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 _종교포럼

\"박성업현상\" 해부하기 -1탄- \"로마의 복음인가 나사렛 예수의 복음인가\" 10

저번에 언뜻 말씀드린대로 박성업에 대해서 정리하기 시작한 글입니다. 총 3편의 글을 포스팅할 예정인데 일단 종포에도 관심있는 분이 있으실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단순히 "박성업"에 대한 평이라기보다는 "박성업"을 통해서 한국교회를 비판하는데 "촛점"을 두었습니다.


필자가 존경하는 장공 김재준 교수님이다.
이런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인 통찰력이 가득한 선지자적인 교수님에 의해 한국교회가 주도되었다면 아마 박성업현상은 없었으리라.(물론 진정 난세가 아니고서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 제자들에 의해 교회가 주도되진 않았으리라. 그들은 윗자리를 좋아하지 아니하기에..)
서론.

처음 박성업씨에 대한 글을 쓸때에는 별다른 특별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구지 평해야할 가치없는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도그럴것이 왜 하필 다뤄야될 많은 현상, 인물 중에 하필 박성업씨란 말인가? 하지만 박성업에 대해 논하면 논할수록 내가 논하고 있는 것은 "박성업" 개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자화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자화상 속에서 "마음 줄 곳을 찾고 있는"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그랬다. 나는 박성업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보았다. 기독교에 관심없는 청년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도피하고자 자극적인 "오타쿠 세계"로 입문해버린 크리스쳔 청년들. 그들이 모두 박성업 속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에게는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박성업에 대해 정리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옥죄어왔다. 앞으로 쓸 글들은 그런 책임감의 발로이다. 나는 이제부터 총 세편의 글을 쓸 것이다. 차근차근 한 주제에 대해서 다루게 될 것이다.

먼저 첫번째 쓰게 될 글의 주제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글이 될 것이다. 나사렛의 예수, 예수의 고난 그리고 그와 비교되는 헤롯왕, 로마황제, 십자군같은 사건들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크게 박성업현상과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 "기독교 제국주의"라는 동일성을 끄집어 낼 것이다.

다음 두번째 쓰게 될 이야기는 "신학무용론"에 관한 글일 것이다. 하느님의 음성듣기, 개인적 경건생활. 그로 말미암아 공동체적 신앙이 해체되고 개인의 신앙만 남은 현 한국 복음주의 신앙의 문제점들 드러낼 것이다. 소위 "박성업 현상"은 이런 복음주의신앙을 견지하는 교회의 문제점들이 심화된 것에 불과하다.(이 말인즉슨 현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이러한 박성업현상에 대한 해결책도 없거니와 그리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

마막으로 쓰게될 세번째 글은 "복음주의 신앙"의 문제점부터 시작해서 성령체험. 그리고 극단적 종말론으로 이어지는 초대교회 역사에 나타났던 몬타니우스주의와 연관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반면 그와는 흡사하지만 다른 길을 갔던 "존윔버"에 대한 언급도 하게 될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성령체험과 극단적 종말론이 얼마나 참혹한 "성결주의"를 만들어내고 그러한 "성결주의"가 얼마나 인간의 생명을 말살시키는지에 대해서 다루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소위 "박성업그룹"의 특징이며 그를 주로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 에스더기도운동본부, WLI(신사도운동), 큰믿음교회와 같은 소위 지류들의 공통된 특징 내지는 큰맥락에서 묶을 수 있는 카테고리라고 생각한다.


글의 서론이 너무 길고 세세해서 너무 자세한 학문적인 글을 기대하시진 말길 바란다. 소위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신학도도 아니거니와 단순히 신학에 관심있어 조금의 맛을 본 평신도에 불과한 필자를 이해해달라. 다만 ENFP라는 특징상 "독특한 관점"은 기대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고난당하는 의인의 대표자 예수. 그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초대 그리스도교의 고백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참 억울한 백성들이다. 물론 역사는 "해석"의 묘미라지만 그 "해석"도 정도껏 해야 "해석"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데 히브리인들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심하게 "고난의 역사"를 살아낸 민족들이다. 즉 아무리 "해석"해봤자 "긍정적 결론"을 잘 낼 수 없는 역사적 흔적들을 지닌 나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고난과 아픔에 대해 지속적으로 "하느님"께 따지고 물었다.

