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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출처 : http://nestofpnix.egloos.com/v/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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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에서 살아돌아오다 - 종전 10년만의 귀환
태평양전쟁이 막을 내린지 거의 10년이 지난 1955년 7월 5일 오후 6시 20분,
한 남자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의 트랩에서 내려섰습니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고국을 떠났고,
패전과 함께 고립되어 남태평양의 머나먼 섬에서 혼자 살다가 이제 13년만에 고국에 돌아온 참이었죠.
홀로 돌아온 이 남자는 일본군 펠렐류 섬 수비대 최후의 일원이었습니다
(참고로 펠렐리우 전투 https://namu.wiki/w/%ED%8E%A0%EB%A0...
미드 더 퍼시픽에서 비행장 전투가 나온 그섬입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의 미 해병 1사단이 펠렐류에 상륙한 것은 1944년 9월 15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이 이오지마나 오키나와에서 보인 것 같은 "발전된" 방어전술을 처음 선보인 곳이 바로 이 펠렐류였으므로 미군은 낯선 적의 대응에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됩니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무력함이 입증된 해안선 방어와 반자이 돌격을 지양하고, 철저하게 은폐/엄폐된 중화기진지 및 거미줄같은 터널망과 동굴진지를 이용하여 구축된 종심진지로 미군의 피를 최대한 짜내는 전술이 처음 쓰인 곳이 바로 여기였거든요. 처음 보는 적에게 깨지기 쉬운 미국의 징크스-_-;;가 또 발휘된 셈입니다.
이러한 방어계획을 수립한 팔라우 방위사령관이자 14사단장 이노우에 중장은 미군이 내습했을 때 펠렐류가 아니라 팔라우 본도(가장 큰 섬)에서 사단 지휘를 맡고 있었지만, 팔라우 수비 책임을 맡은 사단 2연대장 나카가와 쿠니오(中川州男) 대좌(大佐, 대령)는 사단장의 명령에 따른 방어전술을 철저하게 숙지하고 부하들을 그렇게 준비시키고 있었습니다. 목적은 당연히 "가능한 오래 버티는 것"이었고요.
미군은 이제까지 여러 섬을 공략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애초에 3일이면 펠렐류가 함락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자도 달랑 6명밖에 안 불렀....는데,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전술에 애초의 예상을 24배나 초과한 기간동안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수비대장 나카가와 대좌는 결국 연대기를 불태운 다음 자살했고, 그후로도 3일이 지나 마지막 고지가 함락된 것은 무려 11월 27일의 일이었어요. 두 달을 조금 넘는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는 거의 전멸, 10,695명의 전사자와 202명의 포로를 냈으며 미군은 육군(81사단)과 해병(1사단)을 합쳐 1,794명의 전사자와 8,010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그 결과 펠렐류 전투는 태평양전쟁에서 투입병력 대비 사상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전투가 되었으며, 이로써 펠렐류 섬에서의 조직적인 전투는 끝났습니다.
늘 그랬듯 여기서도 패잔병은 남아있었죠.
정글 속과 산속을 숨어다니는 패잔병이 상당수였고,
이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숨어다니지 않으면 발견되어 사살되거나 투항하거나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지막 일본군이 투항한 것은 1947년 4월 22일로,
육군 2연대의 중위 한 명이 거느리고 있던, 자기 부하 25명과 해군 45경비대 (警備隊, 일본 해군에서 점령지의 방위·치안 임무를 위해서 편성된 전문 육전대) 소속의 수병 8명을 거느리고 항복한 것이었습니다.
종전 후 2년이 지나도록 이들이 투항하지 않은 것은 전쟁이 끝났다는 미군의 선전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결국 일본에서 날아온 제독 한 사람(누군지 모르겠습니다)이 이미 전쟁은 끝났다고 설득한 후에야 비로소 항복했습니다.
이들이 2차 세계대전에서 정식으로 항복한 최후의 장병들이었죠.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이 34명이 펠렐류 수비대 최후의 생존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이들 잔여병력이 투항한 뒤에도 펠렐류의 산속에는 오매불망 일본군함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3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원래 세 사람이 함께 움직였으나 "다께노"라는 이름의 한 사람은 먹을것을 찾으러 인가로 내려갔다가
미군에 사살당했고, 또 한 사람은 역시 마을에 갔다가 미군에 잡혀갔습니다.
이제 한 사람만 남게 되었죠. 미군에게 잡히면 코와 귀가 잘리고 혀를 뽑혀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미군에게 투항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마지막 한 사람은 미군부대의 바리케이드용 포대(즉 모래자루)를 훔쳐서는 옷을 만들어 입었고,
깡통으로 만든 바늘로 모래주머니를 꿰메서는 요와 이불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숲에서 벌레를 잡아먹다가 배탈이 몇번 난 뒤로는 용기를 내서 밤이면 원주민 마을의 밭을 뒤져
"다베오깡"이라는 무 비슷하게 생겼다는 작물을 훔쳐다 먹고, 생식만 해서 배탈이 자주 나자
미군 병사들이 흘린 성냥을 주워다가 불씨를 만들어서는 11년간 그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사용했다고 해요.
