 예(禮)가 하나도 잘못됨이 없으니, 이 분은 예(禮)를 아는 재상이다.’고 하였습니다.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기자(箕子)의 분묘[墳]와 사당[廟]이 있습니까? 우리가 배알하려고 합니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분묘는 멀리 성밖에 있어 지금 도달할 수는 없으나, 사당은 성안에 있습니다.’ 하니,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알묘(謁廟)하겠습니다.’ 하고, 즉시 기자묘(箕子廟)에 나아가 배례(拜禮)를 행하였습니다. 묘문(廟門)을 나와 단군묘(檀君廟)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무슨 사당입니까?’ 하므로 말하기를, ‘단군묘(檀君廟)입니다.’ 하니, 말하기를, ‘단군(檀君)이란 누구입니까?’ 하기에 ‘동국(東國)에 세전(世傳)하기를, 「당요(唐堯)가 즉위(卽位)한 해인 갑진세(甲辰歲)에 신인(神人)이 있어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니, 중인(衆人)이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았는데 그 뒤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니, 말하기를, ‘내 알고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걸어서 사당에 이르러 배례(拜禮)를 행하였습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동명왕(東明王)의 신주(神主)를 보고 이르기를, ‘이 분은 또 누구입니까?’고 하기에, 말하기를, ‘이 분은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 고주몽(高朱蒙)입니다.’고 하니, 이르기를, ‘단군(檀君) 뒤에 어떤 사람이 대(代)를 이어 섰습니까?’ 하기에, 말하기를, ‘단군의 뒤는 바로 기자(箕子)인데, 전(傳)하여 기준(箕準)에 이르러 한(漢)나라 때를 당하여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준(準)을 쫓아내고 대신 섰으며, 기준(箕準)은 도망하여 마한(馬韓) 땅에 들어가 다시 나라를 세웠는데 도읍(都邑)하던 터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단군(檀君)·기자(箕子)·위만(衛滿)을 삼조선(三朝鮮)이라고 이릅니다.’ 하니, 이르기를, ‘위만(衛滿)의 후(後)는 한(漢) 무제(武帝)가 장수를 보내어 멸망시킨 것이 한사(漢史)에 있습니다.’ 하고, 즉시 태평관(太平館)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214권, 성종 19년(1488년) 3월 3일 정묘 2번째기사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조선의 관원들과 단군, 기자의 묘를 보면서 문답을 한 기록입니다. 단군은 중국의 역사상 첫 임금인 요 임금(위의 기록에 언급된 '당요' 가 곧 '요 임금' 입니다.)과 같은 시기에 고조선을 수립한 임금으로 기록되어온 임금인데요.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조선의 관원에게 이(단군묘)에 대한 설명을 듣고선 납득을 하면서 반론을 가하지 않은 점이 정말 흥미로운 부분이지요. 기자야 은(상)나라의 제 31대 임금 및 마지막 임금인 주왕의 태사(전담 스승)이자, 은나라 왕실의 왕자였던 기자가 은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무왕에 의해 수립되자, 고조선으로 망명해 고조선의 임금이 되어 고조선인들을 위해 교화를 가감없이 펼쳐 기자조선을 시작시킨 임금으로써 국내외에 공통되게 기록되온 임금이라서 놀랄 것도 없지만 말이지요. 이를 보면, 우리나라가 중국과 역사(문명)의 시작이 같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이에 대해선 아래의 기록들을 더 참조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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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이문등록(吏文謄錄)》을 강(講)하다가 중국[中朝]에서 ‘외국인(外國人)의 출입(出入)을 수검(搜檢)하는 방문(榜文)’에 이르러서, 임금이 시강관(侍講官) 이명숭(李命崇)에게 묻기를,
"지금 우리 나라 사람이 출입할 때에도 수검을 하는가?"
하니, 이명숭이 대답하기를,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하여, 예(禮)로써 대우합니다. 신이 전일에 북경[京師]에 갔을 때 수검한다는 방문이 궐문(闕門)에 걸려 있었는데, 2, 3일 뒤에 곧 철거(撤去)하였으므로, 외랑(外郞)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예부 상서(禮部尙書) 추간(鄒幹)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조선은 예의의 나라로서 이것을 보면 반드시 우리에게 마음이 좁다고 할 것이니, 청컨대 보이지 말게 하소서.」하였기 때문에 철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영 신 등이 돌아올 때에도 수검한다는 영(令)이 없었습니다."