그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은 어땠을까? 작은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나타난 "예수"라는 인간속에서 기독교인들은 "말씀"을 발견했다.(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다.) 한번 살펴보자.

예수는 나사렛이라는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나사렛에서 어떤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냐?"라는 질문까지 들었던 그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그는 30세까지 흔하디 흔한 족적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의로웠다"는 증언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는 병자들을 치유했고 그의 메시지는 일반 히브리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는 스스로도 "하느님의 아들"이었지만 남들이 보기에도 충분히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종교적 지도층이었던 사두개파, 바리새파, 대제사장에 의하여 모함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인 로마와 종교적 지도층이 "예수"로 인해 손잡는다.(그들은 지속적으로 대립각을 세워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는 히브리 민중들 또한 이들의 언론플레이에 놀아나게되고, 결국 종교계와 정치계와 시민사회의 대연합(?)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는 그를 따르던 제자들속에서 "부활체"로써 나타나고 경험되어진다. 또한 그들에게 종말론적으로 완전한 "부활"을 약속한다. 그러한 경험과 메시지는 제자들의 공동체로 말미암아 실질적 "부활"을 일궈낸다.

어떤가? 이러한 예수의 삶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발견되는가? 그의 삶은 어쩌면 일종의 "히브리인공동체"의 인격화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온갖 세력들에 의해 짓밟히고 죽임당한다. 그들이 구했던 하느님은 "해방자"였다. 하지만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은 "해방자"가 아닌 자기들과 동일시된 "피지배자"였다. 그들은 하느님을 통해 "역전인생"을 꿈꾸던 빈민이였지만 그들에게 나타난 하느님은 그와 동일한 "빈민"에 불과했다. 그들이 죽임당하고 짓밟힘당하듯이 예수 또한 그렇게 죽임당하고 짓밟힘당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예수를 기다려온 자기들에 의해 죽임당하고 짓밟힘당했다.(일종의 "너는 하느님이어선 안돼"(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소망은 허무해지니까)라는 거부선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떡하나? 예수는 그들과 동일시되었지만 부활했다. 즉, 궁극적 심판이라고 생각했던 "죽음"을 이기고 그들앞에 "참 생명"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부활예수는 그들에게도 동일한 "참 생명"을 약속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속에서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한다. 그렇기때문에, 그런 "예수"를 쫓는 우리의 행위는 예수와 동일하게 세상권세에 의해 짓밟히고 낮아지고 죽임당하는 것이다.(사도바울이 유대교지도자들과 로마지배층에게 동시에 그랬듯이, 본회퍼가 독일 나치에 의해 짓밟혔듯이, 장준하 선생/문익환 목사/김재준 목사 등과 같은 대한민국의 독재체제를 살던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유신에 의해 짓밟혀갔듯이 말이다.) 곧 그러한 삶은 궁극적으로 희생당하신 어린양 예수를 따르는 삶이며 궁극적으로는 그의 부활에 참예하는 삶인 동시에 예배이자 구원이 아닐까?

즉, 히브리인들의 고난과 아픔에 대해 "침묵하시는 하느님"의 응답은 "초월적 구원행위"가 아닌 그들속에서, 그들과 함께, 그들을 통해서 고난받음으로 "동일시되는 내제적 구원행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제적 구원행위"는 그들을 절망케하는 것이 아니였다. 오히려 궁극적으로 나타날 하느님의 통치를 대망케했다. 이 말을 쉽게 말하자면, 히브리인들에게 "권능을 발휘해서 그들을 도왔던 것"이 아닌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느꼈다는 것"이고, 그 사실은 오히려 마지막에 온전히 나타날 "하느님의 나라"를 기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복음과 로마의 복음. 박성업현상은 곧 로마의 복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박성업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하는데 왜 갑자기 예수와 구원. 그리고 삶에 대해서 얘기하는지 쌩뚱맞았을 것이다. 박성업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맹점을 짚으려면 "나사렛 예수"와 그의 억울한 "십자가 사건"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했기 때문이다.

