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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업 현상. 아..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나.. 1

박성업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들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실제로 어제 좀 정리해서 글을 써봤습니다.
근데 사실 정리가 안되어서 다시 쓸려고 고민중입니다.
거기다가 박성업 fb에서 몇몇 논쟁을 하면서 더 신기한 사실들을 발견했거든요 ^^

 여튼 박성업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도 있는것 같아서 글 나눌려고 가져옵니다 :)



박성업 현상. 아..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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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한국교회에 대한 비참함이 생긴다. 마음이 너무 안좋다.

01.
가끔 나는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기독교적 논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무성할때에 다른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독특한 "관점"이 생길때가 있다. 예전에는 그것자체가 "성령"을 잘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그때만 생각하면 완전 부끄러움ㅋㅋㅋㅋㅋ) 때로 그런 독특한 관점을 썰로 풀다보면 평생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서 기독교적/공동체적/신학적/신앙적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또 제자그룹을 이끌기도 하고 이렇게 평생 글만 쓰고 강의만 불려다니며 사는 것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과연 나는 그런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치열한 고민이다.)

그런데 솔직히 "박성업"이란 인물과 그러한 인물로 일어난 "박성업 현상(?)"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하다보니 참 내 스스로에게 한심한 생각들이 많이 든다.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적 인물을 언급하거나 비평하는 글들을 써왔고 주변 후배들에게도 참 많은 기독교 인물들을 비평했다. 일례로 김동호 목사님, 이찬수 목사님, 전병욱 목사, 박옥수 목사 등이었다. 뭐 그런데로 이런 분들을 언급하고 비평하는 것들이 "생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각기 인물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맥락에 있어 흐름을 짚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성업이란 인물을 내가 구지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박성업현상 혹은 박성업에 대해서 내가 언급할만큼 그의 사상이 파격적이거나 혹은 뚜렷한 색을 가지고 있을까? 흠.... 솔직히 지금까지는 기분이 찝찝하다.

02.
일단 박성업을 까기전에 소위 나 스스로의 흑역사(?)부터 고백하고 가야겠다. 나는 2008년쯤부터 2010년까지 횟수로 따지자면 약 3년에 걸쳐 소위 "신사도운동". 즉 성령운동에 빠져있었다. 이른바 성령, 은사, 체험등을 무시하는 기존 교단에 대한 반항행위였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독교의 단면을 경험하고 싶었던 연유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쪽 계열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또 인터넷 카페를 살펴보니 대부분의 은사주의가 "시한부적 종말론"과 묘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한때 한국교회를 24시간 기도신드롬으로 물들였던 IHOP도 시한부적 종말론을 갖고 있다는 설이 있다.)

즉 "시한부 종말론"은 어떤 특정한 시간대가 오면 재림예수가 세상에 도래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재림신앙"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재림"의 도래가 어떤 구체적 방법을 통해서 이뤄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경의 특별한 예언적 해석(그런게 있나?)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풀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할 사실은 성서는 우리에게 "대언"하는 것이지.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인즉슨, 미래를 예견하고 미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일종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말은 방법론에서부터, 즉 시작부터 틀렸다. 그리고 구약성서 전반적으로 기대하는 "종말"은 비참하고 우울한 심판의 개념이 아니라 권세들이 심판당하는 기쁨과 환희의 시간이다. 그런면에서 오히려 바르게 "재림"을 기대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환희와 기쁨을 대망하며 소망을 가져야하는 것이지 마치 주인이 돌아올 것을 걱정하며 자신의 행위를 날마다 점검하는 종의 모습으로 기다리는 것은 구약성서를 싸그리 무시하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성서를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참고로 다미선교회가 가장 잘 알려진 시한부종말주의자였다. 실제로 뉴스에서도 다미선교회를 생중계했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자. 성령운동은 시한부종말론과 묘하게 결합된다.(실제로 다미선교회 출신의 성도들이 대부분 현 성령운동하는 교회로 흡수되었다) 그 이유는 시한부종말론을 대망하는 많은 성도들이 신비를 많이 경험했던 연유때문이다.(예언이라던가 환상과 관련된 부분..) 즉, 성령운동하는 교회는 그런 은사자를 필요로 하고, 시한부종말론자들은 자신을 환영할 새로운 "교회"의 토대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운동"의 큰 두 맥락을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존 오스틴, 조엘 오스틴, 케네스 해긴, 조용기 등으로 대표되어지는 "믿음운동"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부분이다. 이들은 "성도의 성결"과 "성령의 나타남"에 대해 크게 연관시키지 않는다. 마치 구원이 절대적 은총의 행위듯이, 성령의 나타남도 절대적 은총의 행위라고 말한다.(저런 인물들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견해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반면 우리나라 기도원운동역사에서 주로 찾을 수 있는 "성결운동"이 있다. 소위 산속에 숨겨진 은사주의 단체에서 주로 발생하는 이러한 "성결운동"은 기본적으로 "성도의 성결"과 "성령의 나타남"을 인과관계로 묶어버린다. 극단적 성결을 통해서 성령의 나타남을 경험하는 것이다.(이러한 모습은 마치 무당의 신내림굿을 갈망하는 행위를 보는 듯 하다.)