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 권건(權健)이 아뢰기를,
"신이 한명회(韓明澮)와 더불어 경사에 갔다 돌아올 때에는 수검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였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145권, 성종 13년(1482년) 윤8월 13일 기묘 3번째기사
이는 여러분들께서도 잘 보시다시피,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서 자국의 조정(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와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우리나라 곧 조선국이 예의지국(전근대 곧 전근현대[근현대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대 곧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들에 대한 통칭입니다.] 내내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에서 동양문명권 정확힌 동아시아[동북아시아]문명권이 가장 선진적인 문명권이여왔는데요. 동아시아문명권에서는 고급문화, 고급철학을 두고서 예의, 인의 이렇게 언급해왔죠. 이 동아시아문명권에서는 중국, 한국이 양대 최선진국이여왔지요.)이라고 하여, 예로써 대우한다는 뜻으로 전세계의 모든 나라의 사람들 중에서 오직 조선인들에게만 출입국을 할 때 수검(검사)을 시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의 사람들이 중국의 명나라에서 출입국을 할 때 오직 조선인들에게만 수검(검사)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지요. 이는 그만큼 조선국이 번영, 융성한 나라여왔기에 가능한 혜택들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현 우리 대한민국도 외국에 가서 우리 대한민국의 여권을 보여주면, 외국의 출입국심사대에서 프리패스를 시켜준다고는 하지만, 검사를 안 하지는 않는데(프리패스한 뒤에도 세관검사라는 과정이 국적을 상관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행해지게 되어있습니다. 보안검사도 마찬가지이지요.), 조선국은 오직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출입국을 할 때에 수검(검사)을 받지 않았으니, 현 우리 대한민국에게도 시시하는 바가 크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아가, 기원후 1800년대 중반(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한 시점이지요.)~1900년대 중반의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인 영국,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인 기원후 1900년대 중반 이후의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인 미국도 다른 국가들에게 해주지 않아오는 대접(미국도 자국과 더불어서 영미권의 국가들인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에게 해주지 않은 대접으로 보입니다.)을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조선국은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 동안 변함이 없이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이여온 중국에게 받아왔던 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이 상마연에서 천사에게 이르기를,
"어제 듣건대, 대인(大人)들께서 과인(寡人)을 주공(周孔)에게 비유하셨는데,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독서(讀書)는 반드시 의리(義理)의 정미한 속뜻을 알게 된 다음에야 겨우 학문에 통했다고 할 수 있는 법인데, 과인은 배웠다는 것이 고루하고 노무(魯莽)한 학문이니, 비록 독서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대인들을 만나게 되어 천번 만번이나 희한하고 다행한 일이라 하겠으니, 바라건대 두 분께서 아름다운 말과 좋은 교훈을 가지고 분명하게 나를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또한 차분히 교훈을 받기가 소원입니다."
하매,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학식이 천박한데, 이번에 와서 현명한 왕께서 가지고 있는 덕성(德性)과 학문에 근본한 바가 구비하지 않은 데가 없으심을 직접 보게 되어, 우리들로서는 한마디도 도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제(聖帝)께서 등극[龍飛]하신 첫머리에 두 분 대인께서 명을 받고 나오셨는데, 우리 나라[小邦]에서 반드시 잘못한 일이 많을 것이니, 두 분께서 분명하게 지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매, 상사가 말하기를,
"이번에 문헌(文獻)의 나라에 와보니, 위로는 현명한 왕으로부터 아래로 대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예의와 겸양(謙讓)이 풍속을 이루어 법도가 환하게 밝았는데, 우리들이 어떻게 그런 속에서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필연(筆硯)과 지묵(紙墨)은 곧 문방(文房)의 미미한 것이므로 비록 가져다 쓰신다 하더라도 염치에 손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매, 두 사신들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우리들이 사리와 법도를 준수할 것으로 알고 차출하여 나오게 된 것이니, 비록 미미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받게 된다면 이는 조정을 속이는 일입니다."
하였다.
-중종실록43권, 중종 16년(1521년) 12월 9일 정해 3번째기사
이는 조선에 파견된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의 정사가 조선의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이 굉장히 뛰어나 자국(중국의 명나라)이 교화시킬 것이 없다는 극찬을 해준 기록입니다. 이는 굉장히 의의있는 기록이 아닐 수 없는데요. 이를 뒷받침을 해주는 기록들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종실록265권, 성종 23년(1492년) 5월 29일 무술 1번째기사
이 역시 마찬가지인 기록이지요.