"박성업씨를 비롯한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의 문제는 바로 이것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사실상 한국사회는 전체적으로 "무한경쟁"사회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열등감"에 집단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이러한 "열등감"에 의한 한국교회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원베네딕트선교사가 말했던 소위 "하느님의 빽으로 세상과 맞짱뜨자"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기독교 우월주의"다. 즉, 만군(우주/창조)의 하느님의 존재가 나를 지원(Support)해주기에 타종교 혹은 무교인들에 대한 우월성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하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기독교적 언어"로 표현되었을뿐 돈을 숭상하던 맘몬신의 복음이며 풍족함을 숭상했던 아세라신의 복음이며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라는 제국주의의 언어로 통치했던 로마황제의 복음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예수의 복음은 어떠한가? 스스로 낮아지고 짓밟히며 죽음당하는 예수에게서 우리는 생명을 발견한다는 역설적 고백이다. 즉,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제국주의적, 아세라적, 맘몬적 이해는 "십자군 사태"와 같은 흑역사를 초래한다. 한마디로 예수라는 가치아래, 기독교라는 가치아래 어떤식으로던 헤게모니를 쥔 세력이 되어 다른 사람을 짓밟고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오히려 예수가 이러한 헤게모니를 쥔 세력에게 핍박당했고 죽음당했으며 고통당했다는 것을, 또한 예수를 따르던 초대교회들 또한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는 것을 말이다.

소위 아세라적 맘몬적 제국주의적 기독교이해의 심각성은 "미국식 기독교"로부터 전래된 개념이다. 이러한 미국식기독교를 한번 살펴보자. 한 일화를 언급하겠다. 부시가 이라크침공을 결정했을때를 기억하는가? 그때 부시는 하느님께 기도했다. 또한 그러한 기도하던 부시를 위해 기도하고 예언하던 무리들이 있었다.(공교롭게도 그들의 소위 명칭은 "중보자"이며 박성업과 그의 무리들이 추종하는 세력들이다.) 소위 신디제이콥스를 위시한 "북미 오순절운동"세력의 일부이다.(이들과 미국의 우파간의 끈끈한 관계는 유명하다.) 그들의 "영적 환상"에 따르면 중동과 북한은 사탄의 세력권 아래 있는 악의 국가이며, 미국을 비롯한 미국의 우방국가들은 하느님의 명을 받아 세계질서를 "건전케 하는" 하느님의 국가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심이 들지않는가? 과연 그들은 진정 하느님의 환상을 제대로 받았고 제대로 그 음성을 들었던 것일까?


야훼를 똑바로 믿는다는 것은 신적체험의 깊이 혹은 유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적체험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뜻하는 것이다.

필자같은 경우에는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는 신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강한 내적 확신을 받을 수도 있고 어떠한 특별한 감정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점은 그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그래.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반응은 각자가 다르다. 박성업현상에 대한 반론을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이 바른 신앙이냐 그른 신앙이냐의 판단이 바로 이 "반응"에서 결정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동일한 "야훼"를 따른다고 했던 히브리인들은 동시에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우리의 공급자 야훼"의 토대가 되는 삶의 경험을 공유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애굽"을 그리워했고 어떤 이들은 "가나안"을 기대했다. 동일한 신적 경험의 토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결정"을 하는 것이다. 이는 곧 가치관의 차이요. 세계관의 차이요. 신인식의 차이요.  그들의 관념속에 머무는 야훼에 대한 이미지의 차이였다.