이러한 "성결운동"은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주 흐름이다. 그리고 이런 산속에 숨어져있던 기도원에서 나타나던 성령운동의 흐름이 영동제일교회, 큰믿음교회와 같은 대형교회(?)라는 틀과 또 부흥회라는 형식을 만나면서 한국교회 전반적으로 보편화된다. 실제로 그쪽 교회들은 "성결"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러한 시한부종말론의 흐름, 성령운동의 흐름, 성결운동의 흐름. 이 모든 흐름이 짬뽕으로 얽힌 것이 바로 소위 "박성업 현상"이다.

03.
실제로 나 스스로가 신사도운동에서 회심하게된 계기가 바로 "박성업"이었다. 그 이유는 그에게서 모든 성령운동, 성결운동, 시한부종말론의 극단적 모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등장은 "데이빗 오워"라는 용하게 예언한다던 선지자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근데 묘하게도 데이빗 오워는 그런 박성업의 극단적 모습과 흡사한 메시지를 전국적으로 선포하고 다닌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의 예언은 빗나간다.(물론 회개가 한반도 전쟁위기를 막았다고 말하는 성도들도 있겠지만ㅋ)

여튼 박성업을 철저하게 까발리기전에 일단 그에 대한 칭찬부터 해주고 가자. 그게 예의인것 같다. 그는 참 매력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나름의 삶을 모두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겉모양을 취한 사람이다.(그의 삶의 괘적이 어찌 변할지는 모르니 그가 아예 잘못되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내가 보기엔 그는 분명 진심이 가득한 열정적 사람이다. 마치 사도 바울을 보는 것 같다.) 또한 그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자신이 믿고 있고 견지하고 있는 바를 대단하게 열정적으로 말한다. 또 그는 돈, 여자, 명예에 큰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의 두 눈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 가치에 고정되어있다. 그는 분명 명예와 타협하고, 물질주의와 타협하고, 겉모습은 "형제님", "자매님"하지만 내면에 감춰진 억제된 무수한 음란함을 가진 일반적 한국교회와는 분명 비교되는 모습이다.(물론 실제 그의 삶을 잘 몰라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수많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열정적인 사람에게 소위 "마음"을 주는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의 심각한 고뇌가 필요하다. 왜 우리는 한국그리스도인 청년들의 마음을 얻을 만한 공동체를 만들지 못하는가? 왜 데이빗오워나 박성업 따위에게 왜 홍대새교회따위에게 그들의 마음을 빼앗기는가?)

04.
박성업을 먼저 까야할 것은 "거룩"의 관점에 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까는 이유는 현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너무나 소홀하게 생각하고 개념을 정리하고 있으며 또한 그렇기에 좌절하고 "죄책감"에 빠지게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거룩'이 무엇인가? 하느님은 "거룩"하다고 해명되어있는데 하느님이 왜 '거룩'하며 그가 거룩한 것처럼 우리가 '거룩'해야한다는 말씀은 또 무슨 의미인가?

'거룩'은 구별됨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문제, 주초문제, 도덕성문제에 주로 적용시킨다. 그래서 혼전순결을 주장하고 주초를 금지하며 또한 바르고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솔직히 따져보자. 그러한다면 "물질"에 대한 거룩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일조"인가? 왜 정규직의 취업을 원하는 일반인과 구별된 모습을 위해 "비정규직"을 원하지는 않는 것인가? 왜 높은 연봉의 직장을 원하는 사람들과의 구별된 모습을 위해 저연봉 혹은 자발적 봉사를 택하지는 않는 것인가?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그럼 따져보자. 하느님이 '거룩'하다는데.. 그럼 하느님은 성관계를 왜 만드셨는가? 왜 담배와 술이 있게 하셨는가? 왜 예수님은 포도주를 만드셨는가?