공용경(龔用卿)이 중국 조정에 돌아가서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문물(文物)과 예의 법제(禮義法制)가 중국과 다름이 없다.’고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문장(文章)이 부끄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부 상서도 공천사의 말을 듣고 감탄해 마지아니하여, 우리 나라 사신을 보고 칭찬하기를 ‘그대 나라의 문물과 예의 법제가 중국과 다름없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하였고, 또 옥하관(玉河館)의 주사(主事)와 서반(序班) 등에게 주의시켜 조선 사람은 삼가 소홀히 대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이는 다만, 학문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매일 제술하는 것을 연습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중종실록 86권, 중종 32년(1537년) 11월 3일 무인 3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나라에서 조선국의 예의, 문물의 선진화 수준이 중국과 동급이라고 극찬해왔던 기록들 중 하나입니다.
장녕(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이 말하기를,
"금일의 칙서(勅書)는 중국[明] 조정에서 저 사람들을 편드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朝鮮)은 본래 ‘예의의 나라[禮義之邦, 예의지방]’이므로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명 태조 주원장) 이래 본국(本國)을 대우하는 예(禮)가 다른 나라와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 위의 항목의 사의(事意)를 일일이 회주(回奏)하신다면 중국[明] 조정에서 저 사람들을 금지시켜 다시는 원수를 갚는 짓을 행하지 못하도록 할 것인데, 실로 황제 폐하의 지극한 은혜이요, 조선(朝鮮)의 큰 복(福)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머지 사연(辭緣)은 다 회주(回奏)에 쓸 것이니, 대인(大人)은 여러 말 할 필요가 없소."
(중략)
장녕이 대답하기를,
"이미 자세히 알았습니다. 중국[明] 조정에서도 조종(祖宗) 이래로 귀국(貴國, 조선국)을 심히 후하게 대접하였으니, 귀국(貴國)의 사신이 이르면, 중국[明] 조정에서 으레 제일의 반열(班列)에 위차(位次)하게 하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그러한 일이 없으니 이것이 그 하나이요, 황제(皇帝)께서 신하들에게 연회(宴會)할 때 전상(殿上)에 시좌(侍坐)하니 이것이 그 둘째이요, 귀국(貴國)에서 자제(子弟)를 보내어 입학(入學)할 때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 주원장)께서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것이 그 세째입니다. 그 나머지 대접하기를 후하게 한 것을 일일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중국[明] 조정에서 지금 칙서(勅書)를 내린 것도 사건의 시말(始末)을 알아서 저 사람들을 경계하고 금지하여 와서 난(亂)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고자 함이니, 전하께서는 모름지기 이 뜻을 아시고 명백하게 회주(回奏)하여 주소서."
하였다.
-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1460년) 3월 2일 기묘 1번째기사
태조께서 천운을 타고 흥기하심으로부터 태종·세종께서 서로 이으시니 동린(東隣)의 헌침(獻琛)과 북국(北國)의 관색(款塞)으로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어 아악(雅樂)·속악(俗樂)이 모두 바르게 되었으나 홀로 번악(蕃樂)은 아직 의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성상께서 용비(龍飛)하여 대위(大位)에 새로 등극하시어 일본(日本)·여진(女眞)의 사자가 와서 즉위를 하례하는 자가 항상 수백 인이 궐정(闕庭)에서 절하고 뵈오니, 해동(海東)의 문물(文物)이 이때보다 성함이 있지 않았습니다.
-세조실록3권, 세조 2년(1456년) 3월 28일 정유 3번째기사
또 야인(野人)이나 일본(日本)이나, 삼도(三島)나 유구국(琉球國) 같은 사이(四夷)가 모두 내정(來庭)하였으며, 아름다운 징조와 이상한 상서가 모두 모이어 만물(萬物)이 흔쾌하게 보니, 운수가 형통하고 아름다운 데에 붙어서 오직 소국(小國)만이 왕을 사모할 뿐이 아니고, 중국이 우리 전하를 대접하는 데 이르러서도 그 예(禮)와 그 의(義)는 옛보다 융숭하고, 열국(列國)보다 성대하니, 우리 전하의 공덕(功德)이 성하지 않고서는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삼황(三皇)도 마땅히 도(道)를 양보하고, 이제(二帝)도 마땅히 덕(德)을 양보하며, 삼후(三后)도 마땅히 공(功)을 양보할 것입니다.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년) 3월 25일 乙酉 4번째기사
이는 잘 보시다시피, 야인(만주대륙의 모든 여진족들에 대한 통칭이자 멸칭. 일본인들을 왜인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것과 같지요.), 일본(왜), 유구국(류큐국, 현 오키나와)이 모두 조선의 조정에 입공해와서 조선의 조정을 섬기는 형식을 취해왔으며, 이러한 소국들만이 조선의 조정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당시로썬 명나라 시대였지요.)에서 조선의 조정을 대접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그 예, 의는 옛(고조선~고려)보다 융숭하고, 조선을 제외한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보다 성대해온다는 언급입니다. 이를 잘 보면, 기원후 1800년대 중반(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이지요.) 시점 이전의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이 누려온 국제적 위상을 축약해서 가장 잘 설명한 기록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여진족의 시조 더 정확힌 여진족의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신라-고려인 집단이라는 기록들이 많고, 일본(왜)의 경우는 한국으로부터 분파된 국가일 정도이기도 하니까요(특히, 백제가 일본이 국가로써 건설이 되는 것에 대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왕무가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조선을 한 집같이 보아 외국으로 대접하지 않습니다..."