일단, 신디제이콥스를 비롯한 북미 오순절운동세력. 그리고 그들의 예언과 기도를 등뒤에 업었던 부시정권을 기억해보자. 그들이 받았던 환상, 계시, 음성 등의 신체험. 그것이 거짓일까? 참일까? 그 궁극적 "근원"이 어딨느냐라는 질문은 참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는 물을 수 있다. "근원"이 하나님이였다고 치고, "반응"이 참이였을까? 거짓이였을까? 질문을 좀 바꿔보겠다. 그들의 반응은 예수적이었나? 반예수적이었나?

그들은 동일한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기도하며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라크의 정권을 짓밟았고 친미적인 정권을 세웠다. 그리고는 흑암의 이슬람 세력권 가운데 선교의 길을 열었다고 자위했다. 과연 이는 예수의 길인가? 헤롯왕과 빌라도의 길인가?

우리는 예수를 구원자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나타났던 예수는 정치적 지배자도 군사적 지배자도 종교적 지배자도 아니었다. 종교적 이단자였으며, 정치적 약자였으며, 군사적으로는 "비폭력"을 옹호했던 이상주의자였다. 우리가 그를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인류의 평생에 걸친 질문이었던 "고난당하는 의인"과 "전능한 신"이라는 상반되는 개념을 한 몸속에 받아내셨고 십자가처형이라는 삶으로 표현하셨기 때문이다.(그리고는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이겨내셨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죽음과 아픔을 이겨내는 궁극적 생명이 예수와 연합한 우리안에 있다는 사실이요 곧 우리의 믿음이다.)

다시 한번 질문하고 싶다. 북미오순절운동세력과 그들의 지지를 힘입은 부시의 이라크침공이라는 행위는 예수적인가? 반예수적인가? 그들의 기도와 환상과 예언과 모든 신적 경험들은 그리스도교적인가? 아니면 반그리스도교적인가? 그런 모든 신적 경험들이 야훼로부터 왔을지라도, 그들의 반응. 즉 그들의 삶을 해석하는 기반은 그리스도 위에 있는가? 로마라는 세상권세 위에 있는가?(만약 진정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그런 환상을 봤었다면 이라크를 구원해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하지 않았을까?)

(박성업의 facebook담벼락에서 논쟁을 벌이다가 "묘한 점"을 발견했다. 부시의 이라크침공을 지지했던 소위 "중보자"들과 흡사한 그들의 주장이었다. 바로 "북한 선제공격설"이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서는 설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지라도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서 참 다행이긴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식견에 트집을 잡기 이전에 그들의 환상, 꿈, 예언, 계시에 대한 해석은 역시나 "북미오순절운동"그룹과 동일하다. 현실로 일어날 가능성은 없지만 사실상 상상만해도 끔찍한 기도요 환상이요 예언이요 계시임에는 틀림없다.)


현 한국교회는 이러한 예수에 대한 바른 신학적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하다.

현 한국교회에서 곽광받는 신앙의 흐름이 몇가지 있다. 치유신앙, 체험신앙, 개인신앙, 기복신앙 정도이다. 한번 찬찬히 살펴보라. 이러한 신앙 속에 나사렛 예수가 있는가? 이 신앙 속에 십자가 지신 하늘에 의해 버림당하신 예수가 있는가? 엘리엘리라마 사막다니라고 부르짖는 예수가 있는가 말이다.

이미 한국교회는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세상속에 변증해내고 있지 못하다.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사회의 문화와 언어로 풀어내야하는 교회의 위치를 망각하고 현 사회의 가치와 이념들을 그리스도교적 문화와 언어로 풀어내는 변태적 행위(종교적 상술)가 현 교회 내에서 지속되고 있다.

현 교회의 이러한 변태적 행위는 곧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와 반해왔던 물질주의의 흐름이었고 승리주의의 흐름이었고 또한 교조주의의 흐름의 총합의 결과다. 성서는 이러한 흐름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필자의 견해로써는 분명"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다. 사탄은 우리가 상상하는 "귀신"을 가르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권세를 통해서 히브리인을 핍박했고, 유대민족을 핍박했고, 예수를 죽였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핍박하는(우리를 우리답게 살지못하게 만드는) 현 세상의 체제와 권세의 집약어가 바로 "사탄"이 아닌가? 그렇기에 예수는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자신을 자신답게 살지못하게 만드는) 베드로의 충언을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했고, 제자의 삶을 내팽겨치고 권세자에게 빌붙으려고 했던 유다에 대해 성서는 "사탄이 들어갔다"라고 증언한다.(결국 복음서의 보도에 의하면 유다는 유다답게 살지못했지만..)