물론 이런 주장에 체계적으로도 반박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의미는 '거룩'에 대한 문제다. 하느님이 왜 거룩한가? 어떤 면에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느님은 피조물과 달리 구별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즉 피조물된 우리 모두와 구별되어있다는 신에 대한 경외함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하라"는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의 단순한 행위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성에 대한 선언이다. 즉, 하느님이 피조물과 다른듯이 히브리민족 또한 다른 민족과는 다르다는 그들만의 표현인 것이다.(그랬기에 그 거룩을 드러내기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즉, 히브리인들은 "구별된 존재"를 드러내기위해 율법을 지킨 것이지. 율법을 지켜서 거룩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린 스스로가 하느님앞에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거룩함"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이는 dogma로 지정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것이다.(마치 사랑의 언어가 다른것처럼)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한 삶'은 대부분 이 세상에서 단순히 상식적으로 사는 삶에 불과하다. 왠만한 상식적인 사람이고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면 살 수 있는 삶이다. 그러한 삶의 방식에다가 '거룩'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런 면에서 박성업의 거룩에 대한 관점은 하느님을 심각히 모독하고 있다. 그는 분명 대중가요와 모든 미디어매체가 사단에 의해 오염되었다며 '백워드매스킹'이라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했다. 한번 따져보자. '사단이 세상 신'이라는 성서의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그 말씀은 하느님의 통치가 임박했지만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박성업은 그러한 사단의 존재를 온 세계의 왕으로 높여주었다. 그리고는 미디어를 쥐고 모든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왕중의 왕으로 높여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미디어에 대한 사단의 괘계앞에 무능한 하느님에 대한 모습을 만들었다. 그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적합한 반응은 무엇인가? 바로 미디어와의 단절이다. 즉, 우리의 하느님이 무능하니 우리는 사단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써야된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를 거룩하게 지키기위해(?) 미디어와 단절되라는 명령이다. 물론 미디어에 중독되고 미디어에 사로잡히다보면 인간의 주체성은 소멸된다. 하지만 그러한 의견이 단순한 개인에 대한 주관적 "권면"일 경우와 공동체를 향한 도그마가 되어 객관적으로 선포되는 경우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의 거룩이 그러한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는 왜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었는가? 이 성서의 고백은 우리가 개념화하고 카테고리화한 거룩의 개념과 하느님의 거룩의 개념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반증이다.

하느님의 거룩.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앞에 구별되었다는 성서의 증언이다. 그것은 철저히 피동적인 결과이다. 이것은 철저히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의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물론 개인마다 주관적으로 그러한 하느님의 거룩이라는 행위에 반응하는 부분은 다를 것이다. 우리는 그 행위를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구체적 응답의 행위를 카테고리화한다거나 정형화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광대하심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05.
그리고 박성업을 까는 이유는 "무비판적 우경화"이다.

실제로 그가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 백워드매스킹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세력과 미국의 정치적 극우주의자들이 만나서 만들어진 가르침들에 불과하다. 실제로 유럽의 에큐메니컬하고 사회참여적이며 체제에 대해 대항하는 마치 예수의 삶과 흡사한 성령운동(진첸도르프의 공동체, 때제공동체)과는 달리 북미오순절운동은 체제에 대해 순응적이고 또한 전쟁에 대해 예언하고 권면하며 전쟁을 위해 기도한다.(중동 vs 미국의 대결구도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들은 공화당 정권을 지지하고 공화당 지도자들을 위해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예언한다. 또한 그러한 북미오순절운동의 대부분의 거물급 인사들은 이미 사회적 지도층이다. 이들의 삶의 자리는 과연 예수를 닮았는가? 아니면 헤롯을 닮았는가? 나사렛사람을 닮았는가? 아니면 로마인을 닮았는가? 히브리인을 닮았는가? 아니면 애굽왕 바로를 닮았는가?