-세종실록66권, 세종 16년(1434년) 10월 14일 정사 2번째기사
하물며 중국은 우리 나라를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 하여 대접하는 도리가 해내 제후(海內諸侯)와 다름이 없는데...
-성종실록46권, 성종 5년(1474년) 8월 24일 병오 4번째기사
신의 생각으로는,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가 봉(封)함을 받은 이래로 대대로 예의(禮義)를 지키었고, 중국도 또한 예의를 지키는 나라로 대우하기를 매우 중히 하였으며, 모든 번국(藩國)의 우두머리에 두었은즉, 이제 추봉(追封)하는 명(命)이 또 어찌 우리 나라를 낮추어서 경솔하게 근거없는 일을 하였겠습니까? 또 임금의 일은 반드시 기록하여야 하는데, 기록하고서 법이 될 게 없으면 후사(後嗣)가 무엇을 본보기로 삼겠습니까? 반드시 감히 아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종실록59권, 성종 6년(1475년) 9월 19일 을축 2번째기사
"... 그러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대우함에 있어 은혜로 베푸는 예절이 매우 후(厚)해서 하사품도 도타웠는데, 이번 성절(聖節)의 행차에서도 호송군이 3백이 넘는 기병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천자(天子)의 명령이 아니고서 그렇게 되겠는가? ..."
-성종실록112권, 성종 10년(1479년) 12월 21일 임신 4번째기사
이것은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서 자국의 조정(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와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우리나라 곧 조선국에게만 특례를 변함이 없이 베풀어왔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국의 사신단을 호송할 땐 300명이 넘는 기병대를 동원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 기록입니다.
임금이 악차(幄次)에 나아가니, 두 사신이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를 불러 사물(賜物) 주는 것을 마치고 나와 자리[次]에 나아갔다. 임금이 두 사신에게 전(殿)에 오르기를 청하니, 두 사신이 재배(再拜)하거늘 임금이 답배(答拜)하고,
"과인(寡人)이 삼가 칙서(勅書)를 읽으니, 이르기를, ‘성교(聖敎)가 미치는 곳은 의당 은택이 미쳐야 한다.’고 하였으니, 내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해(四海)의 밖은 무려 만국(萬國)이 되는데, 우리 나라는 대대로 충성을 돈독히 한다 하여 내려 주신 은전이 편벽되게 융성하고, 또 두 대인(大人)을 선발하여 조칙(詔勅)을 받들고 오게 하시어 황은(皇恩)이 답지(沓至)하였으니, 감격함이 망극(罔極)합니다."
하였는데, 두 사신이 말하기를,
"오늘 현왕(賢王)께서 두 번씩이나 번거롭게 거둥하시니 황공 황공(惶恐惶恐)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강을 건너온 이래로 곳곳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해 주심을 거듭 받으니, 현왕(賢王)의 두터운 예우에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의상 당연한 것인데, 어찌 감사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성종실록 214권, 성종 19년(1488년) 3월 13일 정축 11번째기사
중궁(中宮)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받고 이어 내외 명부(內外命婦)의 축하를 받았다. 황제의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우리 조종이 천도(天道)를 봉행하여 인(仁)이 만방을 덮으므로, 봉작(封爵)의 은혜가 멀다고 해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내자(內子)를 추봉(推封)하는 의식은 오직 예의지국(禮義之國)에만 특별히 시행하노라. 성헌(成憲)이 구존하니 잊어서는 안 된다. 너 윤씨(尹氏)는 곧 조선국(朝鮮國)의 배신(陪臣) 윤지임(尹之任)의 딸로서 내칙(內則)을 따라 어진 임금의 계배(繼配)가 되었는데, 내정(內政)에 마땅하고 치화(治化)에 도움이 있으리라. 이에 특별히 국왕의 청을 따라 조선 국왕의 계비로 봉하고 고명을 내린다. 아, 순종함으로 임무를 삼았으니 일찍이 어미의 훈계를 들었고, 경계로 서로 도우니 또한 제사가 내조를 힘입으리라. 언제나 공경하고 삼가 다 같이 아름다운 상서를 맞이하리로다."