우리가 만약 예수에 대한 바른 신학적 내용을 갖고 있었다면....


박성업의 환상, 중보, 계시, 예언, 음성은 존중한다. 그러한 체험에 대해 "거짓체험"이다. "진짜체험"이다라고 판단할 분별력은 나에게 없다. 혹시나 내게 그런 것이 있었다한들 입을 다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그거 판단해봐야 뭐하겠는가;; 어차피 박성업이 내가 속한 공동체에 속해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체험을 해석하고 호도/선동하는 그의 "사고", "틀"이 반예수적이며, 반그리스도교적이라는 것이다. 박성업을 비롯한 그의 무리들은 "예수가 우리의 구원이다"라는 그리스도교적 명제를 면밀하게 총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이거니와 깊은 노력)도 없이 "예수라는 슈퍼스타(자의적 해석에 따른)에 열광하는 팬클럽"에 불과한 것이다.(이는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총체적으로 신학무용론을 숭상한다던가 신학적 토대가 부실하다.)

그들에게 사실상 중요한 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드리워진 "열등감의 해소"일 것이다.(이는 본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는 "열등감의 해소"를 해결해줄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열등감"속에 계신 인물이다.) 그런면에서 그들에게 "구원"은 너무나도 요원하다. 허나, 분명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고백에 따른다면 그러한 "구원"은 사실상 없다. 마치 로마와 앗수르, 애굽, 바벨론등의 수많은 강대국에 의한 식민통치를 경험하던 유대인들이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렸던 심리와 그들의 심리는 같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하늘의 응답은 무정하고도 단호하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렇게 요원하던 구원이 없기에 그들의 부르짖음과 몸부림은 격화되는 것이다. "예수 슈퍼스타! 우리의 열등감의 구원자!" 바로 이 외침의 뒤틀린 행위들이 우리가 보고 있는 "박성업 현상"이다.


박성업현상은 한국교회의 연약함의 발로. 그 자체이다.


이러한 박성업현상은 곧 "박성업"때문에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Looser 예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능력과 권세를 나눠줄 "Winner 예수"를 필요로 하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풍토가 만들어낸 현상인 것이다. 즉, 소위 "박성업현상"은 이전에도 있었으며 잠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마치 현 안철수현상처럼 말이다.)

이러한 잠재되어있던 "Winner 예수"에 대한 "열광 현상"은 곧 "기독교의 우경화 현상"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북미오순절운동"의 대부분이 여러 통로를 통해 한국개신교로 유입되었다. 기존 보수정치세력, 보수적 제계세력과 손을 잡고 그들에게 "종교 컨텐츠"를 제공함으로써 일종의 야합이 시작되어 온 것이다. 김재준, 장준하, 문익환과 같은 그러한 기존 세력에 맞서선 진정 Looser예수를 따르던 그리스도인은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속으로 이미 사라져버렸으며, 지금은 정치권력에 머리를 조아리고 손을 맞대어 비비며 "종교단체"만의 존속만을 위해 살아왔던 일종의 이 시대의 "사두개파"들이 교회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있는 시점이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조공했던 예수"같았던 기독교계의 인물은 우리들의 뇌리속에 사라지고, 뒤로는 정치권력과 야합하며 겉으로는 "오직 예수"만을 외치며 "교회 건물의 확장"만을 위해 살아온 목회자들만이 우리의 뇌리속에 남겨져 있는 것이다.(주위를 둘러보라. 다 그들을 찬양하는 서적이고 그들의 사상을 펼쳐낸 서적들이다.)