실제로 내가 구독하는 대다수의 목회자의 페이스북중에 가장 많은 "좋아요"를 누르게끔 만드는 새물결선교회의 김요한 목사님의 페이스북에는 오늘 "교인들의 보수화, 기득권화"를 걱정하시는 이야기가 올라왔다.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는 예수, 초대교인, 바울, 히브리인 등등 성서에 등장하는 중심인물의 삶의 자리는 대다수가 피지배층이며, 성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하느님의 모습은 그러한 피지배층의 신원과 탄원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반면 하느님에 의해 심판받는 쪽은 언제나 기득권측이다.)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전형적인 고백은 바로 산상수훈에서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부자가 되면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됩니까?ns="http://www.w3.org/1999/xhtml"> 교인들이 부자가 되면 자연스럽게 교인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보수주의자가 됩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보수란 기존의 질서와 힘, 이해관계와 가치를 보존하고 파수하는 사람들입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교인들이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지켜야 할 기존의 것들이 많아졌다는 뜻입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따라서 그들이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그런 교인들이 늘어나면, 목사는 그런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보수적 가치에 기반을 둔 설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그러면 보수적 가치를 지닌 교인들은 그런 목사에게 더 넉넉한 생활과 활동의 보장을 통해서 보상을 해줍니다.ns="http://www.w3.org/1999/xhtml"> 이렇게 해서 양자간에 서로 상호공존하는 거래가 성사됩니다.ns="http://www.w3.org/1999/xhtml">ns="http://www.w3.org/1999/xhtml"> 교인들이 부자가 되면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ns="http://www.w3.org/1999/xhtml">ns="http://www.w3.org/1999/xhtml" class="text_exposed_hide">...ns="http://www.w3.org/1999/xhtml" class="text_exposed_show"> 그것은 자신의 부와 힘을 기반으로 이제 상당한 수준의 문화 현상을 체험하는 교인들의 전방위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교회가 다양한 종교 상품들을 개발하고, 그 상품을 매개로 해서 부자 교인들을 교회 안에 묶어두려고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종교 상품들이 거래되는 시장으로 변질됩니다.
목사는 종교 상품을 기획하고 개발해서 진열대에 올려놓기 바쁘고, 교인들은 그것을 소비하기 바빠지는 것이지요.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구조가 형성되면,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차원은 소멸되어 버리고,
우리가 시장에서 거래하는 종교 상품이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은혜를 대체하며,
우리가 그런 상품을 얼마나 많이 구매하고 소비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구원의 질이 결정된다는 아주 나쁜 생각과 가치관이 똬리를 튼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메가 처치 안에서 행해지는 화려하고 현란한 예배와 각종 훈련과 조직들이 다 이런 맹점을 띠고 있다는 것을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치명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가처치가 아닌 대다수 교회들 조차도 이런 구조를 부러움의 눈길로 ㅉㅗㅈ아가기 바쁘다는 것입니다.

 From 김요한 목사님의 Fb

실제로 나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진보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반우경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내 삶의 자리가 피지배층의 삶의 자리이고 지배층의 정책변화에 따라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삶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의 삶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반우경화. 즉 중도진보라는 색깔을 견지하게 만들었다. 그럼 나사렛인 예수, 히브리인, 바울, 초대교인등의 정치적 성향은 무엇일까? 물론 그들이 어떤 정당을 택하고 지지하겠느냐는 질문은 좀 부적합하긴하다.(특히나 민감한 이 시기에 ㅋㅋ)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분명 지배층과 대립해왔고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메시지는 피지배층을 위한 메시지였음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박성업을 비롯한 소위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세력들은 이러한 "우경화"에 대한 성서적 인식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공산주의"를 사단으로 몰고간다.(전형적인 이승만 장로님의 "반공주의"논리요 MB장로님의 "반공주의"논리이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를 실현해가던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는 그런 입장을 견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라는 구체적 세력이 절대적 사탄의 개념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면 지금 현 사회의 자유민주주의,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은 과연 무엇인가? 그 또한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을 방해하는 "사탄적"체제가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공산주의"가 더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체제는 인간을 위협하고 본질적 행복을 방해하는 "사탄적"요소가 있다는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모든 체제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쩔수없는 인간의 본질이기에..) 허나, 공산주의만을 극단적인 사탄적 요소의 체제인 것처럼 몰아가는 행위는 잘못되었다.

또한 그토록 그들이 주장하는 통일, 북한민들에 대한 긍휼에 대한 부분에 대한 "방법론"은 딱딱하기만 할까도 솔직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이런 우경화된 기독교세력은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단의 앞잡이 혹은 김일성에게 공산화된 빨갱이로 취급한다. 그들의 이른바 "햇볕정책"이 북한에게 전쟁무기를 공급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연 어떤 방법이 동북아 속에서 남북공조와 남북통일로 이끌 수 있는 것일까?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가장 좋은 결과를 낸 정책들이 바로 "햇볕정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북한 체제"는 사탄의 체제이며 그런 사탄과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고 정복해야만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그렇기에 그들은 우경화된 정치정책을 지지한다.)