하였다. 하사한 관복과 물건은, 주관(珠冠) 1정(頂), 대홍저사협대삼(大紅紵絲夾大衫) 1건(件), 청저사채수권금적계협배자(靑紵絲綵繡圈金翟鷄夾褙子) 1건, 청선라채수권금적계하피(靑線羅綵繡圈金翟鷄霞帔) 1건, 녹세화저사철채수적계단삼(綠細花紵絲綴綵繡翟鷄團衫) 1건, 홍암화저사협오아(紅暗花紵絲夾襖兒) 1건, 청암화저사협군(靑暗花紵絲夾裙) 1건, 아홀(牙笏) 1부(部), 금추두(金墜頭) 1개, 잡색저사(雜色紵絲) 4필, 잡색라(雜色羅) 4필, 서양포(西洋布) 10필 등이다.
-중종실록 32권, 중종 13년(1518년) 4월 21일 기축 2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 조정에서 자국(중국의 명나라)의 조정에 입조해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조선국에게만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에 해당되는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오는 것은 물론, 아예 조선국의 또다른 국호(국명)로 예의지국 곧 최선진국 이라고 언급했을 정도입니다. 요새로 치면, 현 우리 대한민국을 두고 대한민국이 아닌 최선진국 이렇게 호칭한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이를 보면, 현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전성기가 아니라, 그 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 북한이 우리나라 역사상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최약체고, 그 다음이 현 우리 대한민국이라고나 할까요? 이는 현 중국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만큼, 중국과 한국의 역대 왕조들이 지녀온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이 굉장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현 중국과 한국은 근래에 본격적인 약진을 하면서 이를 본격적으로 복구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즉,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역사(문명) 시대가 시작된 이래 기원후 1800년대 전반(기원후 1800년대 중반 시점부터는 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이지요.) 시점에 이르는 반만년의 시기 동안 자신들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조선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에게만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에 해당되는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온 것은 물론, 규모가 자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을 뿐,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은 자신들과 동급이며 전세계의 모든 타국들이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칭송해온 것이죠.
이를 보면, 현 한국, 중국은 지금도 전반적으로 굉장히 부강한 국가들이지만, 아직도 둘 다 반만년 역사상 최약체입니다. 상대적 개념, 시대 보정 개념을 적용하는 건 당연한 것이겠구요. 그만큼, 한국과 중국이 역사(문명) 시대가 시작된 이래 기원후 1800년대 전반(기원후 1800년대 중반 시점부터는 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이지요.) 시점에 이르는 반만년의 시기 동안 전세계의 압도적인 양대 최강대국, 최선진국이여올 정도로 예로부터 굉장히 부강해온 국가들이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겠지요(현 우리 대한민국은 우리나라의 역사상에서 현 북한 다음가는 역사상 최약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연관을 지어서 보면, 전세계 역사상에서 역사(문명) 시대가 시작된 이래 기원후 1800년대 전반에 이르는 반만년의 시기 동안은 국제사회, 국제질서가 한국, 중국이라는 두 존재들 때문에 돌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벽돌처럼 고착화가 되어왔었다고도 파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울 따름이라고나 할까요?
등극사(登極使)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 부사(副使)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 정조사(正朝使) 연원군(延原君) 이숭원(李崇元) 등이 돌아오다가 요동(遼東)에 이르러 치계(馳啓)하기를,