불을 얻은 뒤로는 주로 달팽이를 구워먹었는데, 아마 수십 가마니는 족히 먹었을 거라나요.
물은 미군 깡통에다 바닷물을 끓여서(증류해서?) 먹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줄도 모르는 이 최후의 생존자 양반은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았습니다.
일본 군함이 와야 자기를 고향으로 데려다 줄 텐데, 섬 앞 바다에는 늘 미국 군함만 오갔거든요.
오가는 사람이 없는 밤이면 가끔 바닷가에 나가 펑펑 울면서 고향을 그렸지만 그래도 배는 오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무거운 발을 끌고 토굴로 돌아가면서도 그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잃지 않았어요
. 그리운 고향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갓 낳은 어린 아들이 있었거든요.
유리병에 나뭇가지를 30개 꽂을 때마다 한 달이 지나가는 식으로 날짜를 세면서,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꿈만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뜻밖에도 빨리 왔습니다. 자르지 못한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가고,
세수라고는 한 일이 없는 얼굴에 눈만 툭 튀어나오고 누더기를 걸친 그가
밭에서 작물을 훔치는 것을 본 원주민들이 뭔가 괴상한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잡으러 왔거든요.
집단을 이룬 원주민들이 토굴을 습격하자 그는 황급히 도망쳤지만 결국 1955년 5월 7일에 원주민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일본 식민지였던 이 섬의 역사 때문에 일본어를 구사하는 원주민들이 많았으므로 "나는 동물이 아니고 사람이다.
11년 동안이나 숨어살았는데 제발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도와달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원주민들은 5월 27일에 그를 섬에 주둔한 미군에게 인도했어요.
미군들은 당연하지만 그의 귀와 코를 자르거나 죽이지 않았고,
친절하게 대우하여 고향으로 보내주었습니다. "빠다오" 섬에서 8일간 머물면서 귀국 절차를 밟고, 괌을 거쳐
요코하마로 가게 해준 미군 당국 덕분에 마침내 그는 만 13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겁니다.
고국의 배를 타고 부산항 부두에 내려서는 그 기분이 어땠을까요.
그렇습니다. 부산항입니다.
조병기(趙炳基․당시 39세)씨는 본래 충북 단양군 가곡면 덕천리에 살던 사람으로, 1942년 음력 6월에 징용에 뽑혀나가
요코스카의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양으로 보낼 노동자가 필요해진 일본군 당국이 높은 급여를 미끼로
공장 내에서 자원자를 모집했고, 조병기 씨도 "남양에는 황금이 노다지"라는 말에 속아 자원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250명으로 이루어진 "기보따이(따이는 대(隊)가 분명한데, "기보"가 뭔지 모르겠네요
- 많은 분들의 조언에 따름면 "희망希望"의 일본 발음일 거라고 합니다. 확인해보니 맞는 듯^^)의 일원이 되어
남태평양, 괌 주변의 "주위 30리" 정도 되는 "베레레우" 섬으로 보내졌습니다. 이게 미군의 진공이 시작되기 약 4개월 전이라고 해요.
펠렐류에서 비행장 공사에 동원된 조병기 씨 일행은 미군의 사전폭격으로도 많은 희생자를 냈고,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3명만 남기고 이래저래 다 죽고 말았습니다.
미군의 잔학행위에 대한 일본군의 악선전 때문에 투항도 못 하고 있다가
강원도 영월 출신인 다께노(창씨명) 씨가 미군에게 사살당하고, 제천군 명길리 출신 이순기 씨는 잡혀갔던 거죠.
이분은 무사히 귀국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남은 조병기 씨가 원주민들에게 잡힌 것도 한국인 특유의 입맛 탓이었습니다.
매운 게 너무 먹고 싶었던 조병기 씨가 원주민 마을을 뒤지다가 고추 비슷한 농작물을 찾았고,
자꾸 고추밭(...)이 털리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원주민들이 밭을 지키다가 그의 모습을 보고 뒤를 쫓았던 거죠.
원주민들은 한국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를 미군에 인도했고, 미군도 그가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친절히 대해주었습니다.
한국에서는 6월 3일 주일대표부의 연락으로 비로소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장에 서울신문 기자 한 사람이 조병기 씨의 고향을 찾아갔고 수소문 끝에 가족들을 찾아내긴 했지만 현실은 비참했죠.