06.
아 힘들다. 이번에는 두가지를 동시에 까보자. 바로 "신비주의"와 "근본주의"의 묘한 짬뽕이다.
실제로 "성령운동"의 장점은 바로 자유이다. 그러한 자유는 묘하게 모호성과 연결된다. 실제로 그러한 "성령"과의 교통을 주장하던 많은 단체들이 기존 교회와는 차원이 다른 자유를 경험해왔고 그 자유를 바탕으로 사회적인 수많은 현안에 대해 실질적 참여로 연결되었다. (진첸도르프의 공동체도 그랬고 조지폭스의 퀘이커도 그랬다.) 이는 "신비주의"가 기존의 "문자주의" 혹은 "교리주의"와는 상반된 점이다. (물론 장점과 단점이 있겠지만..) 실제로 문자주의, 교리주의와 상반된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흐른 성령운동은 묘하게 자유롭게 흐르지만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 서로의 다름은 묘하게 결합되어 시너지를 발휘한다. 그것이 바로 성령운동의 장점이다. 반면 상반된 문자주의, 교리주의의 단점은 바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있다. 무조건 교리, 문자라는 틀속에 개인을 무시하고 단체의 주장만을 존중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박성업은 "신비" 혹은 "성령"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그의 주장은 "근본주의적"이다.(한국교회/미국교회에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말씀"과 "성령"을 동시에 추구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추구해서 얻은 성령의 계시, 깨달음은 묘하게 "말씀화"되어 "교조주의"라는 틀속에서 성도들을 억압한다. 성령운동의 장점은 서로의 환상과 계시, 경험들이 묘하게 어울리는 것인데, 이른바 근본주의적 성령운동은 어떤 은사자의 환상, 계시, 경험들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는 그러한 가치로 인해 따르는 성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되고, 다른 경험을 한 성도들의 경험은 "혼탁하다"는 평가와 함께 무시당하면서 그러한 "절대적가치"는 점점 높아져만 간다. 그러다보니 은사자와 피은사자의 간격은 점점 커지고 교리주의, 문자주의가 지닌 강압성보다 훨씬 더 큰 강압성으로 성도들을 압박한다.(그들은 궁극적 하느님의 몇 안되는 체널러기에 ㅋㅋ)

그의 대부분의 글들은 그러한 근본주의적 성령운동의 단점을 뚜렷하게 띄고 있다.참고로 그가 올린 글 하나를 첨부해본다.


ns="http://www.w3.org/1999/xhtml">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는 없지만 신학은 공부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 대화가 안통해서 깝깝해 미칠때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무슨 말을 해도 오로지 자기가 알고 배웠다는 신학 카테고리들 중 하나로 밖에 인식 못한다. "그건 은사주의, 이건 복음주의, 그건 세대주의, 그건, 이건...." 있는 그대로 하나님에 대해 못나눈다. 자기가 공부했다고 하는 신학의 틀로 인식하는 것 외에는 그냥 유기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못듣는다. 마치 언어장애 걸린것 처럼.... 자기가 자부하는 지식 때문에 말이다.....
 마찬가지로 신학뿐아니라 세상과 관련된 이야기도 지금 우리는 무슨 말을 해도 그냥 그 말 자체에 대한 유기적인 대화가 아니라 오로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로 밖에 인식을 못한다. 좌냐 우냐 보수냐 진보냐... 이 말꺼내면 우파 저 말꺼내면 좌파..

From 박성업의 Fb

실제로 그가 느끼는 깝깝함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 것 같다. 한국사회는 "정답"이라는 것이 뚜렷해야만 인정받는 사회다. 그러다보니 인문학보다는 실용적 학문이 인기가 많다. 그러다보니 신학조차 실용화되어버린다. 교리와 교리속에 담겨진 세계를 이해하기보다는 교리내용 자체를 달달달 외우고 말하고 서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교리와 교리속에 담겨진 세계를 경험할때 주어지는 자유로움보다는 딱딱함이 가득한 신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허나, 박성업 그는 딱딱함이 가득한 신비주의자다. 그에게는 신학적 통찰력도 없고 신학적 사유도 결여되어있다. 오로지 그에게 주어지는 신비적인 음성은 소위 "안통해서 깝깝해 미치게 만드는" 권위가 부여된다. 다른사람의 비판적 권면조차도 자기가 경험한 카테고리틀속에 주어넣어서 "유기적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행위"들을 보지 못한다. "마치 언어장애 걸린 것처럼 자기가 자부하는"신적 경험때문에 그렇다.