"신 등이 북경(北京)에 있을 적인 정월 19일에 통사(通事) 박효순(朴孝順)이 예부(禮部)에 이르자, 마침 한림 원외랑(翰林院外郞) 마태(馬泰)를 보았는데, 말하기를, ‘나는 시독관(侍讀官) 동월(董越)의 배리(陪吏)입니다. 〈동월은〉 이제 반조 정사(頒詔正使)로 차임되어 그대 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대 나라 사람을 만나 도로의 멀고 가까움을 자세히 묻고자 하니, 그대는 마땅히 가서 만나보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하기에, 이튿날 신 등이 박효순으로 하여금 가서 보고 말하게 하기를, ‘본국 재상(宰相)은 등극(登極)을 하례하는 일로써 입조(入朝)하여 내일은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인데, 대인(大人)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본국에 사신으로 온다는 것을 들었으니, 길을 떠나는 시일을 감히 묻겠습니다.’ 하니, 동월(董越)이 대답하기를, ‘윤정월(閏正月) 11일이나 19일 중에 길을 떠날 것이나, 다만 요새(遼塞)의 추위가 심하여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서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라고 하고는, 인해 묻기를, ‘전하의 춘추(春秋)가 얼마입니까?’라고 하기에, 박효순이 대답하기를, ‘나는 미천(微賤)한 신하이므로 감히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도로의 원근을 묻기에, 대답하기를, ‘요동에서 의주(義州)까지 8참(站)이고 의주에서 왕성(王城)까지 28참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대 나라의 참마(站馬)의 좋고 나쁨과 교자(轎子)의 사정이 어떻습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본국의 참로(站路)는 일체 중국과 같아서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는 것은 오직 대인의 편리한 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동월이 말하기를, ‘나는 바로 지금 황제가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의 시강(侍講)입니다. 이전에는 그대 나라 사신을 모두 행인사원(行人司員)으로 차임(差任)하고 당상원(堂上員)을 차임해 보낸 적이 없었는데, 이제 조정에서 그대 나라가 사대(事大)하는 정성이 지극함으로써 특별히 나와 같은 늙은 사람을 사신으로 선발했으니, 이 뜻을 재상에게 말로 전하시오.’라고 하자, 편수관(編修官)이라고 일컫는 이가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주인(主人)은 동궁의 옛 시강(侍講)으로서 당상관으로 승진되었으니, 그대의 나라에서는 마땅히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212권, 성종 19년(1488년) 윤1월 15일 경진 2번째기사
신시(申時)에 중국 사신이 조서와 칙서를 받들고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니,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나아가 맞이하였다. 중국 사신이 조서와 칙서를 받들어 각각 용정(龍亭)에 안치하였는데 그 칙서(勅書)는 장전(帳殿)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임금이 조서(詔書)를 인도하여 연(輦)을 타고 앞서가고 중국 사신은 말을 타고 조서를 따라서 갔다. 경복궁(景福宮)에 이르러 반조(頒詔)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는데, 그 조서에 말하기를,
"천명(天命)을 받들고 천운(天運)을 계승한 황제(皇帝)는 조서(詔書)하노라. 생각하건대 우리 조종(祖宗)은 성성(聖聖)이 서로 이으시고 밝은 천명(天命)을 순응하여 중화(中華)와 사이(四夷)의 임금[王]이 되었도다. 그 창업(創業)하고 수성(守成)하신 신공(神功)과 성덕(聖德)은 진실로 왕고(往古)에 도월(度越)하셨도다. 우리 황고(皇考) 대행 황제(大行皇帝)께서 통서(統緖)를 이으심에 미쳐서는 심인(深仁)과 후택(厚澤)이 해우(海隅)까지 덮은 지 이에 2기(紀)가 되었는데 부지런히 노력하여 잘 다스리려고 했던 마음은 오히려 밤낮을 겨를하지 못하셨는데 병환으로 인하여 갑자기 철의(綴衣)를 내보내니 참으며 빙궤(憑几)의 말씀을 듣고 외람(猥濫)되게 신기(神器)의 부탁을 받았는데, 슬픔이 바야흐로 성하여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당시에 친왕(親王)·문무 군신(文武群臣)과 아래로는 기로(耆老)·군민(軍民)에 미치기까지 합사(合詞)하여 대궐에 엎드려 권진(權進)한 것이 재삼(再三)에 이르렀도다. 사양하고 거절하였으되 얻지 못하여 이에 유명(遺命)을 좇아서 9월 초 6일에 삼가 천지(天地)·종묘(宗廟)·사직(社稷)에 고(告)하고 황제(皇帝)의 위(位)에 나아갔도다. 이에 부비(付畀)하신 중(重)함을 돌아보건대, 자견(仔肩)의 어려움을 깊이 두려워하여 힘써 널리 구제하기를 도모하고 한결같이 치도(治道)를 널리 베풀기를 생각하며, 은혜를 백성에게 드리워서 성하게 이루게 하고 백성이 화락하게 잘 지내는 데에 올라서, 황명(皇明)이 억만년(億萬年)까지 무강(無彊)한 복[祚]을 넘치게 하기를 바라고, 그 명년(明年)을 홍치(弘治) 원년(元年)이라 하였도다. 대저 체원(體元)하여 거정(居正)하는 처음을 당하여, 의당 백성을 사랑하는 전법을 경신(更新)하여 반포해야 하겠으므로 마땅히 시행해야 할 일의 조목을 다음에 개시(開示)한다. 아아, 조종(祖宗)과 황고(皇考)의 대경 대법(大經大法)이 우리 후인(後人)을 계우(啓佑)한 것이 상세하게 갖추어졌으니, 그 정신을 이어받아 행하는 것은 묘궁(眇躬)에 있으나 그래도 멀고 가까운 종친(宗親)과 내외(內外)의 충량(忠良)이 덕(德)을 같이 하여 일심(一心)으로 맡은 바 일을 충실히 이행해서 나의 미치지 못함을 보필(輔弼)하라. 크게 여러 나라에 고하노니 모두 알도록 하노라."