그리고 어느새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고난당한 의인의 표상)은 점점 우리들의 뇌리속에 지워져만 간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통곡하고 고민해야될 지점이다. 분명 예수는 약한 자, 고난당하는 자의 표본이셨지 지배자/통치자/승리자가 아니셨기 때문이다.(물론 우리의 궁극적인 고백은 승리자 예수이다. 하지만 이런 고백은 종말론적(현재가 아닌 미래를 향한) 선언이며 소망이다.)


그렇기에 한국교회는 낮아져야만 한다.


한국교회는 매우 시끄럽다. 일명 "총"회장 선출 때문에 모인 "총"신대 졸업생들의 교단 합동"총"회에서 이견들이 일어나자 "총"무께서 직접 가스"총"을 들고 나오셨다. 또 한편으로는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로 대표되는 "대형교회 세습문제"를 김동호 목사님께서 치열하게 싸우기 위해 준비하고 계시다. 그뿐 아니다. 이전에 일어났었던 전병욱 사태도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 이른바 "총"체적 난국이다.

이러한 총체적난국은 곧 "메시아 대망"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이는 정치계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08년도의 메시아는 MB였고, 현재의 메시아는 "안철수"이다.)  그런 "메시아 대망"이라는 현상이 신학적 소양이 무지하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청년들에게는 "박성업 현상"으로 점철된 것이다. 실제 박성업의 성품은 투쟁적이고 열정적이다.(예수의 공생애가 이와 흡사한 행태를 지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말은 필자의 글과 같이 난해하지 않다. 또한 필자같이 찌질하게 컴퓨터앞에서 키보드를 만지지도 않는다. 그는 행동하고 단순하게 말한다. 그의 언변에는 강력한 열정이 실려있다. 소위 인간적으로 매력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이미 청년들사이의 "메시아"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그렇다. 이런 총제적난국이 "박성업"을 소환한 것이다. 사실상 "박성업"을 탓하거나 반박하기에는 너무나 멀리왔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단 하나다. 한국교회가 낮아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머리를 조아리고 두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어야된다. 누구앞에 그렇게 해야할까? 한국사회와 하느님앞에, 그리고 내 이웃앞에 그렇게 해야한다. 단순히 이벤트나 쇼로 끝나는 낮아짐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져나오는 낮아짐이여야 할 것이다. 그런 진정한 "낮아짐"은 곧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우리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에 신학적으로 또한 공동체적으로 바로 정립되게 될때에 그렇게 될 것이다. "팍스로마나의 복음"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복음"이 그에 대한 해답으로 고백될때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다음편에서 "신학무용론"을 중심으로 박성업현상을 좀 더 까발리고자 한다.

짧은 후기.

언제나 글쓰기는 그렇다. 쓰고나면 아쉬움이 남고 쓰고나면 지저분하다. 이것이 다 부덕의 소치(?)인 것 같다.(뭔 개소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 추천하기 다른의견 0 |
목록보기 공유 코멘트작성 코멘트10
열공모드 다른의견 0 추천 0
| 덧글 점아이콘
  1. 댓글주소복사
Humble_David 다른의견 0 추천 0
| 덧글 점아이콘
  1. 댓글주소복사
숑숑숑~ 다른의견 0 추천 0
| 덧글 점아이콘
  1. 댓글주소복사
Humble_David 다른의견 0 추천 0
| 덧글 점아이콘
  1. 댓글주소복사
와이비 다른의견 0 추천 0
| 덧글 점아이콘
  1. 댓글주소복사
Humble_David 다른의견 0 추천 0
| 덧글 점아이콘
  1. 댓글주소복사
허러러꾸 다른의견 0 추천 0
| 덧글 점아이콘
  1. 댓글주소복사
Humble_David 다른의견 0 추천 0
| 덧글 점아이콘
  1. 댓글주소복사
[* 비회원 *] 다른의견 0 추천 0
| 덧글 점아이콘
  1. 댓글주소복사
Humble_David 다른의견 0 추천 0
| 덧글 점아이콘
  1. 댓글주소복사

욕설, 상처 줄 수 있는 악플은 삼가주세요.

<html>
rich mode
code mode