참고로 신비주의자들은 교회역사 대대로 존재했다. 그들에게는 항상 "위험성"이 존재했다. 허나 그들의 "위험성"을 통제하는 것은 바로 교회의 "역사성". 즉, 내부와 외부의 활발한 소통을 통해서 였다. 그러한 열려진 대화를 통해 그들이 가진 한계 자체를 스스로 보정하고 교정했다는 것이다.(실례로 빈야드의 존윔버가 그랬다. 그는 실제로 성령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지만 신사도운동의 모호하고 신비한 이야기만 하던 예언자/선지자들과 동역하다가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과거가 존재한다.)

07.
까다보니 깔게 너무 많다. 어쩌면 한국교회의 비정상적이고 비논리적인 모든 행위들의 교집합. 아니 합집합이 바로 박성업현상이 아닌가 싶다. 그는 놀라울만큼 단순하다. 미디어의 영향을 최대한 피해야한다. 그리고 말씀 기도(라 부르고 그들만의 종교생활이라 부른다)에 전무해야한다. 또 예수에 목숨을 걸어야하며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지켜야한다. 또 북한정권이 무너지길 위해 기도해야한다. 또 진보적 개혁적 인사들이 정권에 집권하는 것을 막기위해 끝없이 기도해야한다. 요정도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2000년이 넘도록 사회와 그리고 역사와 대화해왔다. 초대교회조차 구약에 주어졌던 야훼와의 역사와 대화했다. 또한 이방인교회들은 헬라철학까지도 대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들이 경험한 신체험을 한없이 객관화시키고 사회속에 논증해왔고 해명해왔다. 그러한 작업들이 바로 "변증법"이다.

그러한 "변증법"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교리가 맞다고 우기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기독교교리를 해체하는 작업이었고, 더욱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틀에 맞춰서 예수와 하느님나라를 해명하는 것들이었다. (실제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와 같은 부분을 언급하며 종교는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이야기했다.)

혹시라도 박성업씨 혹은 박성업을 따르는 성도들이 보고 있다면 딱 한마디만 들어줬으면 좋겠다. "대화". 이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과 "대화"라는 종교적 행위는 사실상 주관적 경험으로의 몰입이다. 하느님은 제우스와 같은 초월적인 세상밖의 어떠한 존재 혹은 체널이 아니기 때문이다.(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는 하느님에 대한 신성모독과 다름없다. 실제로 틸리히는 존재와 실재의 경계선상에 있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측량할 수 없다는 의미다.) 오히려 하느님은 역사속에 존재하고 역사속에서 우리와 만난다. 어떤 면에서 "역사가 심판한다"라는 말은 곧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결국 역사와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나치가 멸망하기전에는 나치와 손잡았던 독일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겠는가? 예수를 죽였던 유태인의 후손을 살해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심판결과이며 하느님의 말씀이다.) 물론 일부는 왜곡된 것도 있을테고 일부는 해석해야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허나 역사가 흐르면 흐를수록 그 실체적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계시, 환상, 음성 이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도 가끔 경험한다.(요즘은 기도 잘안해서 모르겠다만;;) 허나 그러한 사건들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이다. 그러한 "관점"은 신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배워야되고 넓혀야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는 것이다.(신학은 오랫동안 하느님과 인간의 주관적 대화를 지속적으로 객관화시킨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을 무시할때 결국 모든 주관적 성령체험은 "자기에게로 몰입"이 되어버리고 스스로가 갇혀버리는 것이다.(실제로 이런식으로 이단이 되고, 소수종파가 된다.)

P.S
솔직히 너무 급하게 또한 어떤 주제를 물자마자 글이 쏟아져서 너무 난장판된 글이 된 것 같다. 언제쯤 차근차근 정리해서 올려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느낀점은 명백하다. "한국교회의 현실이 슬프다"는 것이다. 언제쯤 신학무용론과 "체험중심의" 극단적인 실용주의의 기독교현실이 회복되어질까? 아니 이러한 한국기독교의 현실의 틀이요 배경이요 땅인 한국사회는 어떻게 회복될까? 지속적으로 정권교체가 일어나고 정치적 혁신이 일어나면 가능할까? 아니면 주님이 오셔야만 가능할까? 참으로 한숨이 내쉬어지는 밤이다.

곧 정리해서 다시 올릴 것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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