하였다. 중국 사신이 도로 나와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니,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돈의문(敦義門)으로 해서 나아가 칙서를 맞이하는 위치에 나아갔다. 칙서(勅書)를 인도하여 말을 타고 먼저 행하여 경복궁(景福宮)에 이르러 칙서를 받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는데, 그 칙서에 말하기를,
"황제(皇帝)는 조선 국왕(朝鮮國王) 모(某)에게 칙유(勅諭)하노라. 짐(朕)은 조종(祖宗)의 홍업(鴻業)을 사수(嗣守)하여 만방(萬方)을 통어(統御)하니, 성교(聲敎)가 미치는 곳은 의당 은택(恩澤)이 미치거늘, 하물며 그대 국왕(國王)은 대대로 충성(忠誠)을 돈독히 하였으니, 내려 주는 은전은 더욱 후(厚)하여야 한다. 특별히 정사(正使) 우춘방 우세자 겸 한림원 시강(右春坊右世子兼翰林院侍講) 동월(董越)과 부사(副使) 공과 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창(王敞)을 보내어 조칙(詔勅)을 가지고 왕(王)을 효유하고 아울러 왕(王)과 비(妃)에게 폐백 문금(幣帛文錦)을 내려 주니, 이르거든 수령(收領)토록 하라. 그리하여 그 짐(朕)의 권회(眷懷)함을 본받아 예(禮)를 잡고 의(義)를 지켜 더욱 번방(蕃邦)의 보익(輔益)을 융성히 하여 한가지로 태평(太平)의 복(福)을 누려야 하겠기에 유시하노라."
하였다. 임금이 악차(幄次)에 나아가니, 두 사신이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를 불러 사물(賜物) 주는 것을 마치고 나와 자리[次]에 나아갔다. 임금이 두 사신에게 전(殿)에 오르기를 청하니, 두 사신이 재배(再拜)하거늘 임금이 답배(答拜)하고,
"과인(寡人)이 삼가 칙서(勅書)를 읽으니, 이르기를, ‘성교(聖敎)가 미치는 곳은 의당 은택이 미쳐야 한다.’고 하였으니, 내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해(四海)의 밖은 무려 만국(萬國)이 되는데, 우리 나라는 대대로 충성을 돈독히 한다 하여 내려 주신 은전이 편벽되게 융성하고, 또 두 대인(大人)을 선발하여 조칙(詔勅)을 받들고 오게 하시어 황은(皇恩)이 답지(沓至)하였으니, 감격함이 망극(罔極)합니다."
하였는데, 두 사신이 말하기를,
"오늘 현왕(賢王)께서 두 번씩이나 번거롭게 거둥하시니 황공 황공(惶恐惶恐)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강을 건너온 이래로 곳곳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해 주심을 거듭 받으니, 현왕(賢王)의 두터운 예우에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의상 당연한 것인데, 어찌 감사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드디어 자리에 나아가 잠깐 동안 다례(茶禮)를 행하고, 두 사신이 드디어 나가니, 임금이 근정문(勤政門) 밖에까지 전송하였는데, 두 사신은 조서(詔書)를 받들고 나갔다. 원접사(遠接使) 허종(許琮)이 복명(復命)하니, 전교하기를,
"지금의 중국 사신은 예도(禮度)가 엄명(嚴明)한데 경(卿)은 대접함에 실수가 없었으니, 내가 심히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어서 단의(段衣) 2령(領)을 내려 주었다. 밤 2고(鼓)에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거둥하여 하마연(下馬宴)을 행하고 5고(鼓)에 환궁(還宮)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송영(宋瑛)에게 명하여 인정물(仁情物)을 유증(留贈)하니, 상사(上使)가 물목 단자(物目單子)를 보고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송영이 굳이 청하니, 상사가 단자(單子)를 내버려 두면서 말하기를,
"이 단자(單子)를 받으면 이것은 주시는 물건을 받음입니다. 전하께서 조정을 존경하시어 대접함이 이와 같으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주심은 예(禮)이고 내가 받지 아니함은 조정을 두려워함이니, 각각 그 도(道)를 다함이 가(可)합니다."
하였다. 송영이 또 인정 단자(人情單子)를 부사(副使)에게 주니, 부사가 말하기를,
"전하의 성의(誠意)는 감사하고 감사하오나, 그러나 조정(朝廷)의 법제(法制)를 두려워하여 감히 받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법을 집행하는 관리(官吏)로서 사람의 잘잘못[得失]을 말하는 자이니 어찌 이를 받겠습니까?"