가난한 소작농이던 그가 징용으로 끌려가자 젊은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품팔이로 3년을 겨우겨우 연명하다가
45년 봄에 남편의 전사통지를 받고 개가했고, 아들은 큰아버지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살던 초가삼간도 주인이 바뀌어 다른 사람의 문패가 달려 있었죠. 하지만 결국 그는 살아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한편 조병기 씨와 일본 정부 사이에도 해결할 문제는 있었죠.
일본 정부는 그에게 밀린 징용기간의 임금으로 일본 돈 5만 599엔을 지불하고,
그동안의 거친 식사로 생긴 기생충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구충제를 처방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조치 없이 한국으로 보냈죠-_-;;
(* 5만 엔이 넘는 돈을 준 걸 보면 아마 종전 이후 10년분의 임금도 합산해 준 것으로 보입니다.
징용자 급료를 얼마로 쳐 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포로수용소 담당 군속의 1달 임금이 50엔이었거든요.
그나마 이 양반이 한일협정 체결 전에 구조가 됐으니 정산해 줬지,
체결 후에 발견됐으면 "한국정부와 일괄처분했으니 그쪽에 가서 받아라. 우린 이제 당신 임금을 보상해줄 의무 없다"고 배쨌다는데 500원.)
조병기 씨는 주일대표부의 주선에 따라 7월 3일에 고베를 출항하는 대한해운공사 소속의 "데이모스"호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준 돈으로 양복 한벌과 모자, 구두를 사고 가는 길에 먹을 도시락 2개와 주전자 하나,
셔츠 여섯벌에 가족들을 위한 선물 약간을 산 것이 짐의 전부였지요.
부산항에서 트랩을 내려선 그의 앞에, 가족들은 없고 십여 명의 기자들이 몰려들 뿐이었습니다.
한국어를 거의 잊어버려 누구를 가장 먼저 만나고 싶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내와 아들이 보고 싶다"고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대답하기는 했지만 돌아온 고국에서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는 의욕에 차 있기도 했습니다.
조병기 씨는 이틀 뒤인 7월 7일 오후 버스편으로 단양에 귀향해서야 친지들과 만날 수 있었고,
단양군수 및 경찰서장과 여러 유지들은 살아돌아온 그를 위해 환영연을 열어 주었습니다.
고향집에 돌아간 조병기 씨는 아들 보형군(15세)과 아내 신금순(37세)씨와 해후하여
일본에서 준비해 온 선물을 주면서 새출발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인도 개가한지 10년이라, 이미 그쪽에서 애가 한 둘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실까요? 조병기씨 본인은 살아계셔도 93세니 아마 돌아가셨을 것 같지만,
아들인 조보형 씨는 69세니 살아계실 것도 같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가 해주었던 펠렐류 섬 이야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려나요...^^
(원본은 2009년도 글입니다.)
*2019.4.3. 추가기술
조병기 씨가 귀환한 때 나온 1955년 7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링크)를 찾았기에 몇 가지 정보를 추가로 적습니다.
- 귀환할 때 타고 온 데이모스호는 580톤짜리 작은 배였습니다.
- 위 기사에서는 미군의 공격이 1945년이라고 잘못 적고 있습니다.
- 조병기씨의 창씨명은 덕천(徳川)병기였습니다.
- 조병기씨는 숨어 사는 동안 원주민 처녀를 훔쳐보고 반했었는데, 들킬까봐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제천 출신 동료의 이름은 이순기 씨입니다. 약 40세. 다께노 씨의 나이도 약 4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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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도 인상깊게 읽은 글을 퍼왔습니다.
다시찾다보니 2011년 신문, 2018년 시사인에 작게 나왔나 보네요.
(시사인 https://www.sisain.co.kr/?mod=news&... )
http://www.djuna.kr/xe/board/121562...
생존 한국인이 적은데는 이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군이 점령한 태평양 섬의 마을 사람들을 연합군이 가까이 온다고, 철수하면서 싸그리 죽여버렸다가 전범재판에 올라간 일도있지요. 그 마을사람들은 순종적이고 협조적 이었고, 죽은 백인중엔 동맹국인 독일인도 포함되어 있었다죠. 적군에게 똑같이 협조적일거라고 생각해서 죽였다고하죠.
일본군은 상황이 나빠지거나 하면 자기들이 해를 입는다고, 걱정만 되는 것 만으로도 조선인 등등을 처리했다고하죠. 종군 위안부들의 사정도 비슷하죠. 게다가 고립되면 우선순위의 식량이 된다는 소문도 있죠.
게다가 일본군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연합군에게 심하게 했다가 고국에도 못가고, 잡힐까봐 인도네시아 같은데선 그 나라 독립군에 합류해서 유럽쪽 제국주의와 싸웠다가 인도네시아 독립투사로 이름을 올린사람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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