하고, 굳이 사용하며 받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214권, 성종 19년(1488년) 3월 13일 정축 11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나라의 제 9대 임금인 효종(홍치제. 본명은 주우탱)이 황태자(태자)였던 시절때 자신의 시강(스승)을 맡았고, 현재 당상원(당상관) 겸 한림원 시강을 역임하고 있는 동월을 사신단 정사로 삼아 조선국에 파견한 기록입니다. 이는 보시다시피, 조선국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488년경때의 일이였는데요. 이전엔 이러한 일이 없었는데, 이 때(성종조)에 이르러 조선국에 대한 특별 배려를 해준 것이라고 합니다. 또,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 중국의 명나라 조정을 섬겨오는 만국 곧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오직 조선국에게만 편벽(편향)되게 귀중한 하사품들을 막대한 양으로 준 것만 보아도 당시 조선국의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을 알 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동월은 조선국에 사신단으로 파견되면서 겪은 경험들을 토대로 '조선부' 라는 저서를 저술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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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현 우리 대한민국은 일본을 상대로 종합 국력 지수는 물론, 명목 1인당 GDP, 명목 1인당 GNI, 구매력 1인당 GDP를 위시한 모든 핵심 경제 지표들 등에서 금세 재역전(재추월)을 해내는 것에 성공하였지요. 남한만으로도 이럴 정도이니, 남북한이 재통일이 된 통일한국이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구요. 여기에 현 중국 곧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종합 국력 지수, 모든 핵심 경제 지표, 체계, 체제, 최첨단 기술력 등에서 미국과 동격인 입장까지 확보해냈으며, 이제 미국을 밀어내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이지요. 약 6년 뒤인 기원후 2030년대 시점에 이르면,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처럼 중국, 한국 중심의 국제사회, 국제질서로 회귀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기원후 2050년대 시점에 이르면 이 원복된 체제가 완고해질 것으로 예측이 되는 바입니다.
참조 2:역사(문명) 시대가 시작된 시점에서 기원후 1800년대 전반의 시점에 이르는 반만년의 시기 동안은 중국 좀 더 넓게 보면 중국, 한국이 중심이 된 국제사회, 국제질서였었으며,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시점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인 기원후 1920년대 전반 시점까지는 영국이 중심이 된 국제사회, 국제질서였고, 기원후 1920년대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인 기원후 1940년대 중반 시점까지는 미국, 영국이 함께 중심인 국제사회, 국제질서라고 할 수 있겠으며, 기원후 1940년대 중반부터 냉전 체제가 끝나는 시점인 기원후 1990년대 전반 시점까지는 미국, 소련(소련의 경우는 군사력 분야에만 극도로 치중된 형태의 국가였을 뿐,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은 중진국[개발도상국] 그 중에서도 중위 중진국 수준에 불과해왔었지요.)이 함께 중심인 국제사회, 국제질서였었고, 기원후 1990년대 전반에서 기원후 2010년대 전반까지는 미국 중심의 국제사회, 국제질서였었고, 기원후 2010년대 중반 시점부턴 미국, 중국이 함께 중심인 국제사회, 국제질서인 상황이지요. 미래의 예측은 위의 참조(참조 1)를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보시다시피,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신들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한국의 역대 왕조들에게만 또다른 중화, 명예 중화라고 극찬을 한 것과 동시에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으로 극진하게 대접해온 것이지요. 이것은 역사(문명) 시대가 시작된 시점에서 기원후 1800년대 전반의 시점에 이르는 반만년의 시기 동안 중국, 한국이 동아시아문명권(베트남의 본류인 북베트남도 민족, 문화적으로는 동아시아문명권에 포함되죠.)을 중심으로 하는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의 압도적인 양대 최강대국, 최선진국이여왔다는 것으로도 직결이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명나라의 제 9대 임금인 효종(홍치제),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 연간이 단연 중국, 한국 역사상 최고의 번성기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이겠구요. 현 중국 곧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독재주의-권위주의 체제를 본질적으로 바꾸지 않은 채 발전을 하면 인구가 14억명 정도인 싱가포르 느낌이 될 것이고,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 체제로 바꾸면 더 세련된 중국이 될 것으로 예측합니다.), 현 우리 대한민국 둘 다 아직까지는 자국의 역사상에서 최약체(상대적 개념, 시대 보정 개념을 적용해야만 하겠습니다.)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겠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할까요? 흥미로우니만큼, 여러분들에게 유익한 참조가 되어드렸으면 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